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소나무의 철학

내가 사는 반야암 주위에는 아름드리 소나무가 많이 있다. 영축산 정상을 향하여 산등성이를 올라가면서 층층이 서 있는데, 처음 이 암자를 지었을 때 무엇보다도 이들 굵은 소나무들이 주위의 경치를 살려 주는데 매우 만족해했다. 암자 이름을 짓는데도 소나무를 넣어 송진암(松眞庵)이라 부를까 하다가 반야암(般若庵)으로 했다. 옛날 중국 당나라 때 반사정(潘師正)이 소요곡(逍遙谷)에 은거하고 살 때 그의 고준한 인품을 들은 고종이 부른 적이 있었다. 나라의 중요한 소임을 맡겨 중용할 생각으로 왕이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때 반사정은 “울창한 소나무와 맑은 샘이 있으면 족합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가끔 이 고사를 생각하면서 소나무를 벗하여 사는 내가 무척 행복하다고 스스로 자위한 적이 많았다.

금년 겨울을 지내면서 나는 소나무한테서 새롭게 배운 것이 있다. 소나무가 참으로 훌륭한 나무라는 것을 새삼 느꼈다. 우리는 보통 소나무가 목재의 가치로써 훌륭하거나 정원용 관상수로써 훌륭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충분히 알고 있다. 어떤 거사님은 반야암 마당가에 서 있는 우람한 소나무를 보고 “스님. 이 소나무가 부잣집 정원에 서 있는 나무라면 값이 수억 원이 될 것입니다”라고 말한 적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소나무의 유용한 상업적 가치를 가지고 소나무를 논한다는 것은 너무 세속적인 이야기 밖에 되지 않는다. 어쩌면 소나무에게 큰 실례가 될 것이다.

내가 소나무에 대해 새로운 것을 발견한 것은 추위가 맹위를 떨치는 한밤중이 넘어선 시간이었다. 나는 가끔 한밤중에 깨어 있으면서 사색을 즐기는 습관을 가지고 있다. 내가 좋아하는 하루의 시간은 축시(丑時)의 시간이다. 물론 이 시간은 대부분의 사람들의 경우 깊은 수면에 빠져 있을 시간이다. 하지만 나는 이 시간에 깨어 책을 보거나 명상 혹은 좌선을 할 때가 자주 있다. 예로부터 하늘과 땅과 사람이 깨어나는 시간이 각각 따로 있다고 하였다. 하늘이 자시(子時)에 깨고, 땅이 축시(丑時)에 깨어나며 사람은 인시(寅時)에 깬다고 하였다. 천(天)·지(地)·인(人)의 삼재(三才)차례로 깨어 세상이 운행된다는 것이다. 당나라 때 고승 규봉(圭峰)스님의 좌우명에도 “인시에 일어나 할 일을 챙긴다(寅時可辦事)”고 하였다.

산에는 밤중에도 산바람이 일어난다. 특히 겨울은 칼날 같은 바람이 산골짜기를 타고 내려올 때가 많다. 우우우 불어오는 바람소리만 들어도 저절로 한기가 느껴진다. 이때 소나무에도 송뢰가 인다. 하지만 소나무 가지를 스치는 이 겨울의 찬바람이 소나무에겐 가장 반가운 소식이 된다.

사실 이 때를 당하여 소나무는 자기의 기상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말하자면 소나무의 몸 단련 운동이 시작되는 것이다. 처음에 나는 소나무가 혹한에 시달리며 우는 줄 알았다. 우우우 가지가 흔들리며 차가운 밤하늘을 향해 함성을 지르는 줄 알았다. 그러나 여러 밤을 지켜본 나는 소나무는 결코 추위에 울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다. 사람의 마음이 추워져서 소나무가 춥다고 생각할 뿐 소나무에겐 추위가 없는 것이다. 또 소나무는 잠이 없이 언제나 깨어 있는 나무라는 사실도 나는 알았다. 삼라만상이 고요해진 정묵(靜默)을 두고 우리는 때로 산이 잠들고 땅이 잠든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산은 잠들 때가 없으며 적어도 소나무는 겨울밤을 자지 않는다. 나무의 생태로 말하면 겨울을 나면서 나이테가 생기니 나무도 동면기가 있다고 식물학적으로는 말하겠지만, 소나무와 같이 살아본 나의 경험으로는 비록 소나무가 선잠을 자는지도 모르지만, 겨울의 밤을 소나무는 자지 않고 새는 산의 불침번이라는 사실을 충분히 알게 되었다. 소유를 떠나 산지기가 산의 주인이라면 소나무는 확실한 산의 주인이다. 소나무가 산림의 왕격이라서 주인이 아니라, 소나무처럼 확실하게 산을 지켜주는 그 무엇도 없다. 소나무를 군자의 절개를 상징하는 나무라고 말해왔듯이, 소나무가 있어서 산이 살아나고 소나무의 정신이 산의 미학을 꾸미는 것이다.

수도자들의 정신을 서리를 견디는 소나무에 비유해서 상송결조(霜松潔操)라 하였다. 서리를 견디는 소나무의 청결한 지조, 이것이야말로 가장 아름다운 정신이다. 이 소나무의 정신을 본받아 소나무처럼 살아가는 철학을 배워야 하겠다. 세상을 지조 있게 살고 고난에 물러나는 약한 의지가 아닌 추위를 모르고 사는 소나무처럼, 강한 정신으로 살아가는 자기 신념을 확실하게 해 둘 필요가 있다.

한 가지 소나무에게도 슬픔이 있다. 지난 20년 동안 우리나라에 소나무가 무려 33%나 줄어들었다고 한다. 지구온난화로 인한 기후 변화 곧 아열대성의 기후변화 탓에 침엽수인 소나무가 서서히 줄어들어 소멸될 위기에 처했다고 한다. “소나무야! 어떻든 살아남아 이 강산을 끝까지 지켜다오.”

지안스님 글. 월간반야 2004년 2월 제39호

강이 있으면 다리가 있다.

인생을 흘러가는 강물과 같다고 비유해 말한 것은 예로부터 자주 써온 말이다. 때로는 세월을 강물에 비유하기도 하였고, 불교에서는 윤회를 강물에 비유하여 말하기도 한다. 이는 윤회라는 말의 어원인 범어 삼사라(samsara)에 ‘함께 달러간다’는 뜻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물이 모여 줄기를 이루어 흘러가듯이 생사의 흐름이 언제나 강물처럼 흘러간다는 것이다.

