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 밑 제비집에 사슴이 알을 품고

해저연소록포란 海底燕巢鹿抱卵 바다 밑 제비집에 사슴이 알을 품고

화중주실어전다 火中蛛室魚煎茶 불속의 거미집에 고기가 차를 끓이네.

차가소식수능식 此家消息誰能識 이 집안의 소식을 누가 알랴

백운서비월동주 白雲西飛月東走 흰 구름은 서쪽으로 나는데 달은 동쪽으로 달린다.

이 시는 조계종 통합종단 출범 후 초대 종정을 역임했던(1962~1966) 효봉(曉峰1888~1966)스님의 오도송(悟道頌)으로 알려진 시이다. 효봉어록에는 금강산 법기암 토굴송이란 제목으로 수록되어 있고 신미(辛未1931년) 추일(秋日)이라 지은 때를 밝혀 놓고 있다.

선법문(禪法門)을 격외담(格外談)이라 한다. 격식을 벗어난 이야기라는 뜻이다. 이 시를 보면 바다 밑에 제비집이 있다 하였고 사슴이 거기서 알을 품고 있다 하였다. 포유동물이 어찌 알을 품는가? 불 속의 거미집에서 고기가 차를 끓인다는 것은 또 무엇인가? 이런 표현은 일차방정식의 논리로는 이해할 수 없다. ‘돌장승이 애기를 낳는다.’ 든가 ‘나무 닭이 밤에 운다.’는 말 등이 모두 격외소식을 알리는 무분별지에서 나오는 말이다.

일제시대 평양 복심법원의 판사로 재임하다 오판의 판결에 회의를 느끼고 법관을 사임하고 엿장수가 되어 전국 방방곡곡을 돌다 금강산 신계사로 가 스님이 된 후 근세에 보기 드문 정진력을 발휘 오도를 체험한 스님은 종전이 되었을 때 이승만 대통령을 감화시킨 에피소드도 남기고 있다. 대통령 생신 때 경무대에 초빙되어간 스님에게 이승만 대통령이 “스님 생일은 언제 이십니까?” 하고 묻고 사문은 “태어나도 태어난 게 없고 죽어도 죽은 게 없기 때문에(生不生死不死) 생일을 따질게 없습니다.”라고 말해 이 말에 감화를 받은 이대통령이 경무대 정문까지 배웅을 해주며 “우리나라에 스님 같은 도인이 많이 나오게 해 주십시오.” 라고 인사를 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소중한 존재들

10년 가까이 주말이면 오르내리는 텃밭이 있다. 원래 생긴 모습 그대로 두고 나무나 풀만 뽑아버리고는 이것저것 가져다 심고 가꾼다. 어디다가 무엇을 심겠다는 계획도 없고, 장차 어떻게 자라서 어떤 모습을 할 것이라는 그림도 그려보지 않았다. 4백여 평의 풀밭에 저절로 난 뽕나무도 있었고, 칡과 찔레덩굴에다 산딸기도 있었다. 가시덤불에다 그야말로 쑥밭이었다. 이 가운데 나무나 잡초가 좀 적은 곳을 가려서 이곳저곳 밭을 일구기 시작했다. 땅을 파고 밭을 일구는 것은 주로 내 몫이고, 씨앗을 넣는 것은 노모께서 알아서 하시고, 김을 매는 것은 아내의 몫이다. 10년을 풀과 싸웠건만 번번이 지고 말았다.

지난해부터는 작심을 하고 풀과의 전쟁에 돌입했다. 빈터엔 온통 가시나무와 황금편백 차나무 등 나무를 심고 그 아래엔 풀이 자랄 수 없도록 부직포를 덮었다. 드나드는 통로를 제외하고는 온통 검정 부직포를 깔아서 풀의 기세를 꺾어놓았건만 글쎄 올해는 풀과 우리 가족 중 누가 이길런지.

