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도 깃발도 아니다 (風幡問答)

육조 혜능스님은 오조 홍인스님으로부터 법과 가사를 받고 17년간 재속(在俗)의 은거생활을 한 후, 의봉(儀鳳) 원년(676) 남해의 제지사(制止寺)에 이러러 인종(印宗)법사(627~713)가 『열반경』]을 강의하는 회상(會上)을 만났습니다.

그 때 인종법사가 대중에게 물었습니다. “그대들은 모두 바람이 찰간으로 부는 것을 보라. 꼭대기의 깃발이 움직이는가?” 대중들이 말했습니다. “움직이고 있습니다.” 이때 어떤 사람이 말했습니다. “바람이 움직이는 것으로 봅니다.” 또 어떤 사람은 “깃발이 움직이는 것으로 봅니다.” 혹은 “이것은 깃발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견해(見解)가 움직이는 것입니다”라고 하며 논쟁이 어렵게 되어 진정하지 않게 되자 혜능스님이 좌석에서 일어나 법사에게 대답했습니다. “본래 대중들의 망상심이 움직이고(動) 움직이지 않는 것(不動)일 뿐, 깃발이 움직이는 것이 아닙니다. 법은 본래 움직임과 움직이지 않는 것과는 관계없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인종법사는 놀라서(驚愕) 멍하게(茫然)되어 무슨 말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이어 법사가 물었습니다. 거사(혜능스님)는 어디에서 왔소? 혜능스님이 대답했습니다. ꡒ본래 온 것도 아니요, 지금 또한 가는 것도 아닙니다.ꡓ 법사는 법상(高座)에서 내려와 혜능을 맞아서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우리들이 잘 알고 있는 위의 이야기는 『역대법보기』의「혜능장」에 있는 내용을 중심으로 좀 더 명확히 알리고자 첨삭 없이 적어보았습니다. 여기서 논쟁을 벌이고 있는 대중들을 향해 혜능스님이 내어 보인 것은 바람과 깃발이라는 객관적인 대상인 사물에 집착하는 대중들의 견해를 타파하고 각자의 주관적인 입장으로 되돌리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한걸음 더 나아간다면 마음이라는 본체와 깃발과 바람의 움직임이라는 현상(작용)을 다 같이 수용하는 체용일여(體用一如)의 이치를 볼 수 있습니다.

송대(宋代)의 무문혜개(1183~1260)스님은 그가 편집한『무문관』에서 ꡐ바람이 깃발을 움직이게 한 것도 아니고, 깃발이 흔들리는 것도 아니며, 또한 마음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다ꡑ라고 했습니다. 즉 주관적인 마음과 객관적인 바람과 깃발이 모두 차별적인 것으로 보고 자기와 일체 만법이 하나가 되는 경지(萬法一如)가 되는 무심의 경지를 설하셨던 것입니다.

인해스님 (동국대 강사) 글. 월간반야 2005년 9월 제 58호

바람끝바위

시락리 바닷가, 바람끝바위의 바람 끝자리에 핀

갯메꽃 발그레한 웃음을 엿보며

다닥다닥 붙은 따개비 등에 옹그리고 앉아

바위 끄트머리

아슬아슬한 틈새를 비집고 가느다란 길을 내는

갯고동을 뒤따라가니

오래 전 잊어버렸던 길,

어딘가로 마구 휩쓸려가던 마음길이 보였습니다.

바람의 말, 별의 말들이, 모시조개의

숨소리와 이웃하여

도란도란 주고받는 밀어密語가 들리고

산하대지를 적멸도량으로 삼았던,

옛 어른들의 말씀도 어슴푸레 들렸습니다.

산치대탑에 스며들던 달빛이 내 맘의 문을 열었듯

저 바다 윤슬 또한

그대에게로 가는 길을 엽니다.

마삭줄도 칡넝쿨도 앞서거니 뒤서거니 다투어

길을 내고

말미잘 다시마도

초록으로 넘실대는 향기로운 길을 냅니다.

文殊華 하영 (시인, 반야불교학당) 글. 월간반야 2009년 4월 제101호

바다 밑에 진흙 소가 달을 물고 달아나고

海底泥牛含月珠 (해저니우함월주) 바다 밑에 진흙 소가 달을 물고 달아나고

巖前石虎抱兒眠(암전석호포아면) 바위 앞의 돌 호랑이 새끼를 안고 졸고 있네.

鐵蛇鑽入金剛眼(철사찬입금강안) 쇠로된 뱀이 금강의 눈을 뚫고 들어가는데

崑崙騎象鷺鷥牽(곤륜기상로사견) 코끼리를 탄 곤륜을 해오라기가 끌고 가는구나.

격외도리를 쓴 선시의 표본이 되는 [선요(禪要)]에 나오는 고봉원묘(高峰原妙: 1238~1295) 선사의 시이다. 진흙소가 등장하고 돌호랑이가 나오며, 쇠뱀이 나온다. 진흙이 소가 되며 돌이 호랑이가 되고 쇠가 뱀이 되어 달아나고 금강의 눈을 뚫고 들어간다는 말들은 상식을 초월한 이야기다.

그러나 현상을 인식하는 고정 관념적 사고로는 선의 세계에 이르지 못한다. 모든 사물의 이름과 모양을 초월할 때 비로소 의식이 자유로워져 관념의 제한을 받지 않는다. 말하자면 불속에서도 얼음이 어는 것이다. 따라서 의식의 해방에서 설해지는 말들은 고차원의 격외 소식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무정無情이 유정(有情이) 되고 유정이 무정이 되어 유무가 둘이 아닌 불이(不二)의 경계에 이르러야만 선(禪)의 마음이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