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히 생각해 보시오.

불교 경전에 오탁악세(五濁惡世)라는 말이 자주 나온다. 사바세계의 혼탁한 모습을 다섯 가지로 설명하는 말이다. 먼저 겁탁(劫濁)은 기근이나 질병 또는 전쟁 등이 일어나 재앙이 그치지 않는 시대의 어려움을 두고 하는 말이다. 천재지변이나 인재로 일어나는 각종 사고도 겁탁에 속한다. 견탁(見濁)은 말세가 되면 중생들이 그릇된 사견을 많이 가져 사상이 혼탁하여 세상을 흐리고 어지럽게 하는 것을 말하고, 번뇌탁(煩惱濁)은 번뇌에 의해 혼탁한 정신으로 몸과 마음이 올바른 자세를 유지하지 못하고 불안하게 흔들리는 것을 말한다. 중생탁(衆生濁)은 중생들이 도덕적으로 타락하여 인과를 믿지 않고 악업을 서슴없이 자행하면서 그 과보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다. 명탁(命濁)은 목숨의 위협이 많아져 천수를 누리지 못하고 비명횡사(非命橫死) 하는 것 등을 두고 한 말이다.

이 오탁이 만연한 세상을 예토(穢土)라 하고 이 예토에 부처님이 출현하여 예토를 정토(淨土)로 바꾸어 주는 것이 부처님의 일이라 하였다. 이리하여 부처님의 일, 불사(佛事)를 하면 부처님의 세계가 이루어져 사바세계의 괴로움이 극복된다고 한다. 물론 이것은 불교의 종교적 이상을 제시한 고답적인 이야기로 볼 수 있지만 인간이 사는 삶의 본질적 의미를 생각하게 하는 하나의 메시지가 들어 있는 말이다.

간혹 ‘우리는 세상이 왜 이리 힘들고 고통스럽고 불안하게 느껴지는가’하고 생각해 볼 때가 있다. 이때 경전에서 설한대로 오탁악세니까 그렇다고 치부해 두기는 너무 안타깝고 아쉬운 생각이 든다. 우리들 마음속에 간절하게 바라는 것은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평화롭고 자유로운 아름다운 세상이 되었으면 하는 것이다. 모든 재앙이 사라지고 생활의 위협이 없는 안락하고 즐거운 세상, 곧 극락의 세계가 이루어졌으면 하는 것임에도 인간의 행위에서 일어나는 업의 장애가 있어 스스로가 질곡의 구렁텅이로 빠져 들어가는 모순을 면치 못하고 있다. 이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 하고 살펴 볼 때 불가항력적인 외부의 조건 때문이 아니라 인간 상호의 마음 사이에 문제가 걸려 있음을 알게 된다. 누군가의 마음에서 일어난 한 생각이 수많은 사람들을 괴롭히고 있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상반된 주장이 서로 굽히지 않고 대립하여 힘겨루기를 하는 통에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지는 꼴이 되어 제 3자가 어떤 절망을 톡톡히 맛보게 되는 경우도 있다.

사람의 처신이 자기 인격을 위배하고 일어나서는 안 되는 것임에도 내 행동이 내 인격을 위배하고 일어나 주위 사람들의 원성을 사는 수도 비일비재하다. 이러한 모순과 부조리, 이것들은 모두 자기 인격의 본체인 마음에 이상이 생겨서이다. 자기의 참 마음을 모르는 미혹이 양심부재현상을 낳고 깨닫지 못한 어리석은 행동이 무면허 운전사의 난폭운전처럼 되어버리기 때문에 남을 해치는 위협이 그치지 않는 것이다.

사람의 인격에는 스스로의 양심이 부여하는 도덕적 자격증이 있어야 한다. 이 자격증이 갖춰지지 않을 때 그 사람은 무면허 운전자가 되어거나 음주 운전자가 되어버린다. 가장 위험한 사람이 되어 불안을 야기하는 장본인이 될 때 내 존재의 가치는 빙점이하로 내려가 마이너스 인생이 되고 마는 것이다. 내가 남에게 해로운 존재가 된다는 것 그것보다 더 큰 비극은 이 세상에 없다.