경사진 밭의 아래쪽엔 흙과 거름기가 흘러내려 자연히 땅이 기름져서 채소나 콩, 토란, 옥수수 등 작물이 비교적 잘 자랐다. 내친김에 아래쪽이라도 평평하게 땅을 고르게 해 보자는데 의견을 모으고 밭 가운데를 가로질러 축대를 쌓기로 하였다. 중장비를 동원하고 석축 쌓는 전문가를 초빙하고 도와줄 인부를 구해 휴일 하루를 몽땅 축대 쌓는 일을 했다. 전에도 석축 쌓는 것을 보기는 했지만 그저 건성으로 보았는데, 이날은 주인이 되어 유심히 보기도 했지만 많은 것을 느꼈다.

돌이 놓여질 자리를 닦는 일이며, 한 트럭 분량의 돌 가운데서 적합한 돌을 고르는 일이며, 돌을 와이어(쇠줄)로 매어 장비로 들어올리기 위해 묶는 일이나, 장비로 운반해 와서 적소에 돌을 놓는 모습이며, 큰돌과 작은 돌이 조화를 이룸과, 석축전문가의 손끝 하나 하나의 움직임에 따라 중장비도 돕는 일꾼도 한치 오차 없이 움직이는 모습을 보면서 신기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 나의 관심을 끈 것은 온 밭에 함부로 파헤쳐져 나뒹굴고 있는 돌과 흙이었다. 축대를 쌓아가면서 쓰여지는 돌들은 반듯반듯하고 면이 고르고 각이 지고 예쁜 돌만은 아니었다. 정말 모양도 제 맘대로 생기고 크기도 조그만 돌이 적재적소에 들어가서 큰돌을 받치기도 하고, 돌과 돌 사이를 연결시켜주면서 제 역할을 확실히 해 주는 것을 보았다. 하잘 것 없는 돌 조각이, 하찮은 흙 한줌이 저 석축을 단단히 지탱하여 준다고 생각하니 그들의 존재 가치가 새삼스러웠다.

어릴 적 어른들의 어깨 너머로 쉬 들을 수 있었던 이야기가 되살아났다. 집 앞의 논은 장남을 주고, 뒤뜰의 밭은 둘째에게 주고, 소는 키워 막내 대학 등록금 마련하고, 돼지는 영감 회갑 잔치 때 쓰고, 닭은 사위가 오면 잡고 … 하면서 제각각 몫을 정해 두는 것이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물은 다 제 나름대로 쓰임새가 있기 마련이다. 조물주는 이름 없는 풀이나 나무를 만들지 않았고, 쓸모 없는 물건을 만들지 않았다. 이 세상 삼라만상 두두물물이 다 제 나름의 존재가치를 지니고 있고 소중할 뿐이다.

온 산과 들이 부처님 오신날을 맞아 화려하게 장엄을 하고 있다. 어디 아름답지 않은 꽃이 있던가. 어여쁘지 않은 새싹이 있던가. 사랑스럽지 않은 새잎이 있던가. 귀엽지 않은 어린애가 있던가. 삼독과 오욕에 물들지 않은 순수함으로 돌아가 사람을 보고 세상을 보자.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돌멩이 하나, 모래 알갱이 하나, 흙 한 줌, 흙 속의 벌레 한 마리… 어느 한 가지 소중히 여기지 않을 수 있으랴.

