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일스님─마음을 열고 들으세요

마음을 열고 들으세요

-덕일스님-

껍데기로 들으면 여러분은 죽습니다.

오로지 나의 혼으로 들어야 합니다.

세상의 모든 흙탕물 같은 소리를 내가 참마음으로 듣는 순간에 청정수로 변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소리를 잘 듣는 사람은 지혜를 얻지만 필요한 소리만 잘 듣는 사람은 편협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탐욕과 음욕에 시달리는 이유는 육체의 귀로 듣기 때문이지요.

참마음으로 들어야 합니다.

귀를 막고 세상의 모든 소리를 들을 수 있을 때 그 모든 소리는 참생명의 깨달음의 소리로 들립니다.

이것이 참마음으로 듣는 것입니다.

깨달음의 가장 유익한 방법은 들어서 깨닫는 것입니다.

나를 비방하는 소리도 귀로 들으면 화나고 괴롭지만 나의 참마음 자리에서 들으면 나를 완전히 해탈시키는 위대한 반야선이지요.

항상 마음을 열고 들으세요.

네모는 세모나, 원이나, 오각형이나, 팔각형을 다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네모의 생각만 고집하며 네모만 받아들이면 안 됩니다.

세모의 생각으로 세모만 받아들이면 영원히 듣지 못합니다.

듣는 자는 지혜자요 듣지 않는 자는 무지자예요.

선한 말과 나에게 이롭고 달콤한 말만 듣는 자는 어리석은 자요 내게 쓰고 괴롭고 원치 않는 말을 듣는 자가 진정한 지혜자입니다.

사(思)는 무엇입니까? 생각은 분별하는 것이 아니예요.

오로지 자비심과 진리의 말씀을 생각하는 겁니다.

진리의 말씀을 내 골수에 새기고 또 새기는 겁니다.

상대가 욕을 했을 때 가슴 아프게 새기는 것이 아니라 감사하게 새기는 겁니다.

상대가 나를 비난했을 때도 그것을 새기고 또 새겨서 그 안에서 보배를 발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이아몬드입니다.

수(修)는 무엇입니까? 수(修)는 내가 실천하는 것이지요.

여러분은 생각할 것 없습니다.

그대로 행하면 그것이 도(道)요, 해탈입니다.

여러분의 생각을 넣지 마세요.

세상의 사량 분별을 넣지 마세요.

마음을 자비심으로 열어 놓고 생고집으로 하지 말고 다 받아들이면서 행하세요.

나와 일체의 우주 만물은 철저하게 보이지 않는 영적, 정신적, 육체적 그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나는 항상 진리를 생각하리라.

나는 항상 진리의 말씀을 생각하리라.

나는 참생명의 자비를 실천하리라.

대법은 절대 걸리지 않습니다.

대법은 모든 사람을 위하는 삶입니다.

내가 하는 말과 생각과 행동이 진실로 가정을 위하고, 자녀를 위하고, 세상을 위하는 것이어야 하고 나의 행동은 세상의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행동이어야만 합니다.

현진스님─번뇌를 껴안아라

번뇌를 껴안아라

-현진스님-

현실의 고난을 바꿀 수 있는 방법은 없다.

하지만 괴로움을 받아들이고 대응하는 방식은 얼마든지 바꿀 수 있다.

닭은 추우면 나무 위로 올라가고, 물오리는 물 속으로 들어가 추위를 피한다.

지금의 상황보다 더 깊이 몰입해서 고난을 전환한다는 것.

때로는 번뇌를 피하지 말고 삶의 일부분으로 인정하고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것이다.

그물코 하나를 당기면 그물망은 따라오는 법.

삶의 원리를 크게 통찰하면 세세한 번뇌는 우수수 떨어질 것이다.

우리가 어리석은 것은 번뇌를 다스릴 줄 몰라서가 아니라 번뇌의 원인을 파악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리석음의 근원을 정확히 알고 그 상황을 반전시키는 그것이 지혜이다.

그래서 삶의 지혜는 번뇌 속에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더욱 필요한 가르침인지 모른다.

한자로 ‘탐낼 탐貪’ 자는 ‘조개 패貝’ 위에 ‘이제 금今’ 자가 있고, ‘가난할 빈貧’ 자는 ‘조개 패貝’ 위에 ‘나눌 분分’ 자가 있다.

이는 탐욕이 화폐를 계속 쥐고 있는 것이라면 청빈은 그것을 나눌 때 가능해진다는 뜻이다.

