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의 화두(話頭)

방문 밖에서 봄이 오는 발자국 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 때이다. 벌써 춘분이 지나고 매화꽃이 만발하여 꽃들의 편지가 우리 가슴에 소식을 전한다. 대지에 새싹들이 꿈틀거리고 곳곳에서 지심 뚫는 인기척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해마다 사 계절이 어김없이 오고 가지만 봄이 오는 때가 가장 반갑다. 인동의 겨울을 이기고 오는 봄이기 때문일 것이다. 겨우내 한데 서서 한파에 시달리던 나무들이 움을 틔우고 있는 모습들을 보면 자연의 신비가 곧 세상의 신비임을 느낀다.

선 수행에 있어서는 봄이 오는 것도 하나의 화두이다. “동군(東君: 봄)이 어디 있느냐?”는 화두도 있고 “봄바람이 몇 근이냐?”는 화두도 있다. 생명이 약동하며 만물이 소생하는 봄의 정서적 기운보다 현상의 배후에 숨어 있는 원초적 본질을 묻는 근본 질문이 있어 때때로 우리는 이 봄의 화두를 물어 보아야 할 필요도 있는 것이다.

사람의 마음도 봄의 마음이 있다. 부드럽고 온화하고 싹을 틔우는 것 같고 꽃을 피우는 마음이다. 인생을 봄 마음으로 살라는 법문도 있었다.

옛날에 어느 큰 스님은 당신의 제자에게 편지를 썼다. 제자가 큰 절의 주지 소임을 맡게 되었을 때 대중을 잘 외호하고 소임을 잘 볼 수 있을지 걱정이 되어서 쓴 편지에 봄의 마음으로 대중을 대하면서 소임을 보고 살라는 가르침을 주었다.

또 선가어록에는 가끔 심화돈발(心花頓發)이라는 말이 나온다. 갑자기 마음에 꽃이 피었다는 말이다. 이 말은 물론 깨달음의 꽃을 피운다는 본뜻이 있겠지만 단순히 말하면 꽃을 피우는 마음이 되라는 말이다. 마음에 무슨 꽃이 피는가? 마음에 북받치는 모든 감정도 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기쁨의 꽃, 슬픔의 꽃, 웃음의 꽃, 눈물의 꽃. 그러나 이러한 수사적인 표현에 앞서 꽃이란 아름다움을 상징하는 명사이다. 그러므로 마음의 꽃은 아름다운 마음 그 자체를 말하는 것이 된다. 세수를 하고 화장을 하는 것처럼 사람의 마음도 화장이 필요하다.

마음의 화장이란 우선 가벼운 기분전환으로 시작된다. 샘물이 솟듯 무언가 솟아나는 마음으로 보고 듣는 것에 감탄사를 발할 수 있는 마음이라야 꽃이 피는 마음이 될 수 있다. 언제나 유쾌하고 명랑한 표정으로 누구에게 윙크라도 해 주고 싶은 마음이 꽃을 피우는 마음이다. 이러한 마음으로 사람을 대하면서 대외적으로 선행을 베풀고 남을 위한 이타행을 할 수 있을 때 마음의 꽃은 만발해 지는 것이다.

얼굴에서 나오는 작은 미소 하나, 남을 위한 조그마한 배려, 이러한 것도 분명 마음의 꽃이다.

잡보장경』에는 돈들이지 않고 할 수 있는 7가지 보시 이야기를 해 놓은 법문이 있다. 무재칠시(無財七施)라고 하는 이 내용은 남에게 부드럽고 온화한 얼굴을 보여 주는 것을 얼굴로 보시하는 화안시(和顔施)라 하였고, 고운 눈매로 남과의 시선을 나누는 것을 눈으로 보시하는 안시(眼施)라 하였다. 손가락으로 방향을 가르쳐 주며 길을 안내해 주는 것 등은 손가락으로 보시하는 지시(指施), 남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것을 좌상시(座上施), 부드러운 말, 고운 말로 남을 찬탄하거나 위로 하는 것을 언사시(言辭施)라 하였다. 무거운 물건을 들고 가는 나이 많은 사람을 보고 잠간 그 물건을 대신 들어주는 행위 같은 것은 몸으로 보시하는 신시(身施)이다. 그리고 남의 일에 우호적인 관심을 가지고 지켜봐 주거나 성원해 주는 것을 마음으로 베푸는 심시(心施)라 하였다.

