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나무 밑에서 동자에게 물으니

송하문동자 松下問童子 소나무 밑에서 동자에게 물으니

언사채약거 言師採藥去 스승은 약초를 캐러 갔다고

지재차산중 只在此山中 다만 이 산속에 있을 테지만

운심부지처 雲深不知處 구름이 깊어서 알 수가 없구나.

산속에 은둔하고 사는 현자(賢者)가 있었다. 이 사람을 만나고자 찾아갔더니 동자가 말하기를 스승은 약초를 캐러 나갔다 한다. 산 속 어디쯤 있을 테지만 구름이 깊어 행방을 알 수 없다.

이 시는 신선도의 그림이 연상될 정도로 도가풍이 물씬 나는 시다. 당시(唐詩)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로 『고문진보(古文眞寶)』에 수록되어 있는 명시(名詩)이기도 하다. 작자 가도(賈島779~843)는 한 때 스님이었던 사람으로 법명을 무본(無本)이라 하였다. 환속한 후 유랑시인으로 생애를 마친 그는 이 한편의 시를 남김으로서 불후의 명성을 얻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시를 좋아한 그가 어느 날 시구의 글자를 맞추는데 골몰하며 길을 걷다가 한퇴지의 행차에 무례를 범해 낭패를 당할 위기에 놓이게 되었는데, 그는 “시상에 사로잡혀 글자에 골몰하다 그랬다”고 변명하자 한퇴지가 쾌히 용서하고 글자를 정해주었다는 고사가 있다. “새는 못가의 나무에서 자고(鳥宿池邊樹), 스님은 달 아래 문을 밀친다 (僧推月下門)”는 글귀를 짓는데, 두 번째 구의 밀칠 ‘퇴(推)’자를 두드릴 ‘고(鼓)’자와 비교하여, 어느 자가 좋을까 하고 생각하다가 한퇴지의 행차를 미처 몰랐던 것이다. 한퇴지가 ‘퇴’자를 정해주면서 그의 시재(詩才)를 인정, 이로 인해 환속하여 미관말직을 얻었으나, 천성이 유랑을 좋아하여 자호를 낭선(浪仙)이라 했듯이 유랑생활을 하였다. 그러면서도 그는 시를 지을 때 글자 하나를 선택하는데 무척 고심을 하여 고음(苦吟)시인으로 알려진 사람이다. “두 시구를 삼년 만에 얻어 한번 읊으매 두 줄기 눈물이 흐른다 (二句三年得 一吟雙淚流)”고 하였다 . 당시의 은둔자들의 탈속적 생활이 일부 동경의 대상이 되기도 했는데, 그도 은둔자들을 찾아 심방하기 좋아했는지 이 시의 원제목도 “은자를 찾았으나 만나지 못했다 (尋隱者不遇)”로 되어 있다.

지안스님 해설. 월간반야 2004년 2월 제39호

잡초는 씨앗을 이고 나온다

아득한 옛날 농사를 처음 짓기 시작할 때였다.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면서 나무 열매나 잎을 따먹고 사냥이나 고기잡이를 하면서 살다가, 물 좋고 따스하고 넓은 들이 있는 곳에 정착하여 곡식과 채소의 씨앗을 뿌리면서 농경사회가 시작되었으리라. 씨족을 중심으로 끼리끼리 화목하게 모듬살이를 하는 것을 지켜본 조물주가 기특하게 여기고는 곡식과 채소를 심은 논밭에는 잡초가 나지 않도록 했다고 한다.

잡초가 없는 논밭에는 곡식이나 채소가 잘 자라 농부들은 아무런 걱정 없이 농사를 잘 지을 수 있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잡초가 없는 논밭에서 농사를 짓다보니 농부들은 별 할 일이 없었고 자연히 게을러지게 된 것이었다. 이를 지켜본 조물주는 인간들이 이렇게 게을러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고민하다가 잡초의 씨를 뿌리게 되었다고 한다.