강물이 흘러간다는 것은 멈추지 않는 진행의 상태가 계속되어 다시 돌아오지 못한다는 것과 함께 변해가는 무상을 암시해 주는 말이다. 사바세계를 고해라 하고 중생을 괴로움의 강물 속에 빠져 있는 존재로 보는 것이 불교의 종교적 관점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강물에 휩쓸려 떠내려가지 말고 강에서 나오게 하는 것을 제도(濟度)라 한다. 제도라는 말은 ‘강을 건넜다’는 뜻이다. 불교의 이상을 강을 건너 저쪽 언덕에 이르는 도피안(到彼岸)이라고 하며 범어로는 바라밀다(paramita)라 한다. 『반야심경』의 끝에 반야바라밀다주가 설해져 있는데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의 어원의 뜻을 풀이해 보면 ‘가세, 가세. 저 언덕으로 가세. 저 언덕으로 함께 가세. 어서 생사의 강을 건너 깨달음 이루세’의 뜻이다.

지구상의 육지에는 많은 강이 있다. 물이 모여 흐르는 강, 이 강변에서 인류의 문명이 시작되었다. 세계사에 있는 문명의 발상지가 모두 강변이다. 중국에는 황하문명이 있었고 인도에는 인더스문명이 있었다. 이집트의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모두 강가에서 시작된 문명이라고 역사가들이 기술해 왔다. 문명의 발상지인 강이 건너야 할 대상으로 등장하는 것은 강이 있으면 사람들이 그 강을 건너도록 다리를 놓는 문화를 창출하기 때문이다. 강이 있으면 다리가 있다. 지구상에 있는 어떤 강도 다리 없는 강이 없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작은 시내에도 다리가 놓이며, 옛날에는 물을 건너기 위하여 징검다리를 놓기도 했다.

강을 건너기 위하여 다리를 놓는 것처럼 인생도 건너야할 강이 있으며, 또 놓아야할 다리가 있다. 이것이 바로 인생의 운명적 삶이다. 우리는 강 건너는 것을 싫어하거나 회피할 수가 없으며, 다리를 놓는 것을 외면할 수가 없다. 인생이 갖는 모든 사연이 시간의 흐름을 따라 진행되고 있는 하나의 통과 과정이라면 우리가 만나는 인연자체도 통과하는 의식(儀式)에 불과하다. 만나고 헤어지는 것이 통과의식이요, 태어나고 죽는 것도 하나의 통과의식이다. 그리고 통과는 결국 무상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기차가 터널 속으로 들어가 달리듯이 무상 속으로 들어가 달린다는 것은 머무를 수 있는 자유를 상실하는 불안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무상한 것은 곧 괴로운 것이라고 부처님은 말씀 하셨다. 때문에 인간은 원초적인 향수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무상에 대한 연민을 가지고 영원에 대한 그리움을 갖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괴로움에 대한 동정이 되며, 즐거움에 대한 소망이 된다. 이 소망 하나로 인간은 영원을 바라보게 된다. 먼 하늘을 바라보듯이, 먼 수평선을 바라보듯이 인간은 자신의 그리움을 멀리 멀리 보내며 살고 있는 것이다. 하늘을 쳐다보지 않고 고개를 숙여 땅만 보고는 도저히 살 수 없다.

아스라한 하늘을 바라보는 자는 그리움이 있다. 먼 수평선을 바라보는 사람도 그리움이 있다. 이 그리움이 다른 게 아니다. 강을 건너고 싶은 마음이다. 바다를 건너 수평선 너머 멀리 가보고 싶은 마음이다. 내 존재를 엮어 흐르는 운명의 강을 건너고 싶어 하는 애절한 그리움, 이것이 바로 때로는 천부의 고독이 되기도 하고 몸살 나게 슬픈 눈물이 되기도 한다.

바라밀다의 정신이라는 게 있다. 강을 건너고 싶어 하는 마음이다. 성숙된 모습으로 자신의 삶을 사는 이상적인 인간형인 보살들은 바라밀다의 정신으로 사는 사람들이다. 이 사람들은 강을 건너 주는 다리 역할을 하기로 자처한다. 하늘과 땅 사이에서, 때로는 그저 사람 사이에서 강이 막혀 건너지 못하는 사이가 있을 때 다리를 놓아 준다. 어떤 때는 스스로가 다리가 된다. 자신을 밟고 강을 건너도록 다리가 되어 사람들을 저 언덕에 가게 해 준다. 거친 파도가 일고 있는 강을 건너 존재의 평화를 성취시켜 주는 다리와 같은 사람들이야 말로 정말 세기의 다리요, 세상의 다리다.

한 때 유행하던 팝송 ‘험한 세상에 다리가 되어’라는 노래가 있었다. 지금도 애창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이 노래에 나오는 가사에 이런 구절이 있다.

“그대가 지치고 힘없이 느껴질 때나

그대 눈동자에 눈물이 고일 때,

내 눈물 닦아 주며 그대 곁에 있으리.

고통이 몰려와 친구마저 찾을 길 없을 때

거친 물결 위의 다리가 되어

내 그대 지켜 주리라.”

연인 사이의 사랑을 주제로 한 노래이지만 이 노래의 가사가 참 아름답다. 인생은 모름지기 다리와 같고 나룻배와 같은 마음이 있어야 함께 고난의 강을 건너갈 수 있다.

지안스님 글. 월간반야 2006년 10월 제71호

육조혜능(六祖慧能)의 돈교법문(頓敎法門)

① 돈교(頓敎)의 불이법문(不二法門)

시장에서 나무를 팔다가 <금강경>의 구절을 듣고서 깨달음을 얻은 혜능은 기주(蘄州)의 황매산(黃梅山)으로 오조홍인(五祖弘忍)을 찾아가 8개월만에 오조가 설법하는 <금강경> 구절을 듣고서 다시 크게 깨달았다. 깨달음을 얻은 혜능이 오조에게서 물려받은 것은 달마(達磨)에게서 전해 온 돈교(頓敎)와 의발(衣鉢)이었다. 옷과 발우는 돈교를 전해받았다는 신표이니, 옷과 발우가 나타내는 내용은 바로 돈교이다. 혜능이 돈교를 받은 까닭은 오조가 말해주는 <금강경> 구절을 듣고서 문득 깨달아 온갖 법이 자성에서 벗어나지 않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때 혜능이 오조에게 자신의 깨달음을 말한 구절이 <육조단경>에는 이렇게 실려 있다.

“어찌 자성이 본래 깨끗함을 기대했겠습니까?

어찌 자성이 본래 생멸(生滅)하지 않음을 기대했겠습니까?

어찌 자성이 본래 모자람 없이 완전함을 기대했겠습니까?

어찌 자성이 본래 흔들리지 않음을 기대했겠습니까?

어찌 자성이 만법(萬法)을 만들어낼 수 있음을 기대했겠습니까?”