이러한 7시의 마음이 꽃을 피우는 마음이다. 여기에는 돈이 들지 않을 뿐만 아니라 큰 노력이 따르지도 않는다. 가볍고 아주 작은 표정 하나에서 보시를 행하는 것이 된다. 그저 좋은 일, 잘 된 일에 감탄하고 감동할 줄 알면 그 속에서 마음의 꽃이 피는 것이다. 꽃이 피지 않으면 봄이 느껴지지 않는다. 불우한 생애를 살았던 절세의 미인 한소군(漢昭君)은 “오랑캐 땅에는 꽃이 없으니 봄이 와도 봄 같지 않다.”(胡地無花草 春來不似春)는 독백을 하였다. 꽃이 없는 봄은 생각할 수 없다. 동시에 꽃이 피지 않는 마음도 마음이 아니다. 꽃을 피우는 마음 그 속에서 세상은 아름답고 빛나는 것이리라. 산과 들을 화장하는 봄의 향연이 화신의 율동으로 시작을 알린다. 내 마음 속의 봄을 찾는 봄의 화두여!

物物逢時各得香 물물봉시갇득향 너와 내가 만나면 향기가 어리고

和風到處盡春陽 화풍도처진춘양 온화한 바람 속에 봄볕이 따사롭네.

人生苦樂從心起 인생고락종심기 인생이 괴롭다 즐겁다 하는 건 마음 두고 하는 말

活眼照來萬事康 활안조래만사강 활달한 눈으로 세상을 보면 아무 일도 괴로울 것 없다네.

지안 큰스님 글. 월간 반야 2010년 4월 113호

복을 짓는 농사

인생살이를 농사에 비유한 이야기가 불경 속에 가끔 있다. 『화엄경』이나 『범망경』 등 대승경전에 사람의 마음을 땅에 비유해 심지(心地)라고 한 말이 있으며 이 마음 땅에 좋은 종자를 심어야 한다는 말이 나온다. 또 심전경작(心田耕作)이라는 고사성어처럼 만들어진 말도 있다. 사람이 살아가는 생활 자체가 분명히 농사짓는 일임에 틀림이 없다. 좋은 씨앗을 뿌리고 거름을 주어 재배관리를 잘 해야만 알찬 수확을 거둬들이는 게 농사를 잘 짓는 것이다. 수해나 한해의 피해를 입어서도 안 되며 가뭄의 피해가 있어도 농사는 잘 되지 않는다.

부모가 자식을 잘 키우는 것을 ‘자식농사 잘 짓는다’는 시쳇말이 있는 것처럼 인생사 전부가 농사로 비유되는 것은 사람의 일이 노력에 따라 결과가 나타난다는 인과의 이치를 일깨워 주는 말이다. 또한 농사는 사람의 노력과 함께 기후나 일기의 조건이 농사에 큰 영향을 미친다. 비가 적당이 와야 하고 기온이나 일조량 등이 알맞아야 한다. 다시 말해 이상기온이 되면 농작물에 제일 먼저 피해가 온다.

일기나 기후의 조건은 사람의 의지대로 맞아지는 것이 아니다. 농사가 잘 될 수 있도록 기후나 일기가 순조로운 것을 옛날에는 시절인연이 좋다 하거나 하늘이 복을 주어 천운이 좋았다고 표현해 왔다. 이른바 운(運)이라는 것을 사람이 잘 타야 한다 하면서 운명론이 아니면서도 운명론적인 이야기를 종종 해 왔다는 것이다.

