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위진인

당대(唐代)에 임제종의 개조인 임제의현(? ~ 867)스님께서

하루는 대중을 위해 설법을 하셨습니다.

“여러분의 몸뚱이 속에 한 무위진인(無爲眞人)이 있다.

그는 항상 그대들의 얼굴을 통해 출입하고 있으니 아직 깨닫지 못한 자는 살펴보아라.”

그때 어떤 스님이 나와서 물었습니다.

“무엇이 무위진인입니까?”

임제스님이 대뜸 그 스님의 멱살을 잡고서 다그쳤습니다.

“말해봐라, 말해봐!”

스님이 대답을 못하고 머뭇거리자, 확 밀쳐버리고 말씀하시기를

“무위진인이 이 무슨 마른 똥막대기냐” 하고 곧 방장실로 되돌아가 버렸습니다.

지난 해 12월 13일은 조계종의 큰 어른이신 백양사 방장이셨던 서옹스님께서 열반에 드셨던 날입니다. 평소 큰스님께서는 ‘자각한 사람의 참모습’을 무위진인으로 정의하며 참사랑 운동을 펼쳤던 분이십니다. 즉 무위진인이란 ‘초발심에서 성불에 이르는 수행단계(42위, 52위, 57위)에 떨어지지 않고 성범(聖凡), 미오(迷悟), 상하(上下), 귀천(貴賤) 등을 초탈한 참된 사람을 말하는 것으로, 영원한 시간과 무한한 공간 속에서 주체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 모두는 개별성을 초월한 무위진인임을 확인할 때, 우주의 주인공으로서 우리의 참다운 면목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인해스님 글. 월간반야 2004년 11월 제48호

인생의 3박자

노래를 잘 부르는 사람은 음성도 고와야 하지만 박자를 잘 맞출 줄 알아야 하다. 박자와 음정이 틀리면 노래자랑에서도 띵 하고 불합격의 차임벨이 울려 버린다. 사실은 노래에 뿐만 아니라 사람이 하는 모든 일에는 다 박자가 있다. 이 박자가 잘 맞춰질 때 일이 잘되며 성공이 기약되는 것이다. 따라서 일이 잘 된 것을 박자가 잘 맞았다고 말하기도 한다. 옛날부터 갖출 것이 다 갖춰진 만족한 상태를 자연환경을 예로 들어 물 좋고, 정자 좋고, 반석 좋다 하였다.

우리의 삶을 영위해 가는 인생의 박자는 어떤 것이 있는가? 보통 만나는 인연을 두고 누구에게나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세 가지 인연을 든다. 그것은 천(天) · 지(地) · 인(人) 삼재(三才)의 인연을 두고 때를 잘 만나야 하고 지역을 잘 만나야 하고 또 사람을 잘 만나야 한다고 말한다. 우선 때와 장소는 이 세상의 모든 상황이 설정되는 근본이다. 언제 어디서라는 것은 역사를 기술하는 시작의 배경이 되고 이 배경에 의해 누구라는 주인공이 등장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때와 장소가 사람에게 좋은 기회로 작용하고 알맞은 곳이 되어 주기도 하지만 때로는 그 반대가 되기도 한다. 다시 말해 똑 같은 시간과 장소가 사람 따라 그 사람의 업의 작용이 다르게 일어난다는 것이다. 마치 꽃이 계절 따라 다르게 피는 것처럼 시절 인연에 따라 사람이 하는 일이 때에 따라 잘되는 수도 못되는 수도 있다. 그래서 옛날에는 때를 잘 만나는 것은 천운(天運)을 잘 만난 것이라고 하였다. 지금도 역학을 연구하는 분들은 사주(四柱)를 풀이하여 사람의 평생 운세를 말하기도 하는데 그 사주라는 것이 연· 월· 일· 시의 시간을 말하는 것이다.

땅과의 인연은 환경과 사람의 관계로 사람의 정서성장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가령 바닷가에서 성장한 어린이와 깊은 산골에서 성장한 어린이는 그 정서 발육의 상태가 다르다. 물론 도시에서 성장한 어린이와 옛날의 농촌에서 성장한 어린이도 마찬가지다. 지구상에서도 아프리카 열대에 사는 사람과 북극의 에스키모의 생활이 완연히 다르다.