자성이 본래 깨끗하니 다시 닦을 필요가 없고, 자성이 본래 생겨나거나 사라지지 않으니 다시 생멸에서 벗어날 이유가 없고, 자성이 본래 모자람 없이 완전하니 보충해 넣을 것이 없고, 자성이 본래 흔들리지 않으니 고요함을 찾을 필요가 없고, 자성이 만법을 만들어내니 자성을 깨달으면 만법을 깨닫는 것이다. 견성(見性) 즉 자성만 깨달으면 그뿐, 달리 수행은 말하고 있지 않다. 이것이 돈교의 기본적 태도이다.

의발을 물려받은 뒤에 혜능은 한동안 사냥꾼들을 따라서 숨어 살다가 광주(廣州)의 법성사(法性寺)에서 <열반경>을 강의하는 인종(印宗) 법사(法師)를 만나 자신이 의발을 물려받은 육조(六祖)임을 밝혔다. 그때에 인종이 오조는 어떤 법을 가르치느냐고 혜능에게 묻는데, 혜능은 말하기를 “다만 견성(見性)을 말할 뿐이고, 선정(禪定)과 해탈(解脫)은 말하지 않는다.”라고 한다. 인종이 왜 선정과 해탈을 말하지 않느냐고 묻자, 혜능은 “(선정과 해탈을 말하면) 이법(二法)이기 때문에 불법(佛法)이 아니다. 불법은 불이법(不二法)이다.”라고 말한다. 다시 인종이 불이법이 무엇이냐고 묻자 혜능은 “불성은 선하지도 않고 선하지 않지도 않으니, 이것을 일컬어 불이(不二)라고 한다. 오온(五蘊)과 십팔계(十八界)를 범부는 둘로 보지만, 지혜로운 자는 그 자성(自性)에 둘이 없음을 밝게 안다. 둘이 없는 자성(自性)이 곧 불성(佛性)이다.”라고 한다.

자성은 둘이 없는 불이법이고, 불이법인 자성을 깨닫는 것이 돈교인 것이다. 세계의 모든 법의 자성은 둘이 없는 불이법이고, 세계의 온갖 법을 볼 때에 불이법으로 보는 것이 견성이다. 다만 언제나 어디서나 불이법을 보는 견성이 바로 돈교인 것이다. 불이이므로 당연히 선정을 닦아 해탈을 이룬다고 하지 않으며, 유루니 무루니 하고 나누지도 않으며, 유위니 무위니 하고 나누지도 않으며, 중생이니 부처니 하고 나누지도 않으며, 수행이니 깨달음이니 하고 나누지도 않는다. 언제나 모든 경우에 다만 둘로 분별됨이 없을 뿐이다. 그리하여 혜능은 이렇게 말한다.

“자성에는 잘못됨도 없고 어리석음도 없고 어지러움도 없다. 순간순간 반야로써 비추어보아 늘 법의 모습에서 벗어나 자유자재하게 마음대로 할 수 있는데, 세울 무엇이 있겠는가? 자성을 스스로 깨달으면, 문득 깨닫고 문득 수행하니[돈오돈수(頓悟頓修)], 점차(漸次)는 없다. 그러므로 어떤 법도 세우지 않는 것이다. 모든 법이 적멸(寂滅)한데 어찌 점차 닦을 일이 있겠는가?”

이처럼 돈교에선 문득 깨달음만 있을 뿐, 점진적인 수행은 없다. 문득 깨달아 불이법문(不二法門)에 들어가면, 만법을 대함에 언제나 불이법문 속에 있으니 늘 한결같고 차별이 없다. 그러므로 혜능은 이렇게 노래한다.

“바른 견해를 일러 출세간이라 하고,

삿된 견해를 일러 세간이라 한다.

삿됨과 바름을 모두 물리쳐 버리면,

깨달음의 본성은 완전하여 흠이 없다.

이 게송은 돈교(頓敎)이며,

또 큰 진리의 배라 부른다.

어리석게 들으면 오랜 세월이 걸리겠지만,

깨달으면 찰나 사이일 뿐이다.”

“지금 만약 돈교문(頓敎門)을 만난다면

문득 자성을 깨달아 세존(世尊)을 본다.

만약 수행을 하여 부처가 되고자 한다면

어느 곳에서 부처를 찾을 수 있겠는가?”

② 남돈북점(南頓北漸)

육조의 문하는 남종(南宗)이라 하였고 신수의 문하는 북종(北宗)이라 하였는데, 육조 문하의 선은 돈교(頓敎)이고 신수 문하의 선은 점교(漸敎)라고 하였다. 점교는 점차로 한 단계 한 단계 닦아 나아가서 마침내 깨닫는다는 뜻이고, 돈교는 닦음과 깨달음이 문득 이루어진다는 뜻이다. 점교에선 한 단계 한 단계 점차로 닦아 나아가는 수행의 과정을 거쳐야 하고, 돈교에선 수행의 과정 없이 문득 깨달음을 이룬다. 점교에선 깨달음을 얻기 위한 과정으로서의 수행이 곧 참선(參禪)이지만, 돈교에선 수행이 따로 없고 평상심(平常心)이 곧 도(道)이고 깨달음이 곧 참선(參禪)이다.

혜능 이전의 초조(初祖) 달마(達摩)에서 오조(五祖) 홍인(弘忍)까지의 중국의 선은 주로 좌선관행(坐禪觀行)의 수행을 말하는 점교(漸敎)였다. 좌선(坐禪)과 관법(觀法)을 통한 점수(漸修)를 말하는 북종 신수의 선은 이전의 전통을 충실히 계승하고 있는 것이다. 반면에 선정수행 없이 견성(見性)만 말하는 혜능의 돈교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선이다.

혜능은 스스로 선정수행을 통하여 깨달은 것이 아니었다. 혜능은 처음 시장에서 나무를 팔다가 <금강경>의 구절을 듣고서 곧장 깨달았고, 뒤에 오조홍인의 <금강경> 설법(說法)을 듣고서 더욱 확실한 깨달음을 얻었다. 신수가 “그는 스승 없이 지혜를 얻어서 최상승의 진리를 깊이 깨달았으니, 나는 그에게 미치지 못한다.”라고 말했듯이, 혜능은 스승인 오조의 법을 계승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깨달음에 의거한 법을 펼친 것이다. 오조홍인이 혜능을 인가한 까닭은 자신이 가르친 수행을 잘 실천해서가 아니라, 혜능이 법을 보는 안목이 바름을 인정하였기 때문이다. 깨달음을 얻어 법을 보는 안목을 갖추지 못하면, 아무리 수행을 잘 하더라도 불법(佛法)은 아닌 것이다.

