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첫걸음

‘불자의 수행과 신행생활’ 1.수행과 기도 우리는 행복해지고 싶어합니다. 자유로워지고 싶어합니다. 그리고 불교는 이러한 행복과 해탈에 이르는 다양한 방법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가면 행복과 해탈을 이룰 수 있을까요? 그것은 폭류처럼 흐르는 마음을 잘 다스려 걸림이 없는 삶을 누리는데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천근 만근이나 되는 업장을 소멸하고 윤회의 사슬을 끊어내어 자유로운 삶을 영위하는 데서 불자로서의 삶의… 불교 첫걸음 계속 읽기

초기경전 (11)잡아함경

『잡아함경(雜阿含經. Samyuktagama)』은 불교의 교리와 설법의 모체가 되는 경으로 알려져 있다. 네 가지 아함경 중에서도 『잡아함경』의 위치가 가장 탁월하다고 한다. 문체의 조직이 가장 잘 되었으며, 기초교리를 이론화하는데 있어서 논리적 근거가 되는 설법의 내용을 가장 많이 가지고 있는 경전이다. 한역으로는 구나발타라(求那跋陀羅, Gunabhadra)가 번역한 50권 본(本)이 가장 완비된 것이라 한다. ‘잡아함’이라 하는 것은 이것저것 서로 관련된 교설을 차례로 배열하여 묶었다는 뜻에서 붙여진 말이다. 『아함경』이 모든 경전의 원전 구실을 하는 경이라고 앞서 언급했지만 특히 『잡아함경』에 설해진 내용이 가장 명쾌하여 교리를 이해하는 데 있어 탁월하다고 한다. 부처님이 세상에 계실 때의 인연과 그 당시의 사정, 그리고 부처님이 어떻게 사부대중(四部大衆)을 교화했다는 것을 가장 사실적으로 알 수 있는 경은 『잡아함경』이 으뜸이다. 50권(1362경) 속에 두 가지의 소경이 있어 짤막짤막한 법문을 엮어 이룩된 이 경은 불교 입문의 필독서라고 할 수 있다.

교리 사상의 연원으로서 이 경을 살펴볼 때 오취온(五取蘊)에 항일(恒一)·주재성(主宰性)이 없다고 주장한 무아설(無我設)이 주축이 되면서 무상한 것은 괴로운 것이고 괴로운 것은 진정한 ‘나’가 아니라고 설하고 있다. 또 연기법을 가장 구체적으로 설하여 부처님의 깨달음의 내용이 12연기라 하였다. 이 중 무아설은 불교 특유의 교리사상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내가 없다는 말이 무슨 뜻인가? 우리가 ‘나’라고 하는 것은 끊임없이 변하고 있는 물질적, 생물학적, 또는 정신적인 현상의 집합체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육체라고 하는 것은 몇 개의 물질적인 요소들의 모임이고 정신이라고 하는 것은 감각기관들과 그것에 해당하는 대상들 간의 접촉에서 발생되는, 끊임없이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고 하는 하나의 현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잡아함경』에서는 이와 같은 인간의 존재를 수레에 비유해서 설명하고 있다. “여러 가지 재목을 한 곳에 모아 세상에서 수레라 일컫는 것처럼 모든 쌓음의 인연이 모인 것을 거짓으로 중생이라 부르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들 존재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요소들은 끊임없이 변한다. 그리고 그것들은 어떠한 실체도 가지고 있지 않다. 『증일아함경(增一阿含經)』에서는 ‘몸뚱이인 색(色)은 모인 물거품 같고, 느낌인 수(受)는 떠 있는 거품 같으며, 생각[想]은 아지랑이 같으며, 지어감인 행(行)은 마치 파초 같으며, 의식[識]은 허깨비의 법과 같다. 이와 같은 요소들로 이루어져 있는 존재 속에서는 고정·불변적인 실체가 없다’고 하였다.