사람을 만나는 인연은 사회공동생활에 있어서 직간접적인 영향을 주고받는 상호교류의 장으로 여기에는 실제생활에 있어 손익의 계산서가 따라 붙는 가장 현실적인 문제가 된다. 사람 잘 만나고 시절 잘 만나고 지역을 잘 만나는 것은 세간법의 3박자가 잘 맞는 일이다.

이러한 박자가 잘 맞는다는 것은 결국 내 인생에 선택이 잘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선택이 잘된 것을 운이 좋다고 말한다. 실로 인생은 수많은 선택의 문제를 안고 산다. 갈림길에서 어디로 갈까 길을 정하는 것처럼 스스로 선택을 하기도 하고 또 어쩔 수 없이 선택을 강요받기도 한다. 물론 여기에는 개인의 능력이 부족하여 최상의 선택을 하지 못하고 차선의 선택을 하는 수도 있다. 직업을 선택하고 결혼을 할 때 배우자를 선택하는 이러한 경우이다.

인생의 3박자는 이것 말고도 또 다른 3박자가 있다. 이것은 내 인생의 전체 몫이 언제나 3등분으로 나눠진다는 이야기이다. 바꿔 말하면 사람은 누구나 자기 운수의 몫을 셋으로 나누어 가지고 있다. 먼저 후천적으로 노력하는 개개인 자체의 능력이 있다. 이는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지극히 단순하고 평범한 논리이다. 여기에는 불가항력이 없고 ‘나는 할 수 있다.’는 매우 희망적인 구호를 높이 외칠 수 있다. 능력을 발휘하여 스스로의 운을 개척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다분히 후천적이고 자신의 문제를 자기 안에서만 관찰하는 경우이다. 그러나 이것은 어쩌면 단세포적인 개인의 의지요 소신일 뿐 인생은 불가항력적인 요소가 생활의 배후에 항상 숨어 있는 것이다.

내 자신도 모르게 몸에 깊은 병이 잠복해 있다면 병에 감염된 것이 결코 내 의지는 아니었던 것이다. 따라서 사람에게는 선천적인 업의 습관 따위가 배여 있어 전생의 인연에 따른 과보가 있다는 또 하나의 등분이 있다. 이것은 모두 과거에 내가 어떻게 하였나? 하는 현실 이전의 업인(業因)이 내 현실에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말한다. 지금 현재의 상황이 과거에 지어 놓은 원인에 의한 결과이며, 또 전생에 잘못된 업인이 있었다면 금생의 결과에서 손해를 감수 하게끔 되어 있다는 것이다. 오늘의 일이 어제의 원인에 의한 결과로 오게 된 것처럼 금생의 운이 전생의 원인에 의해서 오게 된다는 것으로 이것은 매우 분명한 인과의 법칙에 의한 것이다.

또 하나의 등분은 무엇인가 하면 나의 문제가 남과의 동분(同分)속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과일 나무가 땅과 물과 공기, 햇빛 따위가 없다면 나무 자체가 살 수 없어 열매가 열수 없듯이 남과의 동분인연을 떠나서 내 혼자만의 성공은 이 세상에서 있을 수 없다. 마치 선거에 출마한 정치인이 유권자의 지지 없이는 당선이 있을 수 없는 것과 같다. 때문에 어느 누구도 남의 도움 없이는 성공하지 못한다. 부부사이의 관계처럼 내조와 외조가 있어야 내 인생의 공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인생은 분명 3분의 일짜리가 셋이 모여 하나가 되는 3박자의 템포 속에 진행되는 것이다.

일류의 야구 선수가 3할 때의 타율을 유지하는 것처럼 어쩌면 개인이 갖고 있는 능력은 3할의 작용 밖에 못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바둑을 둘 때 흑백이 서로 이기는 경우를 두고 운칠기삼(運七技三)으로 이긴다고 하는 말이 있다. 운이 7할을 따라주고 재주는 3할 밖에 작용을 못했다는 것이다. 아무리 재주가 많아도 운 앞에서는 겸손해 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인공을 위성을 쏘아 올리면서 무사히 발사되어 궤도 진입을 발하는 뜻에서 고사를 지낸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미신이라기보다는 운에 대한 겸손이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지안큰스님 글. 월간반야 2009년 7월 제104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