혜안스님─돈과 행복

돈과 행복 /”행복은 삶의 목표 이루어 가는 것” 혜안 스님/법인경판제작연구소장

행복의 조건에 돈을 내세우는 것은 나 스스로 달갑지 않다.

하지만, 엄연히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에 살고 있다.

돈이 없다면 행복의 조건을 완전히 이루기는 힘들다.

행복이 상대적인 가치라면 돈 역시 많이 가지고 있다고

항상 행복하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돈이 행복이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돈으로 인해서 우리가 가질 수 있는 만족감이

바로 행복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렇다면,

우리는 적은 돈으로도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다.

우리가 바라는 그 어떠한 만족감이라도 얻을 수 있는

적은 돈을 나는 행복이라고 말하고 싶다.

우리가 배고플 때, 먹고 싶은 것을 사먹을 수 있는

5,000원은 행복이다.

5,000원으로 원하는

밥을 사먹고 얻을 수 있는 배부른 만족감이 행복이다.

우리가 목이 마를 때 1,000원으로 마실 수 있는 음료수,

목이 마른 상태의 갈증을 없애줄 수 있는 1,000원은

바로 그 때 행복을 구하는 조건인 것이다.

5,000원과 1,000원처럼 액수 차이가 나지만,

그 상황에서 각각의 돈은 우리에게 행복을 줄 수 있다.

금액의 차이가 행복의 차이를 나타내지는 않는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돈이 없는 상태 즉,

빈털터리라면 이러한 행복을 누릴 수가 없다.

돈이 적건 많건 간에, 돈이 조금이라도 있는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조건이 되는 것이다.

비극적이긴 하지만 사실이다.

돈으로 인해서 우리는 물질적인 것을 소유하게 된다.

그리고 소유한 것에서 행복을 느끼는 사람도 있고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그것은 그 상태에 대한 만족을 느끼는 가

느끼지 못하는 가에 대한 문제이다.

결국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자신이 소유한

물질에 대해서 만족하려는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아무리 많은 물질을 소유하게 된다 하더라도

만족할 줄 모른다면 그 사람은 곧 불행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노력이 바탕이 되어 소유하게 되는

물질들에 의해서 만족을 얻고

그 결과 행복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행복을 느끼기 위해서는 누구나

마음속에 품고 있는 만큼의 물질의 양을 소유하고,

소유한 것에 대해서 만족을 느꼈을 때

결국 행복을 느끼게 된다.

우리가 돈으로 인해서 가질 수 있는

물질은 행복의 절대적인 필수조건은 아니지만,

행복의 필요조건이 될 수는 있는 것이다.

이를테면 기본적인 의식주 역시 인간의

행복의 조건이 될 수 있다.

우리는 살기 위해서 의식주가 필요하다.

의식주는 다분히 물질적인 요소이다.

우리가 입는 것, 먹는 것, 자거나 머물며

쉬는 곳이 필요하다.

지금이 몇 만 년전의 석기시대라면

우리 인간은 스스로 자기가 필요한 것을 구하며 살았겠지만

현대처럼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이라는 것이

이러한 것을 구해준다.

직접 농사를 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먹을 것을

어떻게 구할 것인가? 우리는 매일 물을 마시고

밥을 먹어야 산다.

그리고 추우면 옷을 입거나

따뜻한 집에 있어야 버틸 수 있다.

이러한 기본적인 요건을 충족시켜 줄 수 있는 것이 돈이다.

그렇기 때문에 의식주는 돈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행복의 조건으로 삶의 목표를 들고 싶다.

우리 인간은 어차피 결국은 죽게 되어있다.

어차피 죽을 것이라면 왜 살아야 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 고민해야 할 것이다.

종교에서는 인간이 죽은 후에 다시

윤회한다고 하기도 하며, 천국에 가서 산다고

하기도 하지만 종교가 생기기 이전부터

인간은 삶에 대해서 고민했을 것이다.

나 역시 사춘기 때 왜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

심각하게 고민해본 적이 있다.

어차피 나이 들면 언젠가는 죽을 텐데, 살아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 고민이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고민은 어차피 죽긴 하지만,

죽기 전에 열심히 살아야 되겠다는 다짐으로 바뀌게 되었다.

그렇다면 열심히 산다는 것은 어떤 것을 말하는 걸까?

