혀없는 사람만 와서 살아라

불교에서는 사바세계를 음성교체(音聲敎體)라 하면서 말로써 부처님 가르침의 바탕을 삼는다고 한다. 교법의 체를 음성으로 하여 법을 설한다는 뜻이다.

지구상에 있는 수많은 언어들이 사람과 함께 태어나 말이 있음으로 살아있는 사람들의 힘을 느끼게 한다고 말한 사람도 있다. 우리가 사회에서 사람의 힘을 느끼는 것은 일차적으로 언어를 통해서라고 한다. 더욱이 현대사회에서는 방송매체 등 각종 매스컴이 발달하여 매일 같이 전해지는 소식중 하나가 누가 무슨 말을 하였나하는 것이다. 말을 하고, 그 말을 듣고 또 말을 하고…. 말이 끊어지면 아마 블랙홀 같은 데로 빠져 들어가 버릴지 모른다. 그래서 말이 있어야 하고 말로 살아가는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다.

하지만 말은 결국 뜻을 전달하는 수단으로 하는 것인데 말 속에는 많은 비밀이 들어 있어 말을 듣고도 숨어 있는 뜻을 찾을 수가 없어 의아스럽고 고민스러울 때가 있는 것이다. 말의 혼란 때문에 정신이 어지러울 때가 많다는 것이다. 또 공연히 말의 함정에 빠져 낭패를 당하는 수도 있다. 말하자면 말이 동물을 잡기 위해 쳐놓은 덫처럼 함정을 만들어 말에 걸려드는 사람에게 피해를 입게 하는 것이다. 또 말이란 개인의 욕구를 충족시키려는 사적인 이기심에서 터무니없는 주장을 내세우기 위해 나오는 수도 많다. 그리하여 말씨름으로 승부를 가르려고 덤비는 사람들도 있고 말로써 사람을 현혹시키는 경우도 허다하다. 업으로 보면 말은 구업인데 이 업이 바르지 못하여 망어(妄語)가 되고 악어(惡語)가 되고 기어(綺語)가 되어 반도덕적이고 반윤리적인 나쁜 결과를 초래한다. 뿐만 아니라, 말도 병이 든다. 생각이 병이 드는 것처럼 말이 병이 들어 건강하지 못할 때가 있다. 병든 말에는 믿음이 따르지 못한다. 이른바 불신을 조장하는 것이 말에서 시작된다. 말이 거짓이 되거나 말과 행동이 전혀 일치가 되지 않을 때 말로만 저러는구나 하고 상대가 그 사람의 말을 믿어주지 않게 된다. 가짜를 가장 손쉽게 만드는 것은 거짓말을 하는 것이다. 물론 말에도 짝퉁이 있다. 명언이 아닌 가짜 명언을 명품을 사칭하는 것처럼 사람들은 자신을 치장하는 액세서리로 도용하는 것이다.

세상에는 하고 싶은 말이 많은 사람들이 많다. 절절한 비원을 가슴에 품고 살다보면 누구에게 자기 심정을 터놓고 하소연하고 싶을 때도 있다. 그런가 하면 세상에 대한 울분과 원망을 삭이지 못하여 고함이라도 질러 세상을 저주하고 싶을 때도 있다. 다시 말하면 세상을 향하여 할 말이 가슴 속에 남아 있어 그 말을 언젠가 하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말을 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 이들에게는 아직도 먼 생사윤회의 길이 남아 있을 것이다. 수도자들의 세계에서는 말을 하지 않고 침묵을 지키는 묵언으로 도를 닦는 사람들도 있다. 달이가고 해가 가는 수많은 세월을 묵언으로 정진한다. 그들은 왜 말을 하지 않을까? 말없는 세계, 윤회가 끝난 세계가 그립기 때문이다.

어느 산중에 작은 암자가 하나 있었다. 참선수행을 하는 납자가 이 암자에 혼자 살면서 정진을 하였다. 여름 결제를 하여 한철을 정진하고 있었는데 마침 장마가 져 비가 자주 내렸다. 지붕이 새어 빗물이 천정에 스며들어 방바닥으로 떨어지는 것이었다. 불편함을 참고 견뎌 장마가 끝났을 때 이 스님이 다음에 이 암자에 와 공부할 사람을 위해 비가 새지 않도록 지붕의 기와를 갈아 다시 덮어야겠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지붕을 고치다가 대들보 속에 들어 있던 상량문을 발견하게 되었다. 펼쳐보니 상량문의 내용이 이상하였다. 암자를 지은 때나 유래를 밝히지 않고 납자를 경책하는 경구(警句)가 적혀 있는 것이었다.

구무설자당주(口無舌者當住) 야유몽자불입(夜有夢者不入)

“입에 혀가 없는 사람만 와 살아야 하며 밤에 꿈이 꾸이는 자는 들어와서는 안 된다.”