재물을 쓰지 않고 감추는 것은 스스로 소유의 골방에 갇혀 있는 꼴이다.

자신의 이익에만 빠져 현재의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지금의 일이 화를 불러올지 복을 불러올지를 알아야 한다.

당장의 이익에만 눈 멀면, 등 뒤에 숨어 있는 불행을 보지 못한다.

화는 눈덩이다.

자꾸 굴리면 커지지만 그냥 두면 작아져서 없어진다.

눈덩이가 녹고 나면 무슨 실체가 있던가.

화 역시 감정의 거품인 것이다.

따라서 화내는 자신을 알아차리면 화의 급류에서 벗어날 수 있다.

“자네들도 혀를 언제나 부드럽게 간직하게.

딱딱한 혀를 가진 사람은 남을 화나게 하거나 불화를 가져오는 법이니까.” “용서를 구할 때 받아 주지 않는 것도 허물이다.

원한을 품어 오래 두지 말고 분노의 땅에도 또한 머물지 말라” 이제 결론이다.

화를 냈다면 그 화를 알아차리고, 화를 참았다면 그 화를 지켜보아라.

그럼 둘 다 병이 되지 않고 용해된다.

이 말은 화낼까, 참을까, 이 둘을 가지고 고민하지 말라는 뜻이다.

“누구나 화를 낼 수 있다.

그것은 쉬운 일이다.

그러나 올바른 대상에게 화를 내는 것, 적당하게 화를 내는 것, 적절한 시기에 화를 내는 것, 올바른 목적을 위해 화를 내는 것, 올바른 방법으로 화를 내는 것, 그것은 어려운 일이다.” –

법장스님 ─오고 감 없는 삶

[법장 큰 스님 영결식 중에 방광하는 모습] ●오고 감 없는 삶/법장스님● 진리에는 본래 태어남도 없고 죽음 또한 없으며 실상(實相)은 항상 머물고 있는데 어찌 여래(如來)에게 열반일(涅槃日)과 탄신일(誕辰日)이 있어 오고 가심이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태양은 항상 스스로 밝은 빛을 내고 있는데 중생들이 공연히 진다 뜬다 하며 낮과 밤을 만든 꼴이요, 꿈속에서는 분명히 생사가 있으나 깨고 나면 꿈속의 생사가 거짓이듯 진리에는 생사가 없는 겁니다.

부처님께서는 인생과 우주에 본래 생사가 없는 도리(道理)를 설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 주신 것은 인간이 늙지 않고 죽지 않는 방법이 아니라 우리는 본래 늙을 것도 죽을 것도 없는 영원한 생명이요, 전능한 존재라는 가르침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생사대사(生死大事)를 깨달으시고, 우리에게 생사가 없다고 하셨는데 우리가 믿음도 부족하고 지혜도 부족해서 생로병사가 있다고 고집하는 것입니다.

무명연기(無明緣起), 12연기(十二緣起)에도 보면 생사라는 것이 무명(無明; 어리석음) 한 생각에 의해서 생겨난 것이지 본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금강경(金剛經)에 이르시기를, “수보리(須菩提)야, 어떤 사람이 말하되 여래가 온다거나 간다거나 앉는다거나 눕는다고 한다면 이 사람은 내가 설한 바의 뜻을 알지 못했음이니 무슨 연고냐? 여래란 좇아오는 바도 없으며 또한 가는 바도 없을 새, 그러므로 이름이 여래니라.”

라고 하셨습니다.

여래의 실체가 이러할진댄 어찌 여래의 그림자만을 쫓고 있을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구시나가라 사라쌍수 아래에서 열반에 드시려 할 때 제자들이 울부짖으며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시면 우리는 무엇을 의지해야 합니까?”하고 여쭈니 부처님께서 이르시기를 “마땅히 사법(四法)에 의지하여야 하리니 무엇이 사법인가 하면, 법(法)에 의지하고 사람(人)에 의지하지 않으며, 뜻(義)에 의지하고 말(語)에 의지하지 않으며, 지혜(智)에 의지하고 앎(識)에 의지하지 않으며, 요의경(了義經)에 의지하고 불료의경(不了義經)에 의지하지 않는 것이다.”