우리는 어릴 때 커서 뭐가 될래? 하는 말을 많이 듣는다.

아마 그 때부터 우리는 삶의 목표에 대해서

고민하는 것 일지도 모른다.

보통 우리는 성인이

되기 전 까지 원하는 직업을 가지기 위한 노력을 한다.

그래서 성인이 되기 전까지 삶의 목표가 된다.

직업을 가진 후에는 직업 안에서 이루고자는

목표를 설정하고 노력한다.

하나 하나의 삶의 목표를 정하고 이루어 가는 것이

행복의 조건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원하고자 했던 자화상을 이루는 것이

바로 궁극적인 행복의 조건이 될 것이다.

누구나 미래에 대한 목표가 있다.

즉 바라는 것이 있고 그것을 이룰 때 가질 수 있는

만족감에 대한 기대가 있는 것이다.

그 만족감은 우리 자신에게 큰 행복이 된다.

그것 때문에 우리는 살면서 노력하고

더 열심히 살려고 하는 것이다.

삶의 목표가 있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살기 때문에 우리는 행복을 찾을 수 있는 것이지,

아무 계획 없이 그냥 되는 대로 살려는 사람은

하루 하루가 똑같고 매일 매일이 행복이 없는 삶일 것이다.

이처럼 자신이 살고자 하는 삶에 대한

목표를 세우고 그것을 하나하나 이루어 나가는 것이

바로 행복의 조건이 된다.

진운스님─왜 남을 칭찬하고 찬탄하는데 입으로 ___

●왜 남을 칭찬하고 찬탄하는데 입으로 지은 자신의 죄업이 깨끗하게 될까?/진운 스님● 우리는 알게 모르게 수많은

구업(口業)을 지으면서 하루 하루 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천수경 첫머리에 “淨口業眞言 – 수리수리마하수리수 수리사바하”

라는 진언이 나온다.

정구업진언(淨口業眞言)이라는 뜻은 입으로 지은 온갖 죄를 깨끗이 하는

참다운 말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입으로 지은 온갖 죄를 “수리 수리마하 수리수수리사바하”라고 입으로 암송하거나 외운다고

과연 입으 로 지은 죄가 소멸할까? 진언의 신비한 힘에 의하여 또는 심리적으로도 어느 정도 효과는 있으리라 본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진언의 내용을 알고

암송하거나 소리내어 염하는 것이

훨씬 더 효과가 있는 것이다.

淨口業眞言의 뜻은 남을 칭찬하고 찬탄하라는 내용이다.

왜 남을 칭찬하고 찬탄하는데 입으로 지은 자신의 죄업이 깨끗하게될까? 사람의 마음은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것 모두는 물이 모래에

흡수되듯이 마음에 저장이 됩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기억 하는 것은 마음에 저장된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만일 지난 일을 기억할 수 없다면 생활자체가 이루어지지 않아

사회는 곧 혼란에 빠지고 말 것이다.

그렇다면 칭찬하고 찬탄하는 것이

어떤 효과가 있기에 입으로 지은 업을 정화할 수 있을까? 그 이유는 칭찬과 찬탄의 말은

듣는 사람을 기쁘게 해주는 동시에 칭찬과 찬탄을 한 본인도

그 영향을 바로 받는다.

왜냐하면 자신이 말한 것을 남도 듣지만 동시에 스스로 듣기 때문이다.

어느 講師가 그 날 강의할 내용을

정리하지 못한 상태에서 학생들에게 강의할 때 강의 도중에 그 내용이 정리되는 경험을 겪었다고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누구에게 이야기하던 중에

정리되지 않았던 이야기와 줄거리의 내용이 정리가 되는 것은 바로 자신이 말한 것을

자신의 귀로 듣기 때문이다.

따라서 “淨口業眞言 –

수리수리마하수리수수리사바하”라고 외우는 것보다 남을 칭찬하고

찬탄하는 일이야말로 일상 생활 속의 정구업진언이 되는 것이다.

만일 자기 자신의 이익을 위해

칭찬과 찬탄을 하거나 악담과 이간질,허망하게 속이는 말을 한다면 상대방을 不信의 늪으로 이끄는 일이다.

이는 상대방을 파멸의 구덩이에

빠지게 할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도 그렇게 되어 정서불안이나 정신분열증을 불러 일으켜 파탄에 이르게 된다.