천하를 주유하면서 유세를 다니던 공자가 구곡주(九曲珠)라는 구슬을 가지고 있었다. 구슬 속에 아홉 구비의 구멍이 뚫어진 구슬이라 하여 구곡주라 불렀다. 공자는 항상 이 구슬에 어떻게 하면 실을 꿰어 관통하게 할 수 있을까 하고 고심하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아홉 구비의 구멍으로 실을 꿴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어느 날 뽕밭에서 뽕잎을 따고 있는 여인을 만나게 되었다. 공자는 혹시 이 여인이 구슬에 실을 꿰게 할 수 있는 아이디어라도 가지고 있을까 하여 물어 보았다.

“이 구슬에 아홉 구비의 구멍이 있는데 어떻게 하면 실을 꿸 수 있을까요?”

그러자 그 여인은 이렇게 말을 하였다. “조용히 생각해 보시오.”

어떤 비법을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대성인 공자에게 필부인 뽕따는 여인이 조용히 생각해 보라고 충고를 하는 것이었다. 그 말에 어떤 충격을 받은 공자는 심사숙고하다가 마침 개미 한 마리를 발견했다. 그때 공자는 “옳다!”하고 탄성을 지르며 구슬구멍 한쪽에 꿀을 넣어 두고 개미허리에 실을 매어 반대쪽 구멍으로 개미를 들어가게 했더니, 드디어 구곡주가 실이 꿰져 관통이 되었다는 것이다.

내 인생의 문제에 대한 답은 조용히 생각하면 나온다. 내 마음속 진심에게 물어보면 언제나 답을 준다. 왜냐하면 내 마음 안에는 이미 그 답이 본래부터 준비되어 있었고 또한 문제 이전에 답이 먼저 있었던 것이다. 다만 우리는 자기 질문을 거짓 마음의 망심에게 묻지 말고 항상 진심에게 물어야 한다.

지안스님 글. 월간반야 2005년 10월 제 58호.

제발 잘 되어 주십시오.

얼마 전 직전 반야거사회 회장을 하신 김형춘 교수님으로부터 금년에도 입춘방(立春榜)의 글씨를 써 달라는 부탁을 받고 새해 입춘방을 쓰게 되었다. 김 교수님은 해마다 입춘방을 만들어 지인들에게 보내 주어 인사를 나누며 한 해의 무사 안녕을 기원해 드리고 있다.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십 수 년을 입춘방을 보내온 걸로 생각된다. 올해는 구정 전에 입춘이 있어 음력으로 치면 엄밀히 기축년이 아직 다가지 않은 때에 입춘이 있다. 양력으로 2월 4일 아침 7시 48분이 입춘 시이다. 춘축(春祝)이라고도 하는 이 방은 원래 입춘 시 전에 붙이는 것으로 되었다. 대문이나 방문 앞 혹은 안방의 벽이나 천정에도 붙인다.

예로부터 써온 말은 대개 입춘대길 건양다경(立春大吉 建陽多慶)이나 소지황금출 개문만복래(掃地黃金出 開門萬福來) 등의 정형구가 있었다. “입춘이 되었으니 좋은 일 많으시고, 따스한 기운 일어나는 때에 경사스러운 일 많으시라.” “땅을 쓸면 황금이 나오고 문을 열면 만복이 들어와 지시라.”는 다분히 덕담으로 안부를 전하는 말들이다. 물론 입춘대길의 대구(對句)에 만사형통(萬事亨通) 소원성취(所願成就) 들의 말로 짝을 맞추기도 하였다.

남에게 덕담을 건네며 무사 안녕을 빌어주는 이 입춘방의 시세풍속은 또 하나의 미풍양속이라 할 것이다. 중국이나 일본 등 한문문화권의 나라에 두루 있어온 풍속이다.

절에 사는 나는 법회를 할 때 마다 법당에 들어가 기도를 하고 축원을 한다. 부처님께 우러러 고하면서 나 자신의 원을 빌기도 하고 사람들의 개인적 소원을 대신 빌어주기도 한다. 평소에 많은 시은을 지고 사는 나로서는 정말 진정한 마음으로 내가 부처님께 올리는 축원이 불보살의 가피를 얻어내어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축원을 한다.