곡식이나 채소가 제대로 자랄 때를 맞추어 20일에 한번 꼴로 잡초의 씨를 뿌렸으니 농부들은 당황하여 급기야 김매기를 시작한 것이다. 곡식이나 채소의 씨앗을 뿌리고는 퇴비하고 잡초를 제거하는 일이 가장 큰 일이 되었다.

문제는 이 잡초의 생명력이었다. 농부가 가꾸고자 하는 곡식과 채소는 잡초와 경쟁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농부의 보호를 받지 않으면 곡식과 채소는 살아남을 수가 없었다. 얼마나 잡초의 생존력이 강했으면 “잡초는 머리에 그 씨앗을 이고 나온다”는 말이 나왔을까. 잡초는 태어날 때 그 씨앗을 머리에 달고 나와서는 곧장 대를 이을 씨를 뿌려 종의 번식에 나선다고 할 정도라는 것이다. 그 강인한 생명력, 그 대단한 종족 보존력은 가히 자연계의 어느 생명체가 이를 따를 수 있겠는가. 분명 이 강인한 생명력은 본받을 만한 가치도 있지만 농부로서는 이 잡초의 강한 생존력이 곱게 보일 리가 없지 않은가.

우리 인간사회에서의 잡초도 문제다. 선량하게 태어나고 올바르게 자라서 인간의 양식이 되는 곡식과 채소에 비유될 사람도 있지만 사회의 독버섯이나 무용지물인 잡초가 되어 해악과 폐해를 끼치는 사람 또한 얼마나 많은가. ‘악화(惡貨)가 양화(良貨)를 구축한다’는 그레샴의 법칙처럼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서나 부정적인 인간군상들이 선량한 사람들보다 더 설치고 요란한 모습을 보여온 게 사실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원하는 바는 평화와 행복, 진실과 선량함, 사랑과 아름다움인데도 우리 사회는 소수의 잡초와 같은 사람들에 의해 전쟁과 불행, 거짓과 악. 미움과 추함이 끊이질 않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번식력과 생존력이 강해도 잡초는 잡초다. 잡초가 곡식이나 채소의 자리를 빼앗을 수 없듯이 인간사회도 말없는 다수의 선량함이 요란한 소수의 사악함을 제압해야 한다. 농부가 잡초를 제거하기 위해 땀흘리듯이 우리사회도 사악한 부정적 인간군상들의 악업을 제거하기 위한 근원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일찍이 부처님께서도 열반경에서 ‘악업(惡業)의 씨앗을 만들지 않는다면 미래에 받아야 할 악과(惡果)는 없을 것’이라 하셨으니 악업의 씨앗인 악인을 제거하려는 노력이 바로 수행의 길이 아닐까.

세상일 차마 말할 수 없지만

世事不堪說(세사불감설) 세상일 차마 말할 수 없지만

心悲安可窮(심비안가궁) 마음의 슬픔 어찌 다할 수 있으리오.

春風雙涕淚(춘풍쌍체루) 봄바람에 두줄기 눈물 흘리며

獨臥萬山中(독와만산중) 홀로 산속 깊이 누워 있다네.

누구에게나 삶의 애한은 있을 것이다. 비록 남에게 말은 못하지만 가슴속에 속 앓이 하는 사정을 안고 비애의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이 수없이 많을 것이다. 살아 있다는 존재 자체가 비원을 갖는 것이기 때문에 사람은 원이 이루어 지지 않을 때는 모두가 슬퍼지는 것 아닐까? “봄바람에 두 줄기 눈물 흘리며 홀로 산속 깊이 누워 있다”는 말이 읽는 사람의 마음마저 애틋하게 하고 있다.

이 시는 조선조 효종 때의 문신 김육(金堉:1580~1658)이 지은 것이다. 일종의 세제 개혁이었던 대동법 실시를 강력히 주장하고 화폐 유통을 주장하며, 북벌(北伐)에 골몰하고 있는 효종에게 북벌을 단념하고 민생부터 챙겨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던 강직한 성품을 가졌던 인물로 알려 있다. 관직을 두루 거치면서 우의정과 영의정까지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