<육조단경>을 통하여 북종의 가르침과 대비하여 혜능의 남종선(南宗禪)이 어떤 것인가를 살펴보자. 신수의 선은 사조도신(四祖道信)과 오조홍인(五祖弘忍)의 동산법문(東山法門)의 선을 계승하였으므로, 신수가 말하는 선은 이전까지의 전통적인 선법(禪法)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이에 반하여 혜능이 어떤 선을 말하는지를 살펴보면 혜능의 돈교법문(頓敎法門)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육조단경>에서 북종의 신수와 대비하여 혜능의 선을 말하는 부분은 대개 다음의 4가지이다.

㉮ 신수의 게송과 혜능의 게송

㉯ 인종 앞에서 견성을 말함

㉰ 지성의 질문에 답함

㉱ 설간의 질문에 답함

㉮ 신수의 게송과 혜능의 게송

오조가 문인들에게 각자 자신의 공부를 내어 보여라고 하였을 때에 신수가 쓴 게송은 다음과 같다.

“몸은 깨달음의 나무요

마음은 밝은 거울과 같다.

늘 부지런히 털고 닦아서

먼지가 붙지 않도록 하라.”

신수의 이 게송에 대하여 혜능이 쓴 게송은 다음과 같다.

“깨달음에는 본래 나무가 없고

밝은 거울도 대(臺)가 아니다.

본래 한 물건도 없는데

어느 곳에 먼지가 붙겠는가?”

이 두 게송의 차이는 앞 2구와 뒤 2구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앞 2구에서 신수는 깨달음의 열매가 열리는 나무로써 몸의 존재를 말하고, 밝은 거울과 같은 마음의 존재를 말했다. 반면에 혜능은 몸과 마음이라는 두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뒤 2구에서 신수는 늘 부지런히 닦아서 먼지가 붙지 않도록 하라고 하여 끊임없는 수행을 말했다. 반면에 혜능은 본래 한 물건도 없는데 어느 곳에 먼지가 붙겠는가라고 하여 수행을 부정하고 있다.

마음이라는 존재를 인정함도 분별이요, 마음을 더럽히지 않고 깨끗이 하기 위하여 닦아야 한다는 것도 분별이다. 그러므로 신수는 분별 속에 있는 사람이다. 반면에 애초에 마음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으니 분별이 없고, 마음이 없으니 더럽거나 깨끗하다는 분별도 없다. 그러므로 혜능은 분별을 벗어나 있다. 분별 속에서 깨끗함과 더러움을 나누어 하나하나 닦아 나아가는 것이 신수의 점수(漸修)요, 애초에 분별이 없어서 곧장 아무 일도 없는 것이 혜능의 돈오(頓悟)이다.

㉯ 인종(仁宗) 앞에서 견성을 말함

육조혜능이 오조홍인(五祖弘忍)에게 법을 전해 받고서 15년간 사냥꾼을 따라 숨어살다가 비로소 법을 펼치려고 광주(廣州) 법성사(法性寺)에 모습을 드러내었을 때에, 법성사 주지인 인종(仁宗) 법사가 혜능을 알아보고서 물었다.

“황매산의 오조(五祖)께서는 법을 부촉하실 때에 어떻게 가르쳐주십니까?”

혜능이 말했다.

“가르쳐 주시는 것은 없습니다. 다만 견성(見性)을 말할 뿐이고, 선정(禪定)과 해탈(解脫)은 말하지 않습니다.”

인종이 물었다.

“왜 선정과 해탈을 말하지 않습니까?”

혜능이 말했다.

“이법(二法)이기 때문에 불법(佛法)이 아닙니다. 불법은 불이법(不二法)입니다.”

인종 법사가 또 물었다.

“어떤 것이 불법(佛法)이 불이법이라는 것입니까?”

혜능이 말했다.

“법사께서 <열반경>을 강설하시면서 밝게 불성(佛性)을 보시는 것이 곧 불법이 불이법인 것입니다. … 불성은 선하지도 않고 선하지 않지도 않으니, 이것을 일컬어 불이(不二)라고 합니다. 오온(五蘊)과 십팔계(十八界)를 범부는 둘로 보지만, 지혜로운 자는 그 자성(自性)에 둘이 없음을 밝게 압니다. 둘이 없는 자성(自性)이 곧 불성(佛性)입니다.”

“다만 견성(見性)을 말할 뿐이고, 선정(禪定)과 해탈(解脫)은 말하지 않는다.”라 하고, 그 까닭을 묻는 질문에 “선정과 해탈은 이법(二法)이기 때문에 불법(佛法)이 아니다. 불법은 불이법(不二法)이다.”라 하고, 또 “밝게 불성(佛性)을 보는 것이 곧 불법이 불이법인 것이다.”라 하고, 또 “둘이 없는 자성(自性)이 곧 불성(佛性)이다.”라고 하였다. 혜능의 이 말은 곧 혜능이 확립한 남종선(南宗禪)의 성격을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혜능이 말하는 요점은 다음 두 가지이다.

첫째, 다만 견성(見性), 즉 불이법(不二法)인 불성(佛性)을 보는 깨달음을 말할 뿐이다.

둘째, 불법(佛法)은 불이법이고, 이법(二法)은 불법이 아니다.

<육조단경> 전체의 내용이 단지 이 두 가지 주제를 말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혜능은 오직 견성(見性)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불성(佛性), 자성(自性), 본성(本性)은 불이중도(不二中道)의 다른 이름이고, 선(禪)은 불이중도를 깨달아 언제나 불이중도의 눈을 가지고 삼라만상을 바라보는 것이다. 선정(禪定), 해탈(解脫), 열반(涅槃), 반야(般若), 보리(菩提) 등 불교의 모든 용어들은 단지 불이중도인 견성을 다양한 측면에서 말하는 것일 뿐, 제각각 차별되는 이름의 법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오직 불이중도인 견성이 있을 뿐이다.

어떤 이름이나 어떤 일이라고 하더라도 분별되는 상(相)을 따라 다르게 본다면 이법(二法)으로서 견성이 아니고 불법이 아니다. 선(禪)은 언제나 어디서나 단지 불이법인 불성을 보는 견성을 말할 뿐이다. 견성성불(見性成佛)이라고 하듯이 견성은 곧 깨달음이다. 선은 단지 깨달음을 말할 뿐인 것이다. 이것은 선의 단적인 특징을 말하고 있다. 선은 모든 차별을 당장 적멸해 버리고 다만 불이법인 깨달음을 말할 뿐이다. 언제나 어느 곳에서나 단지 불이법인 법성(法性)을 볼 뿐이다. 선정수행과 해탈을 말하지 않고, 유위(有爲)니 무위(無爲)니 유루(有漏)니 무루(無漏)니 하는 여러 가지 차별을 말하지 않고 곧장 둘 아닌 불성을 말할 뿐이다.

