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대사강경(傅大士講經)

남조 시대에 지공스님이라는 분이 신이(神異)를 나타내어 사람을 현혹했다고 하여 감옥에 갇혀 있게 되었습니다. 마침 양무제가 이 스님이 범상치 않은 분이라는 사실을 알고 옥살이를 풀어준 후, 그로부터 금강경 강의를 듣고저 했습니다.

이에 지공스님은 끝내 사양하고 부대사를 추천했습니다. 그리하여 양무제는 지공스님이 추앙하는 부대사를 청해 강의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부대사가 금강경 강의를 위해 법좌에 올라가더니 책상을 한번 ‘탕’ 치고는 그냥 내려와 버렸습니다. 이를 본 양무제는 깜짝 놀랐습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지공스님이 “폐하께서는 부대사가 하는 뜻을 알 수 있겠습니까”라고 묻자 양무제는 “모르겠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지공스님은 “부대사는 방금 금강경 강의를 다 마쳤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부대사의 이러한 행위를 지사문의(指事問義)라고 합니다. 지사문의란 선사들이 학인을 대할 때 언어나 소리 혹은 행동으로써 진리를 가르치려고 사용하는 여러 가지 방법에 속하는 행위를 말합니다. 곧 부대사는 선종의 종지를 가르치려고 알음알이의 개념적 어언(語言)을 초월한 무심한 선의 절대 경지를 그대로 말없이 나타내려고 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 양무제를 깜짝 놀라게 하여, 양무제로 하여금 금강경을 듣고자 하는 알음알이 기대를 실망시켜 의욕이 사라지게 함으로써, 무심한 선의 절대경지로 들어가게 하려고 하지 않았나 생각이 듭니다. 곧 우리들은 선의 절대경지를 알음알이의 의식계와는 전혀 다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부대사(497~569)는 양나라 사람으로 속성은 부씨, 이름은 흡입니다. 24세때 숭두타를 만나 불교에 귀의했습니다. 쌍림대사, 동양거사라도 불리워지며 양무제의 귀의를 받았습니다. 우리에게는 금강경 오가해(五家解) 중의 한 분으로 유명합니다.

인해스님 글. 월간반야 2005년 3월 제52호

시장님이 누군지 모른다()

일전에 한 시민단체에서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활동지표를 개발하기 위해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청소년들의 지역사회 관심도를 알아보기 위해 현재 살고 있는 시의 시장 이름을 알고 있느냐는 질문에 80% 정도가 모르거나 관심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이러한 설문조사 결과에 대한 해석은 구구하게 나올 수 있겠지만 내 생각은 그래도 긍정적이다.

시장이 누구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우리 어른들이 누구를 우리지역사회를 이끌어 갈 일꾼으로 누구를 뽑았느냐도 이들에겐 중요하지 않다. 단지 누가 청소년들이 미래 이 사회의 주역으로 자라는데 필요한 호연지기와 풍성한 정서와 건강한 신체를 가꾸는데 적합한 주변 환경과 여건을 만들어주느냐가 그들의 주된 관심의 대상이어야 한다.

우리보다 몇 세기 앞서 민주주의를 탄생시킨 영국 같은 나라에서도 청소년뿐 아니라 성인들의 상당수가 자기 나라의 수상 이름을 모른다고 한다. 실제 수상 이름을 아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 게 아니라는 점이다. 이제 우리 사회에서도 정치하는 사람들이나 정치 지향형의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국무총리나 부총리, 장관 이름을 제대로 기억하는 사람들은 예전처럼 많지 않은 것 같다. 그것은 서민들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해 아직도 우리사회에서는 정치의 영향력이 크긴 하지만 점차 줄어가고 있는 징조라고 볼 수 있다.

흔히 우리가 중국의 태평성대를 말할 때 예를 드는 요(堯) 임금이 천자의 자리를 이양하기 위해 백성들의 삶의 현장을 암행하다가 한 농부에게 요즈음 왕이 정치를 잘 하느냐고 물었더니 그 농부가 답하기를 “왕이 정치를 어떻게 하는지 알 필요도 없고, 우리 같은 농부는 농사만 잘 지으면 된다”는 답을 듣고는 안심하고 양위를 결심하였다는 이야기가 있는 것을 보면 정치를 잘 할 경우엔 백성들이 그 통치자나 목민관에 대해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것이다.

정치지도자나 목민관이 자기의 재임 중 공적을 나타내기 위해, 또 자기 이름을 드러내기 위해 무리한 시책을 펴거나 자극적인 방법으로 요란하게 행정을 해서는 안 된다. 어쩌면 있는 듯 없는 듯 하면서 백성들의 어려움을 덜어 주고 순리대로 이끌어 가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즈음의 우리 사회는 얼마나 규제가 심하길래 그 규제를 막기 위한 기구까지 만들어야 하니 이 또한 얼마나 한심한 일인가.

바야흐로 대통령을 뽑기 위한 정치의 계절이 다가온다. 요(堯) 임금이 아들 주(朱)를 단연(丹淵)의 제후로 봉해 놓고는, 효자 순(舜)에게 천하를 넘겨 준 것처럼 큰덕〔峻德〕을 가진 요 임금이나 도심(道心)을 가졌던 순 임금 같은 지도자가 어디 없을까.

김형춘 글/ 월간반야 2002년 11월 (제24호)

봄이 오매 온갖 꽃이

춘지백화위수개 春至百花爲誰開 봄이 오매 온갖 꽃이 누굴 위해 피는가?

동행불견서행리 東行不見西行利 동으로 가면 서로 가는 이익을 보지 못한다.

흑두부취백두어 黑頭父就白頭兒 머리 검은 아비가 머리 흰 아들에게 가니

양개니우전입해 兩箇泥牛戰入海 두 마리 진흙소가 싸우며 바다로 들어갔다.

이 시는 근세의 선지식 석두(石頭)스님의 시이다. 해방 전 금강산 신계사에 주석하시다가 효봉스님을 만나 법을 전했다. 효봉스님의 은법사인 스님께서 어느 날 효봉스님과 법거량을 하면서 답했다는 시다.

봄이 왔다고 상춘 인파가 명승지를 찾으며 야유회를 즐기는 시즌이 되었다. 명산대찰에도 봄맞이 인파는 들끓는다. 봄이 여름을 오게 하고 가을을 오게 하는 사시의 통과 과정이건만 봄이라고 봄만 보아서는 안 되고 봄 속의 여름과 가을도 보자는 근본을 보아야 한다는 메시지를 주면서 제 2구에서 동쪽으로 가면 서쪽으로 가는 이익을 보지 못한다고 하였다. 3구는 상식을 반하는 이야기이다.

아버지가 젊고 아들이 머리가 희었다는 이야기로 지나간 과거보다 다가오지 않는 미래가 더 오래 되었다는 뜻이다. 시간이 끊어진 초월의 자리에서 어디에도 걸림이 없는 자유로운 발상을 하고 있다. 두 마리 진흙 소가 싸우며 바다에 들어갔다는 것은 식심분별이 끊어져 주객이 대립하는 갈등이 없어져 아무 일없는 무사한 무위심이 되어 산다는 뜻으로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요산 지안 큰스님 글. 월간반야 2009년 4월 제101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