『잡아함경』 11권 속에서는 난다카 비구가 비구니들에게 등불의 비유로써 무아의 이치를 설명하는 대목이 있다. 비유하면 기름과 심지로 인하여 등불은 타게 된다. 그러나 그 기름은 덧없고 심지도 덧없으며, 불도 또한 덧없고 등잔도 또한 덧없는 것이다. 그런데 만일 어떤 사람이 기름도 없고 심지도 없으며 등잔도 없더라도 그것들을 의지하여 일어나는 등불 빛은 언제나 변하거나 바뀌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이 말이 항상하여 옳은 말이라 하겠는가? 우리들의 존재 속에서 고정불변적인 어떤 것을 찾으려고 하는 것은, 마치 어떤 사람이 파초를 보고 재목으로 쓸 수 있다고 생각하여 잘라내어 껍질을 벗기고, 단단한 나무와 같은 알맹이를 찾으면서 다 벗겨 보아도 단단한 것은 도무지 없는 것과 같다고 비유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지안스님강의. 월간반야 2003년 7월 (제32호)

초기경전 (10)증일아함경

『아함경』을 중심으로 설해진 부처님 설법에는 악도에 관한 이야기가 자주 나온다. 나쁜 행위 곧 악업을 지으면 악도에 간다는 다분히 어린아이들을 가르치는 듯한 훈몽적인 교훈을 많이 설하고 있다. 이것은 불법 수행이 그만큼 윤리의식을 함양해서 이것을 더욱 고취시켜 나갈 때 수행이 완성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러한 악도의 이야기들은 사람이 죽어서 가는 사후의 세계로 설명되는데 이러한 것을 이론으로 정리해서 설해 놓은 것이 바로 윤회설(輪廻說)이다.

윤회란 범어 ’Samsara’를 번역한 말로 그 어원의 뜻은 ‘함께 흐른다’는 뜻이다. 일반적으로 이해되는 윤회의 개념은 사람이 나고 죽는 생사를 거듭한다는 뜻이다. 곧 생을 이어가면서 생사를 반복하고 있는 것을 윤회라 한다. 이 윤회설은 불교의 고유한 설이 아니고 힌두교를 비롯한 인도의 고대 사상에 공통적으로 설해져 오던 이론이다. 뿐만 아니라 서양의 사상에도 부분적으로 윤회설과 함치되는 설이 있다. 피타고라스의 사상에도 윤회설이 등장한다.1) 윤회의 이론에 의하면 한 개인에게 있어서 현재의 생은 전체의 생 가운데 하나의 생이라는 것이다. 하나의 생은 이 육신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의 시간적인 제한이 분명하지만 전체의 생은 시간적인 시종을 말할 수 없는 무한생(無限生)이라는 것이다. 흔히 무시생래(無時生來)란 말이 한역 논장에 자주 나오는데 시작 없이 태어나 생사를 거듭해 온 이래라는 뜻이다. 윤회라는 강물에서 한 물결에 불과한 것이 개인의 한 생애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윤회란 한 인간이 죽은 후에 그가 지은 전생의 업에 의하여 새로운 모습으로 태어나게 되어 거듭 생을 누리게 된다는 뜻이다.

업(業)은 범어의 ‘Karma’를 번역한 말인데 행위의 결과로 남는 어떤 잠재적인 힘이 있어 다음의 과보를 불러오게 되는 것을 말한다. 『바가바드기타(Bagavadgita)』2)라는 인도의 고전 책에는 이런 말이 있다. “태어난 자는 틀림없이 죽는다. 그리고 죽은 자는 틀림없이 다시 태어난다. 다시 몸을 받는 영혼은 낡은 육체를 버리고 새 육체로 바꾸어 입는다. 마치 어떤 사람이 헌 옷을 버리고 새 옷을 바꾸어 입는 것처럼.”