그런데 축원을 해 주고 사는 내 입장에서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나타나는 경우가 더러 있다. 그것은 평소에 신심 있고 착하고 어진 사람들이 뜻하지 않는 불행한 일을 당했다는 소식을 들을 때이다. 어떤 때는 이러한 소식을 들으면 왠지 내 체면과 절의 체면이 서지 않는 것 같을 때가 있다. 불전에 기도도 열심히 하였고, 평소에 착하고 어질게 살았으며, 절에서 축원도 해 주었는데 왜 몸이 아파 일찍 돌아가거나 어렵고 고통스러운 일을 당하게 되느냐? 하는 그야말로 가슴이 막히는 듯한 난감한 기분이 되어 어찌할 바를 모르는 답답한 심사가 되는 때가 있다는 말이다. 물론 길흉화복이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고 행복과 불행이 동시에 존재한다는 말이 있지만 잘되어야 할 일이 잘되지 못하면 축원자로서의 체면은 말이 아닌 것이다. 물론 잘되었다는 이야기를 듣는 수도 있다. 누군가 축하할 좋은 일이 생겼다 하는 소식을 들으면 정말 기분이 좋고 신이 난다. 설사 나와 직접적인 관계가 없었던 경우에도 공연히 내 체면이 서는 것 같고 하여 어느 사이 나는 남이 잘되었다는 소식을 들으면 체면이 서는 사람이 되었다. 그래서 나는 가끔 이런 조크를 하고 싶다.

“ 제발 모두 잘 되어서 내 체면 좀 세워 주시오.”

사람 사는 것이 잘되도록 노력하는 데 큰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성공을 기약하며 사는 우리네 인생살이가 잘되는 방향으로 목표가 설정되어 있는 것이기에 확실히 내가 잘 될 때 나의 체면도 서는 것이다. 어떤 때는 내가 체면이 없으면 나의 권속도 체면이 없게 되므로 한 사람의 체면이 여러 사람의 체면을 살려주기도 하고 죽이기도 한다. 개인의 체면이 집단의 체면이 되기 때문이다.

지안 큰스님 글. 월간 반야 2010년 2월 111호

정 붙이고 정 떼기

얼마 전에 내가 사는 암자에 누가 기르던 애완용 개 한 마리를 버리고 갔다. 어떤 젊은 주부인듯한 여성이 개를 데리고 와 정자에 놀다가 개를 두고 그냥 가버렸다는 것이다. 주인이 깜박 잊고 미쳐 개를 데리고 못간 것이 아닌지 하고 혹 찾아 올려나 기다렸으나 주인은 영영 나타나지 않았다. 하여 우리 절 식구들은 이 개를 주인이 일부러 버리고 간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실제 도시에 사는 사람들 중에 개를 키우다가 집 밖에 갖다 버리는 경우가 많다고 하였다. 그런데 주인 잃은 이 개는 절에 있는 것이 좋은지 우리 절식구들 아무나를 보면 꼬리를 흔들며 따라다니는 것이었다. 공양간에 있는 송지월이 개가 불쌍하다고 밥을 챙겨주고 했더니 며칠을 잘 놀고 지내고 있었다. 무척 순하고 얌전하게 보이는 개였으나 안 키우던 개를 절에 두고 있기가 내키지 않아 파출소에 갖다 주는 것이 어떠냐고 했더니 마침 어떤 노보살님이 키우겠다고 데리고 갔다 하였다.

그런데 이 개가 절에 일주일 넘게 있었는데 한 번도 짖지를 않고 소리를 내는 일이 없었다. 이 점을 두고 나는 개가 온순하여 그렇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 했다. 누가 설명하기를 도시의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이 개를 키울 때 이웃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게 하기 위해 개가 아예 짖지 못하도록 성대를 제거해 버리고 키운다는 것이다. 이런 말을 나는 처음 들었다. 이 말은 들은 나는 너무 잔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짖지 못하는 개를 만들어 그것을 데리고 예뻐하다가 싫증나면 갖다 버린다니 왠지 취미치고는 알 수 없는 취미인 것 같았다. 정 붙여 키우던 개를 왜 버리고 갔는지? 하기야 꽃도 병에 꽂아 두었다가 시들면 갖다 버리니 개라고 못 버릴 것 없지 않느냐 할런지 모르지만 식물과 동물이 똑같을 수 없다고 생각되었다. 꽃은 시들면 쓰레기가 될 수 있지만 목숨이 붙어 있는 동물을 쓰레기처럼 취급할 수는 없는 법 아니겠는가?