이처럼 혜능의 선은 깨달은 자의 입장에서 깨달은 자의 눈으로 바라보는 세계를 말할 뿐이다. 깨달은 자에게는 자신과 세계가 둘이 아니고, 안과 밖이 차별되지 않고 하나이다. 세계가 곧 자기자신이고, 마음이 곧 세계이다. 온갖 차별되는 모습들이 그대로 차별 없는 하나이고, 차별 없는 하나가 그대로 삼라만상의 세계이다. 한 물건도 법이라거나 마음이라고 할 것이 없으니, 차별되는 모습에서 벗어나 불이중도를 실현했기 때문이다. <육조단경>에 실린 혜능의 말에는 다양한 불교의 일들에서 오로지 불이중도에서 벗어나지 않는 혜능의 깨달음이 일관되게 드러나 있다. 남종돈교에선 단지 견성을 말할 뿐이다.

㉰ 지성(志誠)의 질문에 답함

<단경>에는 북종 신수가 파견한 지성(志誠)과 혜능의 대화가 나온다. 여기에서 혜능은 북종과는 다른 남종의 돈교법문을 자세히 말하고 있다.

육조(六祖)가 북종(北宗) 신수(神秀)의 제자인 지성(志誠)에게 물었다.

“너의 스승은 어떻게 대중에게 법을 보여주느냐?”

지성이 말했다.

“늘 대중에게 가르치시길, ‘마음을 쉬어 깨끗함을 보고,[주심관정(住心觀淨)] 오래 앉아서 눕지 말라.’[장좌불와(長坐不臥)]라고 하십니다.”

육조가 말했다.

“마음을 쉬어 깨끗함을 보는 것은 병(病)이지 선(禪)이 아니다. 늘 앉아서 몸을 구속하면 도리(道理)에 무슨 이익이 있겠느냐? 나의 게송을 들어라.”

“살아 있을 때에는 앉아서 눕지 못하고

죽어서는 누워서 앉지를 못하네.

더러운 냄새나는 육신을 한결같이 붙잡고서

어떻게 공부가 되겠는가?”

지성은 북종의 가르침은 ‘마음을 쉬어 깨끗함을 보고,[주심관정(住心觀淨)] 오래 앉아서 눕지 말라.’[장좌불와(長坐不臥)]는 말로써 요약하고 있다. 오래 앉아서 눕지 않는 장좌불와란 곧 좌선(坐禪)이고, 좌선 속에서 행하는 마음 공부는 마음의 잡념을 쉬고 텅 비고 깨끗한 마음을 보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혜능은 말하길 “마음을 쉬어 깨끗함을 보는 것은 병(病)이지 선(禪)이 아니다. 늘 앉아서 몸을 구속하면 도리(道理)에 무슨 이익이 있겠느냐?”라고 하고서, 육체를 붙잡고 앉아서 눕지 않는 것을 공부로 삼는 것을 통렬하게 비난하고 있다. 좌선(坐禪)하여 관심(觀心)하는 것을 선(禪)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다시 육조는 신수대사가 계정혜(戒定慧) 삼학(三學)을 어떻게 가르치는가 하고 물었다.

지성(志誠)이 말했다.

“신수대사께서는 모든 악한 행동을 하지 않는 것을 계(戒)라 하시고, 모든 선한 일을 받들어 행하는 것을 혜(慧)라 하시고, 스스로 그 뜻을 깨끗하게 하는 것을 정(定)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분의 말씀은 이와 같습니다만, 스님께서는 어떠한 법을 가지고 사람을 깨우쳐주십니까?”

육조가 말했다.

“내가 만약에 사람에게 줄 법이 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너를 속이는 것이다. 다만 경우에 따라서 얽매인 것을 알맞게 풀어주는 것을 거짓 이름하여 삼매(三昧)라고 한다. 너의 스승이 말하는 바와 같은 그런 계․정․혜는 진실로 알 수 없는 것이다. 내가 보는 바의 계․정․혜는 그와는 다르다.”

신수는 계정혜를 과거칠불(過去七佛)이 불교의 요점을 공통으로 말했다고 하는 칠불통계게(七佛通戒偈)를 빌어서 말했다. 그런데 악한 행동을 하지 않고, 선한 행동을 하고, 생각을 깨끗하게 한다는 것은 모두 이분법 속에서 취하고 버리는 유위의 행위이고 조작하여 무엇을 이루려는 행위이다.

이에 대하여 혜능은 매우 다른 말을 하고 있다. 사람에게 줄 만한 법이 있다고 말한다면, 그것을 그 사람을 속이는 짓이다. 혜능은 주고 받을 것이 없고, 얻고 잃을 것이 없는 불이법(不二法)을 말하고 있다. 혜능은 다시 말하기를, “경우에 따라서 얽매인 것을 알맞게 풀어주는 것을 거짓 이름하여 삼매(三昧)라고 한다.”라고 하는데, 이것은 모든 불교의 가르침이 어리석은 분별과 집착에서 풀어주는 방편임을 말한 것이다.

신수에게는 불교라는 이름의 견해를 가지고 불교다운 행위를 행하는 유위의 행동이 불교이지만, 혜능에게는 불교의 말과 행위가 모두 우리의 어리석음을 치유하는 약으로서 임시로 거짓 만들어 놓은 방편일 뿐인 것이다. 다들 불교를 방편이라고 하지만, 불교를 방편으로 보는 눈이 전혀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신수에게 불교라는 방편은 무언가를 세우고 만드는 방편이라면, 혜능에게 불교라는 방편은 다만 우리로 하여금 망상(妄相)의 꿈에서 깨어나게 하는 수단일 뿐이다. 얽매인 것을 풀어주는 일이 중요하지, 거짓으로 만든 이름인 삼매(三昧)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병을 치유하는 효험이 중요하지 약의 이름은 중요하지 않다. 그러므로 선에서는 사람을 일깨워줌에 전통적인 불교의 말과 방식을 고집하지 않는다. 선(禪)을 격외선(格外禪)이라고 하듯이, 분별망상에서 풀어주는 방편을 상대에 알맞게 어떤 격식에도 구애됨 없이 자유자재하게 사용하는 것이 불교와는 다른 선의 특징이다.

지성이 말했다.

“계·정·혜는 다만 한 종류가 있을 뿐인데, 어떻게 또 다른 종류가 있겠습니까?”

육조가 말했다.