香岩 김형춘 (반야거사회 회장·창원전문대 교수) 글. 월간반야 2009년 5월 제102호

밀교의 성립배경

밀교는 불교사상사에 있어서 인도대륙의 특수한 문화적 속성과 함께 베다와 힌두교와 같은 종교사상과의 지속적인 대립과 교섭 속에서 특징적인 사상과 수행체계로 발전된 대승불교사상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밀교의 성립배경에는 사상적, 문화적, 정치적으로 매우 복합적인 요소가 작용하였으며, 그 소재적 연원은 베다시대에까지 거슬러 올라갈 정도로 역사가 깊다. 따라서 밀교의 성립배경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그 소재적 연원과 함께 불교가 초기불교와 부파불교, 그리고 대승불교시대로 이어지면서 당시 인도대륙의 문화적, 정치적 영향과 함께 대승불교라는 사상적 토양 속에서 어떠한 영향을 주고받으며 형성되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밀교사상의 소재적 연원은 이미 BCE 1500년~1000년경에 이민족인 아리안족의 문명과 인더스문명을 기반으로 하는 토착문화의 결합으로 형성된 베다성전에서 찾아볼 수 있다. 리그베다에는 마장으로부터 보호받기 위한 호마법과 신들에 대한 공양법 등 밀교의례의 원형이 될 수 있는 제사의식의 형태가 담겨져 있고, 아타르바베다에서도 주문과 제사의식 등을 찾아볼 수 있다. 또한 야주르베다는 ‘옴’이나 ‘스와하’ 등의 종자관(글자를 관하는 법)적인 요소를 포함하고 있으며, 이것이 이후 밀교의 자륜관이나 종자관 등의 관법으로 발전되었다. 이러한 밀교적 소재가 대승불교경전이라는 텍스트 속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 것은 AD 3~4세기 무렵이며, 대승불교경전상에 흡수된 식재법, 저주법, 개운법 등은 훗날 밀교성립의 소재가 되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이러한 밀교적 요소가 불교교단 내에서 승인되었던 것은 아니다. 초기불교교단에서 석존은 이러한 베다의 주술적, 의례적 요소를 ‘바일제’라 하여 엄격히 금하였다. 그것은 불교가 나아가는 궁극적 지향점이 주술이나 의례를 통한 성취나 현세구복을 바라는 의존적이고 타율적인 것이 아니라 깨달음을 통한 열반에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주술이나 의례 등이 널리 유행하던 당시 인도의 사상적 토양에서 자라온 자들이 출가하여 계속적으로 교단을 구성하게 되고, 재가사회와의 필연적인 관계 속에서 그러한 기복적 요소들의 완전한 무시는 불가능하였다. 따라서 근본적으로는 세속의 주술비법을 금하였지만 병의 치료나 해독 등과 같은 선의의 주술적 요소들에 대해서는 선별적으로 승인을 하게 되었다. 이후 외도의 주술에 상응하는 수단의 한가지로서 ‘삼귀의’나 <앙굴리말라경> 또는 <자타카>에 나타난 ‘진실어’ 등이 주술적 요소로서 이용되기도 하고, 석존입멸 후 남방불전의 율부 가운데서 호신용 주문으로 형성된 빠릿따(Paritta) 등 불교 특유의 진언을 창안해냄으로써 밀교성립의 기반이 조성되었다. 그 밖에 붓다나 아라한이 깨달음을 통해 얻는 천안명, 숙명명, 누진명의 삼명(三明)과 육신통을 큰 공덕을 갖추어 어두움의 장애를 물리치는 하는 주(呪)에 가깝게 회통시키기도 하였다.

이상과 같은 역사적 상황이 밀교성립의 외형적 조건이 되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결코 근본적인 동기나 배경은 아니었다. 밀교가 성립하게 된 보다 근원적인 동기는 불교자체의 교학적인 발전과 함께 당시 인도대륙의 정치 사회적인 정황에서 찾아보아야 한다. 당시 카스트제도와 브라만교의 사상에 반기를 들고 일어선 불교교단은 대도시의 신흥자본가들의 지지를 받으면서 부파불교시대를 거치면서 교학적으로 더욱 발전해 나갔다. 이에 반해 불교의 교세에 밀려난 브라만교는 주술과 의례를 중심으로 농촌사회에서 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한편 이후 민중들과 괴리된 부파불교의 교학 중심적이고 출가 중심적인 사상에 대한 반성으로 서기 원년을 전후하여 대승불교운동이 일어나게 된다.