마음속에 불만이 있는 분들은

지금 이 시간부터라도 남을 칭찬하고 찬탄하는 습관을 가져 보라.

그러면 가정이 화목해지고 대인관계가 원만하고 사회가 밝아질 것이다.

그러나 이기적 칭찬과 찬탄은 구업을 짓는 행위이다.

칭찬과 찬탄을 아끼지 맙시다.

아이에게나 직장 동료, 이웃에게 칭찬과 찬탄하는 말(言語)의 파장은 눌려있던 마음이나 상처입은 마음

우울한 마음이나 열등의식에 사로잡혀 있던 자신의 마음과 다른 사람의 마음을 녹여주는 훌륭한 약으로 용기와 희망을 심어주게 될 것이다.

淨口業眞言 “수리수리마하수리수수리사바하”

무진장스님─불교란 믿는 것이 아니라 닦는 것

불교란 믿는 것이 아니라 닦는 것

-무진장스님-

우리는 지금 정신적으로 대단히 황폐화된 시대에 살고 있다.

고상한 시민의식은 없고 시민의식이 점점 천박해져서 실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는 시대까지 이르렀다.

불교적으로 보면 ‘탐진치’라는 어리석은 마음이 가득 차 있다.

이런 점에서 불교를 포함한 모든 종교가 근본을 생각해서 청렴하고 담백하고 아름다운 마음을 가져야 한다.

부처님은 “사람의 마음속에 불성이 있다.

그 이치를 깨달으면 인격을 완성시킬 수가 있다”고 설법하셨다.

그것을 ‘견성성불(見性成佛)’이라고 한다.

우리는 부처님 말씀을 듣고 무엇이 옳은 길이고 무엇이 옳지 못한 길인가를 생각해야 된다.

자기만이 최고이면 스승이 있을 까닭이 없다.

배울 것이 아무것도 없는 그런 사람들이다.

이제 우리는 지혜롭게 살아야 된다.

불교는 엄격히 말하면 믿음의 종교가 아니다.

불교는 단순한 믿는다가 아니다.

불교는 수행 이다.

시간이 가고 세월이 흐르면 우리는 부처님과 같이 지혜로워질 수 있다.

부처님과 같은 판단력을 가지고 가정생활과 사회생활을 할 수 있다.

불교적인 사고방식은 어떠하냐.

자기 자신을 새롭게 인식할 필요가 있다.

지금 여러분은 육신이 몸을 이루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 몸뚱아리는 여러분 마음이 갖고 있는 것이다.

마음이 중요한 거지, 육신이 중요한 건 아니다.

육신에 치우친 인생은 중생적인 것이고, 마음을 바로 쓰면 부처님과 같은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컵 속의 물은 물일 때는 얼음그릇 속에 비워도 꼭 맞는다.

무슨 그릇에 비워도 꼭 맞는다.

그러나 이 물이 한 번 얼어버리면 맞는 그릇이 없다.

이 물이 꽁꽁 얼어서 얼음물이 돼서 얼음그릇에 담지만 맞는 그릇이 없다.

지금 대한민국 국민은 어떠하냐.

각자 마음이 경색돼서 얼어붙어서 부부도 안맞고 부모와 자식도 안맞고 형제도 안맞고 이웃과 이웃이 서로 안맞는다.

각각 살고 있는 것이다.

얼음처럼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물처럼 살아야 될 것이다.

그래서 노자도 물처럼 사는 것이 최상의 방법이라 했고 공자는 물처럼 살라고 했다.

부처님께서는 화엄경에서 “적정을 길러라, 고요하게 살아라, 고요 속에 길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적정이란 말은 고요 ‘寂’, 고요 ‘靜’자를 쓴다.

“ 고요하고 고요하게 살아라.” 지금 여러분들은 그 고요 속에 들어가면 길이 열릴 것이요, 그 고요를 모르면 인생은 실패할 것이다.

어리석은 사람은 이익한 것만 추구한다.

자기에게 이익되는 것이 아니면 안 하려고 한다.

그런데 그 이익한 것 속에 ‘화(禍)’가 들어가 있다.

만약 물고기가 미끼 속에 낚시가 있다는 걸 알면 그걸 물겠는가.

낚시가 있다는 건 뭐냐.