“너의 스승이 말하는 계․정․혜는 대승(大乘)의 사람들을 교화하는 것이고, 내가 말하는 계․정․혜는 최상승(最上乘)의 사람들을 교화하는 것이다. 깨달음이 같지 않고, 자성을 보는 것에도 빠르고 늦음이 있다. 너는 내 말을 들어라. 같고 다름을 말해주겠다. 내가 말하는 법은 자성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본바탕에서 벗어나 법을 말하는 것을 일러 모습을 말한다고 하니, 자성에는 늘 어둡다. 모름지기 온갖 법들이 전부 자성에서 일어나 활동함을 아는 것이 바로 참된 계․정․혜의 법이다.”

신수가 말하는 계정혜는 대승의 사람들을 향한 것이고, 혜능이 말하는 계정혜는 최상승의 사람들을 향한 것이다. 대승의 사람과 최상승의 사람은 깨달음이 다르고 견성함에 늦고 빠름이 있다. 즉, 최상승 사람의 깨달음이 대승 사람보다 더 뛰어나고, 최상승 사람의 견성이 대승 사람보다 더 빠르다. 왜 이런 말을 할까? 신수가 말하는 깨달음과 견성은 점차적인 수행의 과정을 겪은 뒤에 얻을 목표이고, 혜능이 말하는 깨달음과 견성은 지금 바로 여기에서 즉각 분별심에서 벗어나기만 하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점수(漸修)와 돈오(頓悟)의 차이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혜능은 다시 “내가 말하는 법은 자성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라고 하여, 스스로 언제나 불이법인 자성에서 벗어나지 않음을 분명히 하였다. 그리고 법의 모습을 말하면 자성에는 늘 어둡다고 하였는데, 법의 모습을 말하는 것이 곧 분별이요 망상이다. 결국 혜능의 말은 계정혜라는 어떤 정해진 불법(佛法)이 있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불이법인 자성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이 곧 모든 불법이라는 말이다. 이처럼 언제 어디서나 단지 불이중도인 견성이 선이다. 선에서는 언제 어디서나 불이중도인 깨달음뿐이어서, 분별에 치우쳐 머물러 있는 사람을 언제나 분별에서 풀어내어 중도로 이끌어주는 것이 곧 선의 가르침이다.

다시 지성에게 말했다.

“네 스승이 말하는 계․정․혜는 작은 근기의 지혜를 자진 사람에게 권할 만한 것이고, 내가 말하는 계․정․혜는 큰 근기의 지혜를 가진 사람에게 권하는 것이다. 만약 자성을 깨닫는다면, 보리열반(菩提涅槃)도 세우지 않고 해탈지견(解脫知見)도 세우지 않는다. 얻을 만한 하나의 법도 없어야, 바야흐로 만법을 건립할 수 있다. 만약 이 뜻을 이해한다면, 불신(佛身)이라고도 말하고, 보리열반이라고도 말하고, 해탈지견이라고도 말한다. 견성한 사람은 세울 수도 있고 세우지 않을 수도 있으니, 가고 옴에 자유로와 머묾이 없고 장애가 없다. 인연에 응하여 행동하고, 말에 따라서 답을 하며, 온갖 조화를 두루 보면서도 자성을 떠나지 않는다면, 이것이 바로 자재신통유희삼매(自在神通遊戱三昧)를 얻은 것이니, 이름하여 견성(見性)이라 한다.”

자성을 깨달으면 어떤 법에도 얽매이지 않는다. 어떤 법이든 자유자재하게 세울 수도 있고 부술 수도 있지만, 본래 하나의 법도 없다. 하나의 법도 없으면서, 온갖 법을 세우기도 하고 부수기도 한다. 이러한 자유자재가 자성을 떠나지 않는 견성이요 불이중도이다. 온갖 경계 속에서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고 자유자재한 것이 바로 선이다. 선은 경계에 얽매인 사람을 풀어주어 자유롭게 하는 것이지, 경계를 세워 사람을 구속하는 것이 아니다.

지성이 거듭 육조에게 여쭈었다.

“어떤 것이 뜻을 세우지 않는 것입니까?”

육조가 말했다.

“자성에는 잘못됨도 없고 어리석음도 없고 어지러움도 없다. 순간순간 반야로써 비추어보아 늘 법의 모습에서 벗어나 자유자재하게 마음대로 할 수 있는데, 세울 무엇이 있겠는가? 자성을 스스로 깨달으면, 문득 깨닫고 문득 수행하니[돈오돈수(頓悟頓修)], 점차(漸次)는 없다. 그러므로 어떤 법도 세우지 않는 것이다. 모든 법이 적멸(寂滅)한데 어찌 점차 닦을 일이 있겠는가?”

우리의 자성은 본래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러므로 자성을 스스로 깨닫기만 하면 그뿐, 다시 점차로 수행할 것은 없다. 문득 깨닫고 문득 수행하여 한 순간 본래면목을 보면 그뿐이다. 본래 자성에는 얻을 수 있는 한 개의 법도 없다. 자성은 불이중도이니 모든 분별에서 벗어나 있는 것이다. 모든 분별에서 벗어난 적멸(寂滅)에서 어찌 점차로 닦아 나아가는 단계가 있겠는가? 이처럼 혜능의 돈교법문(頓敎法門)은 돈오돈수(頓悟頓修)이다. 한 순간 문득 깨달으면 바로 완전한 자성인 것이다.

㉱ 설간(薛簡)의 질문에 답함

설간(薛簡)이 말했다.

“서울에 있는 선승(禪僧)들은 모두 말하기를 ‘도를 알려고 한다면 반드시 좌선(坐禪)하여 선정(禪定)을 익혀야 한다. 선정으로 말미암지 않고 해탈을 얻은 자는 아직 없었다.’라고 하는데, 스님께서 말씀하시는 법은 어떻습니까?”

혜능이 말했다.

“도는 마음으로부터 깨닫는 것인데, 어찌 앉는 것에 있겠습니까? 경전에서 말했습니다. ‘만약 여래가 앉거나 눕는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삿된 도(道)를 행하는 것이다. 무슨 까닭인가? (여래는) 오지도 않고 가지도 않기 때문이다.’ 생겨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는 것이 여래의 깨끗한 선(禪)이요, 모든 법이 텅 비어 고요한 것이 여래의 깨끗한 좌(坐)입니다. 결국 깨달음도 없는데, 하물며 앉겠습니까?”