도대체 ‘운이 좋다’라고 말할 때의 운이란 것이 무엇인가? 불교에서는 이를 복력과 연관 지어 설명한다. 운이란 자기가 지어놓은 과거의 복력에 의해 좋은 인연을 맞이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운이 좋다는 것은 숙생에 선근이 심어진 일이 있어 그것에 의한 좋은 과보가 나타나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그러니까 운이 좋다거나 운이 좋지 않다고 하는 것은 과거에 내가 한 행위와 직간접적인 관계가 있다는 말이다. 사람에게 행운이 오는 것은 우연이 아니라 자신의 숙업이 좋은 탓이며, 과거의 원인에 대한 현재의 결과는 언제나 인과의 일치성을 띠고 있다고 말한다. 하도 세상이 각박해지니까 사람에 대한 평을 이렇게 하는 수가 있다. ‘누가 좋은 사람이냐?’ 물어 놓고 착한 사람, 마음씨 고운 사람을 당연히 좋은 사람이라 해야 할 텐데 이 도덕적 인품을 아랑곳하지 않고 ‘운이 좋은 사람이 좋은 사람이다’라는 말이 등장하기에 이르렀다.

운을 좋게 가꾸는 방법을 복을 짓는 일이라고 한다. 복을 짓는다는 것은 남을 위한 선행을 베푼다는 뜻이지만 인생의 참뜻을 알려는 노력과 진리에 대한 소신을 가지고 자기가 수용하는 복을 남에게 나누어 주는 일이 된다.

중국의 고사에 나오는 이런 설화가 있다.

어느 선비가 글공부를 하여 과거에 응시를 했다. 그러나 번번이 실패를 해 7번을 낙방했다. 이 선비는 자기의 불운을 탄식하며 깊은 절망에 빠져버렸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건너 마을에 사는 제자와 다름없는 후배가 있었는데, 이 후배는 책을 보다 모르는 것이 있을 때 이 선비를 찾아와 가르침을 받아 배워가곤 했는데, 이 후배는 합격을 한 것이었다.

어느 날 이 선비가 낙심한 채 주막에 가 술을 실컷 마시고 집으로 돌아와 홧김에 보던 책을 찢고 또 마당에다 책들을 팽개쳐버렸다. 7번이나 낙방한 주제에 더 이상 책을 보아 무엇 하느냐 하고 자조와 자탄으로 술김에 저지른 행동이었다. 그러다가 술에 취한 채 마루에 누워 잠이 들고 말았다. 비몽사몽간 꿈이 꾸였다.

꿈에 웬 신인이 나타나 이 선비에게 호통을 치며, 일어나 방안으로 들어오라고 하는 것이었다. 선비는 기가 죽어 신인의 명대로 방에 들어가 신인 앞에 꿇어앉았다. 신인의 뒤에 병풍이 둘리어져 있고 신인이 아무개를 부르자, 우람한 장정 두 사람이 나오는 것이었다. 신인은 이 장정 두 사람을 좌우에 앉혀 놓고 상에 바치고 온 술병에서 술을 부어 두 장정에게 번갈아 한 잔씩 마시게 하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이 선비에게 잘 보아 두라고 다시 명을 내리는 것이었다. 선비는 두 장정이 술 마시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왼쪽에 앉아 술을 마신 장정은 3잔을 받아먹고 까무러쳐 바닥에 쓰러져버렸다. 그런데 오른 쪽에 앉아 술을 받아 마신 장정은 왼쪽 장정보다 많은 7잔을 받아 마시고 나서 역시 까무러쳐 쓰러지는 것을 보았다.

이때 신인이 다시 노한 음성으로 이 선비를 꾸짖었다. “보았느냐?” 두 장정이 받아 먹은 잔 수를 물으며 신인은 이 선비가 과거세에 지어놓은 복이 부족해 과거에 떨어진 것을 모르고 불운만 한탄하면서 성현의 책을 찢고 마당에 내팽개쳤다고 호되게 꾸짖는 것이었다. 3잔과 7잔의 수치는 자기의 재주와 복력의 비율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잠에서 깨어난 선비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자기의 불운이 복 부족이라고 다시 생각하고 선비는 그때부터 복 짓는 일을 하기 시작했다. 마을을 다니면서 길흉사가 있는 집을 찾아가 온갖 도와주는 일들을 했다. 사람들을 공경히 대하고 말 한마디라도 친절하게 해 주었다. 책은 틈틈이 조금씩 보면서 이런 일을 3년을 계속했다. 남을 도와주는 일을 헌신적으로 하고난 선비는 마지막으로 다시 과거에 응시해 드디어 합격을 하였다는 것이다.

사람의 일이란 능력대로 가는 것이긴 하지만 그 능력의 배후에는 복력(福力)이 숨어 있으며 능력과 복력이 잘 어울려져야 한다는 뜻을 말해주는 설화다.