무슨 뜻이냐 하면 이 암자에 와 혼자 공부를 할 수 있는 사람은 혀가 없는 사람, 곧 세상을 향해 할 말이 없는 사람이어야 하고 잠잘 때 꿈이 꾸이지 않는 정신이 맑아진 사람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세속에서도 때로는 할 말을 줄이고 사는 말을 절약하는 생활도 필요할 것 같다. 불필요한 말을 너무 많이 하여 남을 귀찮게 하는 것은 말하는 자는 인격의 허물이다. 말이 많고 지나치면 세상을 시끄럽게 하는 소음이 되고 말 것이다.

지안큰스님 글. 월간반야 2007년 8월 제81호

위학지서(爲學之序)

오래 전 일이다. 30대 중반의 늙은 학생이 무작정 물어 물어 서당을 찾아갔다. 훈장님은 조선조 마지막 유림의 제자답게 근엄 하시면서도 인자함 그대로였다. 첫날 배운 내용은 ‘위학지서(爲學之序)’라는 글이었다. 배움의 차례라고나 할까. 학문의 순서라고나 할까. 매우 논리적이고 합리적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박학지(博學之)’하고, 심문지(審問之)하며, 신사지(愼思之)하고, 명변지(明辨之) 연후에 독행지(篤行之)하라’고 하셨다. 공부하는 동안에도 가끔씩 이 글귀를 음미해 왔지만 세상을 살아가면서 숱한 문제들과 부딪칠 때 마다 항상 나는 이 차례를 ‘문제해결의 순서’라고 생각하고 매사에 적용해 왔다. 어떤 문제든지 직면하면 먼저 이 문제에 관한 가능한 많은 정보를 수집하고, 자세히 모르거나 의심나는 부분은 누구를 가리지 않고 묻고 자문을 구한다.

그리고는 조심스레 생각하고 또 생각한 연후에 나름대로 판단을 내린다. 스스로 고민하여 내린 판단에 대해선 지체 없이 소신껏 행동으로 옮기면서 살아왔다. 어쩌면 내 삶은 이러한 과정의 연속인 셈이다. 문제가 크건 작건, 쉬운 것이든 어려운 것이든 이 공식에 대입하여 풀어낸 셈이다. 그리고는 문제를 제대로 풀었는지 잘못 풀었는지 결과를 보면서 어느 과정에서 내가 소홀히 했는지, 적절한 대처를 하였는지 스스로 평가를 해 본다. 짧은 시간 안에 평가 결과가 나올 수도 있지만 꽤 오랜 시간이 걸릴 수도 있다. 어쩌면 내가 이세상 사람이 아닐 때에 평가가 나올 수도 있겠지.

그런데 지금쯤 느낌이 오는 게 하나 있다. 이 위학지서의 맨 첫 과정인 ‘박학지(博學之) 하고’ 하는 말이다. 어떤 문제든 간에 해결의 가장 긴요한 열쇠는 그 문제에 대한 ‘정확하고 풍부한 자료’라는 생각이 어렴풋이 든다. 요즈음 세상처럼 정보가 홍수처럼 쏟아져 나오는 때도 일찍이 없었고, 앞으로의 정보 홍수는 더 더욱 심각해질 것이다. 그러나 막상 어떤 문제에 부딪치고 보면 그 문제 해결에 적합한 정보를 찾는다는 것은 의외로 쉽지 않다. 오히려 정보가 많아서 탈이다. 문제 해결의 열쇠가 될 만한 ‘자료(data)’를 찾고, 필요한 자료의 양이 많으면 많을수록 문제해결의 가능성은 높아질 것이다. 다음 단계는 자료의 가공이라 하겠다. 이 자료가 분석되고 정리되고 적용되는 과정을 거치면서 ‘정보(information)’가 되는 것이다. 다시 이 ‘정보’에 의미를 부여한 것이 ‘지식(knowledge)’이 되고, 지식이 추상화되어 ‘지혜(wisdom)’가 된다면 지나친 논리의 비약일까.

물론 ‘박학(博學)’이 정확하고 풍부한 자료를 찾는 일만은 아니다. 그러나 이 자료를 찾기 위해 적접 또는 간접으로 숱한 체험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어쩌면 육식(六識)을 낳은 육근(六根)을 통해 스스로의 지적영역을 일단 넓혀 놓아야 한다는 말이다.

요즈음 우리 주변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정치나 경제, 심지어 언론까지도 아전인수격으로 제 발등 불끄기에 급급한 모습을 보면 좀은 안쓰럽다는 생각이 든다. 정보가 없는 것도 아니고 모자라는 것도 아닐텐데. 이럴 때 선인들의 지혜인 ‘위학지서(爲學之序)’를 권해보고 싶다.

김형춘 글. 월간반야 2003년 12월 제37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