이 말에서도 역시 윤회의 이치를 명료하게 설해 놓고 있다. 그런데 이 윤회설에서 중생이 죽어 다시 생을 받는 곳을 보통 여섯 곳으로 설명하여 육도윤회(六道輪廻)를 한다고 한다. 인간에서 업을 지어 그 과보를 받는 곳이 인간이 아닌 다른 곳이 있다는 것이다. 육도(六道)는 인간을 중심으로 하여 제일 나은 세계인 천상이 있고 나쁜 곳인 지옥이 있는데 그 외에 아귀(餓鬼), 축생(畜生), 아수라(阿修羅)가 있다. 인간으로서 한 생을 산 사람이 다음 생에는 천상에 가 태어나는 수가 있는가 하면 지옥에 가서 태어나는 수도 있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물론 아귀도나 축생도에도 태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생을 바꾼다 하여 전생(轉生), 곧 전환되는 생이라 한다. 육도윤회(六道輪廻)는 생을 바꾸면서 업의 과보로 여섯 갈래의 세계를 왔다 갔다 한다는 것이다. 사람이 이 마을 저 마을로 이사를 다니면서 살 듯 이 생이 바뀔 때마다 육도를 순회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무엇이 육도를 윤회하게 하느냐 하면 그 윤회의 주체를 초기불교에서는 업이라 하였다. 업이란 다시 말을 하자면 범어의 ‘Karma’를 번역한 말로 ‘행위’라는 뜻을 지닌 말이다.

『중아함경』에 나오는 부처님 말씀이 있다. 어떤 바라문이 부처님께 질문을 한다. “고오타마여! 어떤 인연으로 저 중생들이 다 같은 사람의 몸을 받았으면서도 지위가 높고 낮으며, 얼굴이 예쁘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며, 명이 긴 사람이 있는가 하면 목숨이 짧은 이도 있고, 병이 많은 이가 있는가 하면 적은 이가 있고, 부자가 있는가 하면 가난한 사람이 있고, 나쁜 지혜를 가진 이와 착한 지혜를 가진 이가 있습니까?”

다시 말하면 인간세상의 차별이 왜 있느냐는 질문을 하였다. 이에 대해 부처님은 단 한마디로 그것은 모두 전생에 지은 업 때문이라고 하였다. 업이 좋으면 좋은 과보를 받고 업이 나쁘면 나쁜 과보를 받는 이치는 인과의 법칙이다. 인간의 현실 속에서 나타나는 갖가지 차별을 업의 차이, 과거에 행했던 습관의 차이라고 설명하는 것은 무척 합리적인 이론이다. 모든 존재하는 현상의 상태를 과거에 이미 만들어졌던 업의 결과로 설명하여 인간의 길흉화복(吉凶禍福)에 이르기까지를 모두 그 원인을 과거를 소급하여 해명해 주는 이론이기 때문이다.

삼세 인과(三世因果)를 설명하는 말에 전생을 알려고 하거든 금생(今生)이 받고 있는 것을 살피라는 말이 있다. 곧 과거의 원인에서 현재의 결과가 오고 현재의 원인에서 미래의 결과가 온다는 뜻이다. 윤회설이 인류 역사에 끼친 영향이라면 인간에게 삶을 순리적으로 살아가게 하는 정신적인 여유를 준 사상이라고 볼 수 있다. 특히 인도에서 발생한 여러 종교·철학사상에 있어서 윤회설은 너무나 핵심적인 것이다. 만약 윤회설이 없다면 인도의 종교와 사상은 존재할 가치를 잃어버리게 된다. 왜냐하면 인도의 모든 종교와 철학의 목적이 윤회에서 벗어나는 일, 달리 말하면 해탈을 얻는데 그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이 윤회사상은 또한 인생의 의미를 무한히 확대하여 그 뜻을 한없이 넓혀 놓은 사상이라 할 수 있다.

지안스님강의. 월간반야 2003년 6월 (제31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