설간은 당나라의 서울인 장안(長安)에서 황제의 명을 받고 혜능을 찾아와 법을 물었다. 북쪽 장안의 선사들은 국사(國師)인 대통신수(大通神秀)의 제자들일 것이다. 설간은 장안에 있는 선사들의 주장을 ‘깨달으려면 반드시 좌선하여 선정을 익혀야 하니, 선정으로 말미암아 해탈을 얻는다.’라고 요약하여 말했다. 이 말은 북종의 선을 나타낸다. 이에 대하여 혜능은 ‘도는 마음에서 깨달으니 몸이 앉는 것과는 상관이 없다.’라고 말하여 좌선선정을 부정하고는, 생겨나지도 않고 사라지지도 않는 것이 선이고 텅비고 고요하여 한 물건도 없는 것이 좌라고 하는데, 이것은 곧 불이법문(不二法門)이 좌선이요 선정이라는 말이다.

설간이 말했다.

“제가 서울로 돌아가면 임금께서 반드시 물으실 것입니다. 원컨대 스님께서는 자비를 베풀어 마음의 요체를 가르쳐주십시오. 두 황궁과 서울에서 도를 배우는 사람들에게 전하겠습니다. 비유하면 하나의 등불이 수만 개의 등에 불을 붙이면, 모두 밝아져서 밝음이 끝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육조가 말했다.

“도에는 밝고 어두움이 없습니다. 밝고 어두움은 서로 상대(相對)하는 뜻입니다. 밝고 밝아 끝이 없다는 것 역시 끝이 있습니다. 상대하여 세운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유마경(淨名經)>에 이르기를 ‘법은 비교할 것이 없으니, 상대가 없기 때문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설간이 혜능의 도를 묻자, 혜능은 말하기를 도(道)란 다만 서로 상대가 없는 불이법(不二法)일 뿐이라고 했다.

설간이 말했다.

“밝음은 지혜를 비유하고, 어둠은 번뇌를 비유하는 것입니다. 도 닦는 사람이 만약 지혜로써 번뇌를 비추어 부수지 않는다면, 끝없는 생사윤회에서 무엇에 의지하여 벗어나겠습니까?”

혜능이 말했다.

“번뇌가 곧 깨달음이며, 둘이 없고 다름이 없습니다. 만약 지혜로써 번뇌를 비추어 부순다고 한다면, 이것은 이승(二乘)의 견해로서 양이나 염소 등의 근기입니다. 지혜가 뛰어난 대근기라면, 전혀 이와 같지 않습니다.”

설간이 말했다.

“어떤 것이 대승의 견해입니까?”

혜능이 말했다.

“밝음과 밝지 않음을 범부는 둘로 보지만, 지혜로운 자는 그 자성에 둘이 없음을 깨닫습니다. 둘 없는 자성이 바로 진실한 자성입니다. 진실한 자성은 어리석은 범부라고 줄어들지도 않고 현명한 성인이라고 불어나지도 않으며, 번뇌 속에서도 어지럽지 않고 선정 속에서도 고요하지 않습니다. 끊어지지도 않고 이어지지도 않으며, 오지도 않고 가지도 않으며, 중간에 있지도 않고 안팎에 있지도 않으며, 생겨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습니다. 자성과 모습이 한결같아 늘 머물러 변하지 않음을 이름하여 도(道)라고 합니다.”

밝은 지혜로써 어두운 번뇌를 부순다고 한다면, 이것은 분별 속의 말이고 불이중도의 말이 아니다. 범부와 소승(小乘)은 분별 속에 있지만, 대승(大乘)은 불이중도에 있다. 대승의 법은 언제나 불이법이다. 불이법이 참된 자성이다. 자성은 불이법이므로, 자성에는 번뇌와 해탈의 다름이 없고, 범부와 부처의 다름이 없고, 선정이 따로 없고, 안팎이 없고, 오고감이 없고, 생기고 사라짐이 없이 늘 한결같다.

③ 수행에 대한 혜능의 언급

<육조단경>에서 수행에 대한 혜능의 언급을 살펴보면, 혜능은 모든 수행에 대하여 언제나 불이법문인 견성의 입장에서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단계적인 수행은 없고, 언제나 불이법문인 견성(見性)이 있을 뿐이다.

㉮ 좌선선정이 아니라 견성이다

“무엇을 일러 좌선(坐禪)이라 할까요? 이 법문(法門) 속에서 장애가 없어, 밖으로 모든 좋고 나쁜 경계에서 마음에 생각이 일어나지 않는 것을 일러 좌(坐)라고 하고, 안으로 자성(自性)을 보아 움직임이 없는 것을 일러 선(禪)이라고 합니다. 여러분, 무엇을 일러 선정(禪定)이라 할까요? 밖으로 분별된 모습을 벗어나는 것이 선(禪)이고, 안으로 어지럽지 않은 것이 정(定)입니다.”

“밖으로 모습에 집착하면 안의 마음이 어지럽고, 밖으로 만약 모습을 벗어나면 마음이 어지럽지 않습니다. 본성(本性)은 스스로 깨끗하고 스스로 안정되어 있으나, 단지 경계를 보고 경계를 생각하기 때문에 어지럽습니다. 만약 온갖 경계를 보고서도 마음이 어지럽지 않다면, 바로 참된 정(定)입니다. 여러분, 밖으로 모습을 벗어나는 것이 선(禪)이고, 안으로 어지럽지 않은 것이 정(定)이니, 밖으로 선(禪)하고 안으로 정(定)하면 곧 선정(禪定)이 됩니다. <유마경(維摩經)>에서는 ‘곧장 활짝 열려서 본심을 되찾는다.’라고 하였고, <보살계경(菩薩戒經)>에 이르기를 ‘내가 본래 타고난 자성은 깨끗하다.’라고 하였습니다. 여러분, 매 순간 저절로 본성이 깨끗함을 보면, 저절로 닦고 저절로 행하여 저절로 불도(佛道)가 이루어집니다.”

<요약>

좌선(坐禪)에서 좌(坐)는 밖으로 온갖 경계를 만나 분별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고, 선(禪)은 안으로 불이의 자성을 보아 흔들림이 없는 것이다. 선정(禪定)에서 선(禪)은 밖으로 분별된 모습에서 벗어나는 것이고, 정(定)은 안으로 어지럽지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선(禪)이 좌(坐)이고 선이 정(定)이다. 온갖 분별된 경계에서 끄달림이 없는 것은 곧 늘 불이의 중도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좌선이든 선정이든 다만 견성(見性)일 뿐이다.

