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한 마리 울지 않는 곳

일조불명처 一鳥不鳴處 새 한 마리 울지 않는 곳

이인상대한 二人相對閑 두 사람이 한가롭게 마주 앉았네

진관여법복 塵冠與法服 속세의 유자와 산중의 스님

막작양반관 莫作兩般看 승속을 구분하여 둘로 보지 마시게

이조를 대표하는 고승 서산스님은 평안도 묘향산에 오래 머물렀기 때문에 서산스님이라 부르게 되었다. 임진왜란 때 승병을 모아 구국의 선봉장에 서기도 했던 스님이 묘향산 성불암에 기거하고 있을 때 기이한 손님을 한 사람 맞이했다.

조선 중기 풍류객으로 이름 높았던 백호(白湖) 임제(林梯)가 느닷없이 찾아온 것이다. 차를 나누며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 알려져 있지 않지만, 그때의 상봉을 임제가 한 수의 시를 지어 남겨 놓았다. 그날 따라 산 속이 너무 적적하였는지 새 소리 마저 들리지 않았다고 묘사하였다.

유자의 차림을 한 백호와 승복을 입은 스님이 마주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데 신분이야 승속의 차이가 분명하지만, 마음은 대화 속에 어울러져 하나가 되었는지 둘로 보지 말라는 마지막 구가 묘한 여운을 남긴다.

이 시를 지은 임제는 풍운아의 기질을 타고난 사람이었다. 자유분방한 성격에 당파싸움에 편당을 지어 공명을 탈취하려는 속물들의 비열한 몰골이 비위에 거슬려 벼슬에 환멸을 느끼고 유랑생활을 시작하였다. 한때 성운(成運)을 사사하여 글공부를 하여 생원, 진사 알성시에 급제하여 홍양현감, 서도병마사, 북도병마사, 예조정랑을 거쳐 홍문관지제교를 지내기도 하였다. 학업에 매진할 때 중용을 8백번 읽었다는 일화도 전해지는데, 불우하게도 유랑으로 끝난 그의 생애가 39세의 일기로 마감을 하였다. 황진이 무덤가에서 지었다는 유명한 시조도 남겼다.

“방초우거진 곳에 자느냐 누웠느냐?

홍안은 어디 두고 백골만 묻혔느뇨?

잔 잡아 권할 이 없어 그를 슬퍼하노라.

인생무상을 노래한 이 시조가 많은 사람들의 입에 회자하는 명시로 남았지만, 이 시조가 그의 관운을 빼앗아버리기도 하였다.

그가 서도병마사로 임명되어 임지로 부임가던 도중 황진이 무덤을 찾아가 이 시조를 짓고 제사를 지냈다가 임지에 채 부임하기도 전에 파직을 당했던 것이다. 막중한 국사를 수임한 지체 높은 벼슬아치가 일개 기생의 무덤을 참배 제사를 지낸 것이 사대부의 체신을 크게 그르치게 했다고 여겨서일 것이다.

임종에 임해서 자식들에게 자신이 죽어도 곡을 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죽음을 슬퍼할 것이 없다고 한 말은 생사를 초탈한 도승(道僧)들의 경지를 닮아서 그랬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지안스님 해설. 월간반야 2003년 11월 (제36호)

삼년의 은둔 생활 병까지 들고 보니

三年竄逐病相仍(삼년찬축병상잉) 삼년의 은둔 생활 병까지 들고 보니

一室生涯轉似僧(일실생애전사승) 한 칸 집에 사는 신세 스님을 닮았네.

雪滿四山人不到(설만사산인부도) 눈 덮인 사방 산엔 찾아오는 사람 없고

海濤聲裏坐挑燈(해도성리좌도등) 눈보라 소리 속에 앉아 등불의 심지를 돋운다.

산간의 작은 오두막집에서 은둔생활을 하는 겨울밤의 풍경을 묘사해 놓은 시이다. 작자는 고려 말의 문신 최해(崔瀣: 1287~1340)로 신라 때의 최치원의 후손이다. 못난 늙은이라는 뜻의 졸옹(拙翁)이라는 호를 썼다. 성균관 출신으로 문과에 급제 벼슬에 나아가고, 34살 때는 연경에 가 원나라의 과거에도 급제하여 원나라의 벼슬을 잠시 하기도 하였다.

5개월 만에 귀국하여 성균관대사성이 되어 벼슬을 누렸으나 말년에는 사자갑사(獅子岬寺)의 밭을 빌려 농사를 지으며 학문에 몰두 저술에 힘썼다. 성품이 강직하여 권세에 아부를 못하고 때로는 남을 호되게 비판하여 파란을 겪으며 출세에 지장을 받기도 했다. 해도라는 말은 바다의 파도소리를 뜻하는 말이지만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산간에는 바다가 있을 턱이 없으므로 여기서는 눈보라 소리를 말한 것으로 봐야 하겠다.

갈마금강+( 磨金剛)

금강저의 일종. 3고저( 杵)를 십자형으로 교차시켜서 만든 밀교 법구(法具). 윤갈마(輪 磨), 십 자금강(十字金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