지안스님 글. 월간반야 2006년 8월 제69호

단식유감

단식은 아무나 하는 것인가. 단식은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는가. 우리사회는 개인이 단식을 통한 의사 표현이나 저항 운동을 하는 경우가 점차 늘어나고 있다. 건강을 위해서 조용히 하는 사람보다 정치인들이 요란하게 시작하여 며칠 안에 적당히 성명서 조각이나 발표하고 끝내는 단식이 더 많다. 이번 고속철도 천성산 터널 공사와 관련한 지율 스님의 단식은 단식운동 효과의 절정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가 아닌가 한다.

지난해 말 모 야당 국회의원의 단식으로 애꿎은 경찰서장의 문책인사와 함께 일선 경찰들의 사기만 떨어뜨려 놓았는데, 지율 스님의 단식도 국책사업의 중단과 경제적 손실에 대한 성토 및 생명에 대한 사회적 인식의 제고로 이 사태에 대한 평가가 나뉘어지는 느낌이었다. 여기서는 이런 문제의 본질에 대한 찬반이나 시비보다 단식에 대한 보다 윤리적, 사회적 의미를 생각해 보고자 한다.

예로부터 성급하고 다혈질적인 사람은 자살이라는 죽음을 저항이나 결백을 주장하는 수단으로 선택하였지만, 그보다는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신체에 변형을 수반하지 않고 서서히 완만하게 스스로를 파괴하는 ‘단식’이 저항의 방법으로 선택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근래에 와서는 걸핏하면 삭발이니 단식이니 하여 유행처럼 되어버렸으니 메스컴이나 시민들도 웬만해서는 관심을 가져주지 않는다.

환경이나 인권운동의 절실함과 생명가치의 중요성도 인정하지만 우리 사회의 실존적 선택이 주는 진지한 절박함에 대한 이해의 측면에선 문제가 될 수 있다. 어떤 문제로 누가 목숨을 걸고 며칠째 단식을 한다고 할 경우, 우리 사회는 이 실존적 사건에 대해 진지한 태도로 접근하기보다는 방관자적 구경꾼의 시각으로 보는 사람이 대부분이라는 것이다. 그럴 경우 단식은 냉소적 비웃음이나 지나친 동정의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다 보면 문제의 본질은 뒷전으로 밀려나고 ‘며칠째’라는 ‘숫자’에 더 관심을 두고 정부나 관계기관의 대응에만 관심이 쏠리게 된다.

우리 사회가 개인이나 집단의 의견이 자유스럽게 국가정책에 받아들여진다면 단식이라는 행위는 권장할 것이 못된다. 하지만 아직도 우리 사회는 합리적이지 못한 면이 많기에 누가 단식을 한다면 어느 정도 도덕적 우월성을 인정해주는 분위기다. 이러한 분위기가 또 다른 단식을 낳는다. 단식이 때로는 의로운 개인과 부당한 집단 사이의 싸움이 아니라, 이기적이고도 자유스러운 취향의 선택처럼 느껴질 때가 많으니 말이다. 단식을 시작해 놓고 보면 그 목적과 동기는 사라지고 오직 수단만이 부각되어 생명을 볼모로 삼아 목적을 이루려는 반 생명적인 행위로 간주되거나, 매스컴의 조명을 받으려는 선전행위로 간주되기도 한다.

옛 말에도 ‘단식은 영혼의 음식이며 혀를 조심하고 입을 함부로 열지 않게 하며 금욕적이게 하고 일어난 분노를 절제’시킨다고 하였다. 특히 우리나라와 같은 유교문화권에서는 아무리 명분이 고귀해도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신체를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것은 불효라고 보았다. 어떤 경우든 건강을 지키기 위한 단식이 아닐 바엔 다른 수단 방법을 찾는 것이 좋겠다.

환경보호 인식과 중생보호의 명분이 국가적 차원에서 진행되었던 국책사업의 명분과 실리 사이에서 국민들이 고민하지 않도록 정부도 정신차려야 하겠지만 제2의 지율 스님도 나오지 않길 빈다.

김형춘 글. 월간반야 2005년 3월 제52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