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식은 아무나 하는 것인가. 단식은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는가. 우리사회는 개인이 단식을 통한 의사 표현이나 저항 운동을 하는 경우가 점차 늘어나고 있다. 건강을 위해서 조용히 하는 사람보다 정치인들이 요란하게 시작하여 며칠 안에 적당히 성명서 조각이나 발표하고 끝내는 단식이 더 많다. 이번 고속철도 천성산 터널 공사와 관련한 지율 스님의 단식은 단식운동 효과의 절정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가 아닌가 한다.
지난해 말 모 야당 국회의원의 단식으로 애꿎은 경찰서장의 문책인사와 함께 일선 경찰들의 사기만 떨어뜨려 놓았는데, 지율 스님의 단식도 국책사업의 중단과 경제적 손실에 대한 성토 및 생명에 대한 사회적 인식의 제고로 이 사태에 대한 평가가 나뉘어지는 느낌이었다. 여기서는 이런 문제의 본질에 대한 찬반이나 시비보다 단식에 대한 보다 윤리적, 사회적 의미를 생각해 보고자 한다.
예로부터 성급하고 다혈질적인 사람은 자살이라는 죽음을 저항이나 결백을 주장하는 수단으로 선택하였지만, 그보다는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신체에 변형을 수반하지 않고 서서히 완만하게 스스로를 파괴하는 ‘단식’이 저항의 방법으로 선택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근래에 와서는 걸핏하면 삭발이니 단식이니 하여 유행처럼 되어버렸으니 메스컴이나 시민들도 웬만해서는 관심을 가져주지 않는다.
환경이나 인권운동의 절실함과 생명가치의 중요성도 인정하지만 우리 사회의 실존적 선택이 주는 진지한 절박함에 대한 이해의 측면에선 문제가 될 수 있다. 어떤 문제로 누가 목숨을 걸고 며칠째 단식을 한다고 할 경우, 우리 사회는 이 실존적 사건에 대해 진지한 태도로 접근하기보다는 방관자적 구경꾼의 시각으로 보는 사람이 대부분이라는 것이다. 그럴 경우 단식은 냉소적 비웃음이나 지나친 동정의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다 보면 문제의 본질은 뒷전으로 밀려나고 ‘며칠째’라는 ‘숫자’에 더 관심을 두고 정부나 관계기관의 대응에만 관심이 쏠리게 된다.
우리 사회가 개인이나 집단의 의견이 자유스럽게 국가정책에 받아들여진다면 단식이라는 행위는 권장할 것이 못된다. 하지만 아직도 우리 사회는 합리적이지 못한 면이 많기에 누가 단식을 한다면 어느 정도 도덕적 우월성을 인정해주는 분위기다. 이러한 분위기가 또 다른 단식을 낳는다. 단식이 때로는 의로운 개인과 부당한 집단 사이의 싸움이 아니라, 이기적이고도 자유스러운 취향의 선택처럼 느껴질 때가 많으니 말이다. 단식을 시작해 놓고 보면 그 목적과 동기는 사라지고 오직 수단만이 부각되어 생명을 볼모로 삼아 목적을 이루려는 반 생명적인 행위로 간주되거나, 매스컴의 조명을 받으려는 선전행위로 간주되기도 한다.
옛 말에도 ‘단식은 영혼의 음식이며 혀를 조심하고 입을 함부로 열지 않게 하며 금욕적이게 하고 일어난 분노를 절제’시킨다고 하였다. 특히 우리나라와 같은 유교문화권에서는 아무리 명분이 고귀해도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신체를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것은 불효라고 보았다. 어떤 경우든 건강을 지키기 위한 단식이 아닐 바엔 다른 수단 방법을 찾는 것이 좋겠다.
환경보호 인식과 중생보호의 명분이 국가적 차원에서 진행되었던 국책사업의 명분과 실리 사이에서 국민들이 고민하지 않도록 정부도 정신차려야 하겠지만 제2의 지율 스님도 나오지 않길 빈다.
김형춘 글. 월간반야 2005년 3월 제52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