대승불교시기에는 반야경계통의 공사상을 주축으로 하는 용수의 중관사상이 나타나게 되는데 <중론>에는 근본불교의 연기설을 중도의 논리에 의해 밝히면서 현상과 공성이 불가분의 관계에 있음을 보여주고 있으며, <이취경>에서 번뇌마저 지혜로서 중생을 위한 욕망으로 승화시킨 반야사상적 보살도의 모습은 후에 밀교경전성립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이후 무착과 세친에 의해 등장한 유식사상은 8식설과 3성설과 같은 심식설을 중심으로 수행체계를 발달시켰는데 특히 망식을 정화하고 지혜를 증득한다는 유식의 전식득지(轉識得智)개념은 밀교의 <금강정경> 등에 밀교적 관법으로 수용, 발전되었다. 또한 범부에게 여래의 체성이 갖추어져 있다고 설한 여래장사상은 후기밀교시대에 이르러 보살이 생신(生身)을 부정하고 살아있는 육신보살로서 현실세계에서 중생을 구호하는 교리적 근거가 되어 새롭게 전개되었다.

이렇게 대승불교경전 가운데서 밀교는 대승의 근본교의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점점 본질화 하게 된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대승불교가 여러 가지 종교적 입장에 대하여 두드러지게 관대하다고 하는 사상적 경향과 함께 각각의 대승경전이 정치, 사회적인 배경을 반영한 것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즉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일찍이 불교에 의해 타격을 받았던 브라만교가 민간신앙과 혼합되어 일신교적 신앙과 함께 비쉬누와 쉬바같은 범신론적 경향의 병존이 일어나고, 인도의 사회구조와 밀접하게 결부되어 ‘힌두이즘’으로 부흥하게 된 것이다. 이어 AD 3~4세기경, 마우리아 왕조가 멸망하고 들어선 굽타왕조는 불교를 탄압하지는 않았지만 힌두교를 물질적으로 지원함으로써 힌두교의 사원과 세력이 크게 늘어나게 되었고, 이러한 사회적 경향은 불교를 위축되게 하여, AD 7세기에 이르러 대승불교가 급격하게 밀교화하는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이에 따라 초기밀교시대라 할 수 있는 AD 3,4세기~7세기 중엽까지 대승경전 가운데 보이던 진언이나 다라니 등 의례적인 영역은 중기밀교시대인 AD 7세기 중엽에 이르러서는 <대일경>과 <금강정경> 등과 같은 체계적인 밀교경전의 형태로서 유행하게 되면서 세간적 이익과 성불을 위한 수행을 동시에 강조하게 되며, 결국 AD 8세기경에 이르러서는 대락사상과 생기차제 및 구경차제를 강조하는 딴뜨라 중심의 밀교경전이 유행하게 되는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밀교의 소재적 연원은 이미 주술과 의례라는 모습으로 베다문헌상에 존재하고 있었다. 또한 인도의 특수한 문화 속에 녹아있던 밀교적 소재들은, 선별적으로 주술을 허용했던 초기불교교단을 거쳐 부파불교의 경직성을 극복하고자 등장했던 대승불교시대의 초기경전 상에서도 나타나게 되었다. 그리고 중관과 유식이라는 대승사상과 만남으로서 사상적, 실천적으로 체계화된 것이다. 이런 사상적 체계화는 힌두이즘의 팽창이라는 정치사회적인 환경 속에서 불교가 인도의 종교와 문화와의 대립과 소통, 교섭해나가면서 민중들의 욕구를 수용, 발전해나간 필연적이고도 복합적인 결과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밀교의 성립배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불교가 왜 밀교화의 길을 갈 수 밖에 없었는가하는 당위적 의문에 대한 해답을 떠올려볼 필요가 있으며 그것은 당시 인도의 문화적 연원과 특성, 그리고 정치사회적인 상황이라는 특수성과 함께 생각해보아야 하는 문제이다. 왜냐하면 밀교는 갑자기 생겨난 어떤 이질적인 사상이 아니라 불교가 인도라는 문화 속에서 꽃피운 불교의 또 다른 모습이기 때문이다.

신경스님, 반야사, 월간반야 2010년 7월 제116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