사람이 어떤 ‘이(利)’ 것을 추구하는데 그속에 ‘화’가 들어있다는 걸 알면 덥석 물지 않는다.

요새 그것을 알지 못하고 덥석 물었다가 교도소에 간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이익한 것 속에 ‘화’가 있는 줄 모른다.

불교를 믿는 사람은 항상 습관적으로 자기를 구한다.

나는 어떤 존재인가.

부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심지라 했는데 마음 ‘心’, 땅 ‘地’.

마음의 바탕이다.

그 마음의 바탕이 어떤 거냐.

마음을 너그럽게 쓰는 사람과 인색하게 쓰는 사람이 있다.

마음을 너그럽게 쓰는 사람은 탱자를 심어도 유자가 되는 수가 있다.

마음이 너그럽지 못하고 옹색한 사람은 유자를 심어도 탱자가 된다.

자기를 돌아 볼 줄 아는 의식이 있어야 된다.

지금 여러분이 자신을 돌아볼 때 굉장히 어리석은 존재임에도 자기를 돌이켜서 반성해 본 적이 없다.

무엇이 바쁜지 무엇에 시달렸는지 모르지만 자기 자신을 돌아보려는 여유가 없는 사람들이다.

법문은 신비하고 이상한 얘기가 아니다.

인간이 바르게 살아나가는 방법을 말하는 것이다.

유마힐 거사 어록 중에, “마음을 곧게 쓰는 것이 보살 정토다”란 말이 있다.

지금 우리나라 국민 전체가 ‘직심(直心)’이 없다.

곧은 마음을 쓰는 사람이 없다.

마음이 깊고 깊은 것이 보살 정토고 마음이 깊고 깊은 사람이 극락정토에 가는 것이다.

지혜의 마음이 이 극락 정토에 가는 것이다.

여기서 지혜란 판단력이다.

나는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되는지에 대해 판단이 명석한 그런 이해를 돕기 위해 부처님 말씀이 필요한 것이다.

지금 여러분이 바깥 세상만 바라보면 온통 뒤집히는 것 같아도 여러분의 심성으로 돌아가서 살펴보면 부동의 세계가 있다.

동요하지 않는 아름다운 세계가 있다.

그래서 사자가 사람에게 달려들 때 사자의 시선을 돌리기 위해 흙덩어리를 주물러서 휙하고 던지면 그것에 관계없이 사람을 무는 건 사자의 지혜다.

개에게 흙덩어리을 주물러서 휙하고 던지면 사람에게 달려들다 말고 흙덩어리을 물고 가는 건 개의 습성이다.

중생은 사자와 같이 살아야 된다.

그 지혜의 능력이 그만큼 이치의 세계가 다르다.

마음의 바탕에 어지러움이 없는 정당한 마음과 지혜를 닦아야 된다.

그래야 우리는 행복을 누릴 수가 있다.

여러분의 심성이 아름다운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그 마음을 연주할 줄 아는 마음도 있어야 된다.

대한민국 국민이 대한민국이라는 거대한 거문고가 있어도 그 나라 국민이 연주하는 솜씨가 있어야 아름다운 소리가 난다.

그런데 연주할 만한 솜씨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들어서 감상할 줄 아는 사람을 못 만나면 피장파장이다.

“마음으로 돌아가서 그 마음을 살피지 못하면 팔만대장경을 다 읽은 유익한 바가 없다.

항상 자기가 자기 마음을 살피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해야 된다.

그 성품이 궁하여 다하지 못하면 좌선염불해도 이익한 바가 없다.

정법을 믿지 못하면 법이 밝은 것을 믿지 못한다.

애써서 고행 수도를 해도 이익한 바가 없다.” 결국 불교라는 게 뭐냐.

믿는 것이 아니라 닦는 것이다.

“ 닦아라.” 마음을 닦아야 될 것이다.

부처님 말씀이 아니면 우리는 어떤 것도 용납하지 않는다.

이런 확신이 있어야 한다.

불교를 믿는 사람은 불교를 믿는 사람의 절개가 있어야 된다.

“많은 사람이 부처님 경전을 알고자 할진데 마땅히 그 뜻을 밝히기를 허공과 같이 하라.

망상과 모든 고뇌를 멀리해서 마음에 향하는 바가 다 걸림이 없게 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