라고 하신 가르침이 열반경(涅槃經)에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열반에 들었다고 하면 육신의 멸함으로 알고 있는데 본래의 뜻은 번뇌를 끈 상태라는 뜻과 오고 감이 없는 상태, 취(取)할 것이 없는 상태, 부정(不定)이 없는 상태, 장애(障碍)가 없는 상태 등을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부처님 열반일’을 맞이하여 사부대중(四部大衆)께서 부처님께 갖가지 공양물을 올리고 정성껏 기도를 올리시니 제가 진실한 공양에 대해서 장아함경(長阿含經)의 말씀을 전해 드리겠습니다.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시려고 누우시니 하늘에서 천신(天神)들이 예쁜 꽃과 훌륭한 과일을 바쳤습니다.

이에 부처님께서 아난 스님(阿難尊者)에게 이르시기를, “여래에게 바치는 참다운 공양은 여래의 법을 올바르게 실천하는 것이다.”

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대중께서는 이 가르침을 명심하셔서 수행자의 몸과 마음으로 참다운 공양을 올리시기 바랍니다.

부처님께 올리는 가장 아름다운 등공양(燈供養)은 우리의 마음에 지혜의 빛을 밝혀 부처님께 바치는 것이요, 가장 향기로운 향공양(香供養)은 우리의 마음에 중생을 향한 자비의 향기를 부처님께 바치는 것이니 이 몸이 초가 되어 부처님 전을 밝히고 이 몸이 향이 되어 부처님 전을 맑히는 공양을 올려야 가장 큰 공덕을 짓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게으름 없이 정진하여서 불과(佛果)를 맺는 것이 천신의 수승한 과일공양보다 더 위대한 공양이요,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지난 죄업을 참회하고 선업(善業)을 쌓아 자비로 피어나는 미소를 중생들에게 보낼 때 천상의 꽃보다 더 아름다운 꽃 공양을 부처님께 바치는 것입니다.

일체 형상이 있는 것은 영원한 것이 없으니 그저 스쳐 가는 바람으로 알고 꿈이고, 물거품이고, 그림자이고, 이슬 같고, 번갯불 같다고 생각하고 또 우리가 받고 있는 모든 고통과 고난과 번민이 모두 스스로 어리석음으로 시작하여 애착 때문에 일으킨 것임을 깨달아 스스로 놓아 버리고 벗어나야 열반에 이르게 되는 것이니, 꼭 이렇게 되어야만 부처님께 진심으로 공양을 올리는 것이 되고 은혜를 갚는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불문(佛門)에 든 수행자들이 부처님의 열반에 드신 거룩함에는 비교할 수는 없지만 타종교의 지도자들보다는 초월적이고 감동적인 죽음을 맞이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생사가 본래 없는 도리를 확실하게 깨달아서 생사를 초월해 언제 어디서나 걸림 없이 자유롭게 살다보니 죽음 또한 멋지게 맞이하게 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한 예로 저 중국의 등은봉 스님(鄧隱峰 禪師)께서는 세상을 떠나실 때 대중 스님들에게 “내가 알아보니 그 동안 앉아서 가고 서서 간 스님들은 많이 계시나 거꾸로 서서 떠난 분은 없으니 이제 내가 그렇게 가겠다.”

라고 하시고 천장에 거꾸로 매달려 가셨는데 신기하게도 몸은 거꾸로이신데 옷이 뒤집혀 흘러내리지 않았고 제자들이 아무리 당겨도 떨어지지 않으셨습니다.

잠시 후 선사의 누이가 되시는 비구니께서 “노형(老兄)은 평상시에도 율법(律法)을 잘 안 지키고 이상한 행동을 일삼아 대중을 놀라게 하시더니 돌아가실 때에도 대중을 현혹시키는 짓을 하십니까?”하고 미니 시신이 떨어져 넘어갔습니다.

우리도 생사의 근본도리만 깨달아 증득하면 갈 때를 스스로 알고 마음대로 때와 곳을 택해서 자유자재하게 대해탈의 세계로 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명철한 진리의 세계에서 보면 부처님탄신일이라고 기뻐할 것도 부처님열반일이라고 슬퍼할 것도 없는 것입니다.

오직 부처님의 크신 은혜를 찬탄할 뿐입니다.

끝으로 불교의 역사를 나타내는 불기(佛紀)는 부처님 열반하신 해를 기원(紀元)으로 하는 것을 알려 드리니 이를 입멸연대(入滅年代)라 합니다.

-전 조계종 총무원장, 열반에 드신 법장스님의 부처님열반재일 법문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