이번 일을 통해서 나는 사람의 마음에 정 붙이고 정 떼는 일이 예사 일이 아니라는 것을 느끼게 됐다. 세속적으로 흔히 하는 말이지만 사람은 정 때문에 산다고 한다. 사람의 가슴엔 언제나 정이 서려있다. 불교에서는 중생은 마음에 정을 갖고 산다 해서 정식(情識)이 있는 존재라는 유정(有情)이라 번역하기도 한다. 정 붙이고 정 떼는, 이것이야말로 증애의 감정을 노골적으로 표현하는 일이다. 그런데 정을 잘 붙여야 한다. 정을 잘못 붙이면 결국 내 인생이 틀리게 된다. 정을 붙이는 대상에 따라서 사람의 의식이 달라지는 것은 매우 흔한 일이다. 개를 좋아하다 보면 개에게 깊은 정을 주게 되는 수가 있다. 그러다 보면 개가 사람보다 더 좋아지는 수가 실제로 생긴다.

수년 전에 입적한 숭산스님께서 미국에서 포교활동을 할 때에 이런 일이 있었다 한다.

참선수련회를 열던 어느 때 가끔 절(선센터 : zencenter)에 오는 미국인 아가씨 한 사람에게 수련회 참석을 권유하였더니 “자기가 키우는 개를 돌봐야 하기 때문에 참석할 수 없다”고 했다. 그래서 “개를 데리고 와 참선 시간에는 절의 후원에 맡겨 두고 정진시간에만 정진하면 된다”고 하였더니 “그래도 되요?”하고는 선 수련을 시작하는 날 개를 데리고 오더라는 것이다. 그리고 쉬는 시간만 되면 개를 안고 노는데 정신이 팔려 있었다. 3일간 참선 수련이 계속 되었는데 둘째 날 이 아가씨의 오빠가 절로 전화를 해 와 이 아가씨를 찾았다. 어머니가 교통사고로 병원에 입원을 하게 되었으니 빨리 와 보살펴 드리라는 부탁이었다. 오빠의 전화를 받은 이 아가씨는 자기는 개 때문에 병원에 갈 수 없으니 오빠가 다른 사람을 고용해 어머니를 보살피게 하라는 것이었다.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대답이었다. 숭산스님은 <선의 나침반>이란 책을 내어 이 이야기를 소개 하면서 농담 같은 말을 덧붙였다. 개에 대한 의식이 너무 지나친 이 아가씨는 죽어서 개가 될 확률이 매우 높다는 것이었다.

얼마 전에 신문에 이런 토픽 기사가 실려 있는 것을 보았다. 미국의 어떤 여성 부동산 업자가 개에게 125억원의 재산을 상속시켰다는 내용이었다. 동물애호가들이 동물 학대를 반대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과연 사람이 사람 아닌 동물에게 재산을 상속시킨다는 것이 정당한 처사인지는 우리로서는 이해가 안 간다.

사람이 왜 지나칠 정도로 동물에게 정을 쏟을까? 사회 심리학자들은 이를 인간 소외현상 때문이라고 설명한다고 한다. 인간에 대한 신뢰가 부족해지고 동시에 자신에 대한 외로움과 허전함을 주체할 수 없기 때문에 가장 편하게 정 붙일 곳을 찾는다는 것이다. 일종의 자기만족의 정신적 돌파구를 찾는 현상이라는 것이다. 유럽의 여성들이 애완용 개 등을 데리고 외출을 하는 일은 이제 생활 풍습처럼 되었다고 한다. 프랑스 파리에는 시민들이 개똥을 치우는 세금을 낸다는 말도 수년 전 파리에 갔을 적에 들은 적이 있다. 거리를 지나다 보면 개와 고양이가 어린 아이들보다 훨씬 많이 눈에 뜨인다고 한다. 문제는 일시적인 감정에 도취되어 인륜의 범위를 벗어난 사람우선주의가 아닌 동물 우선주의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참된 마음에서 우러난 순수한 정은 자신의 참 마음 그대로이기 때문에 버릴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을 뗀다는 것은 방편으로 자립을 도와주는 수단으로 필요할 때가 있을지 모르지만 정을 뗀다는 것은 순수한 정이 없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다. 이런 법문이 있다.

“무정으로써 유정을 대하고 무심으로써 유심을 대하라 (以無情對有情 以無心對有心).”

“떨어진 꽃잎은 정을 갖고 물을 따라 흘러가지만 흐르는 물은 아무 마음 없이 떨어진 꽃잎을 보내 주누나 (落花有意隨流水 流水無心送落花).”

확실히 잘못 쓰는 정보다 무정이 나은 것이고 무심이 좋은 것이다.

지안큰스님 글. 월간반야 2007년 10월 제83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