“우리 선문(禪門)의 좌선(坐禪)은 원래 마음에 집착하지도 않고, 깨끗함에 집착하지도 않고, 움직이지 않는 것을 옳다고 여기지도 않습니다. 만약 마음에 집착한다고 하면, 마음은 원래 허망한 것입니다. 마음이 환상과 같음을 알기 때문에 집착할 것이 없습니다. 만약 깨끗함에 집착한다고 하면, 사람의 본성은 본래 깨끗합니다. 허망한 생각 때문에 진여(眞如)를 뒤덮은 것이니, 단지 허망한 생각만 없으면 본성은 원래 깨끗합니다. 일부러 마음을 일으켜 깨끗함에 집착하여 도리어 깨끗하다는 망상(妄想)을 내지만, 망상은 있는 것이 아니므로 집착 역시 허망합니다. 깨끗함에는 모습이 없는데 도리어 깨끗하다는 모습을 세워 그것을 공부라고 말하지만, 이러한 견해를 낸다면 자기의 본성을 가로막고 도리어 깨끗함에 얽매이게 됩니다. 도반들이여! 만약 움직이지 않음을 닦는 자가 다만 모든 사람을 만날 때에 그 사람의 옳음․그름․좋음․나쁨․허물․어려움을 보지 않는다면, 이것이 바로 자성이 움직이지 않는 것입니다. 도반들이여! 어리석은 사람은 몸은 비록 움직이지 않으나, 입만 열면 곧 다른 사람의 옳음․그름․장점․단점․좋음․싫음을 말하니 도(道)와는 어긋나는 것입니다. 만약에 마음에 집착하고 깨끗함에 집착한다면, 도리어 도를 가로막는 것입니다.”

<요약>

선문(禪門)의 좌선(坐禪)은 마음에 집착하지도 않고, 깨끗함에 집착하지도 않고, 움직이지 않는 것을 옳다고 여기지도 않는다. 마음은 환상과 같아서 집착할 것이 없다. 본성은 본래 깨끗하니, 마음을 일으켜 깨끗함에 집착하면 도리어 깨끗하다는 망상(妄相)을 만드는 것이다. 움직이지 않는 것은 몸이 아니라, 경계를 만나서 분별에 떨어지지 않는 것이다.

선을 공부하는 지황(智隍)이라는 사람은 처음에 오조(五祖)를 찾아뵙고 공부하였는데, 스스로 이미 삼매(三昧)를 얻었다고 여기고서 암자에 머물며 앉아서 눕지 않고 20년을 지냈다. 혜능의 제자인 현책(玄策)이 돌아다니다가 하삭(河朔)에 이르러 지황의 이름을 듣고서 암자로 찾아가서 물었다.

“당신은 여기에서 무엇을 합니까?”

지황이 말했다.

“선정(禪定)에 들어갑니다.”

현책이 말했다.

“당신이 선정에 들어간다고 말하니, 마음이 있어서 들어가는 것입니까? 마음이 없어서 들어가는 것입니까? 만약에 마음이 없어서 들어간다면, 모든 정식(情識) 없는 풀․나무․기와․돌들도 마땅히 선정을 얻어야할 것입니다. 만약 마음이 있어서 들어간다면, 모든 정식을 가진 존재들 역시 마땅히 선정을 얻어야 할 것입니다.”

지황이 말했다.

“내가 선정에 들어갈 때에는 있느니 없느니 하는 그런 마음을 보지 않습니다.”

현책이 말했다

“있느니 없느니 하는 그런 마음이 있음을 보지 않는다면 곧 늘 선정인데, 어떻게 들어가고 나옴이 있겠습니까? 만약 들어가고 나옴이 있다면, 선정이 아닙니다.”

<요약>

선정(禪定)에는 들어가거나 나오거나 하는 일이 없다. 선정으로 들어가거나 선정에서 나온다면 참된 선정이 아니다. 참된 선정은 곧 불이중도(不二中道)이니 들어가거나 나오는 일이 없다.

㉯ 삼매(三昧)는 좌선이 아니다

“도반들이여, 일행삼매(一行三昧)라는 것은 모든 곳에서 가거나 머물거나 앉거나 눕거나 항상 하나의 직심(直心)을 행하는 것입니다. <유마경>에 말하기를 ‘직심(直心)이 도량이고, 직심(直心)이 정토이다.’라고 한 것과 같습니다. … 다만 직심(直心)만 행할 뿐, 어떤 법에도 집착하지 마십시오. 어리석은 사람은 법의 모습에 집착하여 일행삼매를 가지고 말하기를, ‘앉아서 움직이지 않고 망령되이 마음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 곧 일행삼매이다.’라고 곧장 말합니다. 이와 같이 이해한다면, 무정물과 같게 되어서 도리어 도를 가로막는 원인이 됩니다. 도반들이여, 도는 모름지기 통하여 흘러야 하는데, 어찌하여 도리어 막히겠습니까? 마음이 법에 머물지 않으면 도는 통하여 흐르고, 마음이 만약 법에 머물면 이름하여 스스로를 얽어맨다고 합니다. 만약 늘 앉아서 움직이지 않는 것을 옳다고 한다면, 마치 사리불(舍利弗)이 숲 속에 편안히 앉아 있다가 도리어 유마힐(維摩詰)에게 꾸중을 들은 것과 같을 뿐입니다.”

<요약>

삼매(三昧)는 앉아서 움직이지 않고 망령되이 마음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 아니라, 다만 늘 하나의 직심(直心)을 행하는 것이다. 앉아서 움직이지 않고 마음을 일으키지 않으면, 무정물(無情物)과 같게 되어서 도리어 도(道)를 가로막는다.

㉰ 공심정좌(空心靜坐)는 잘못이다

“도반들이여, 내가 공(空)을 말하는 것을 듣고서 곧장 공(空)에 집착해서는 안 됩니다. 무엇보다도 공에 집착해서는 안 됩니다. 만약 마음을 비우고 고요히 앉아 있다면, 이것은 곧 무기공(無記空)에 집착하는 것입니다.”

“어떤 어리석은 사람은 마음을 비우고 고요히 앉아서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 것을 스스로 일러 크다고 말하지만, 이러한 무리는 더불어 말할 만하지 못하니 삿된 견해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법에는 둘이 없고, 마음 역시 그러합니다. 도는 깨끗하여 여러 모습이 없습니다. 그대들은 삼가 고요함을 보지도 말고, 그 마음을 비우지도 마십시오. 이 마음은 본래 깨끗하여 취하거나 버릴 수 없습니다.”

“너는 다만 마음이 허공과 같되 허공이라는 견해에 집착하지 않아야 응용(應用)에 장애가 없다. 움직일 때에나 고요히 있을 때에나 마음이 없어서 범인이니 성인이니 하는 생각을 잊고, 주관과 객관이 함께 사라져서 자성과 모습이 한결같으면, 선정이 아닌 때가 없다.”

<요약>

마음을 비우고 고요히 앉아서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다면, 무기공(無記空)에 떨어진 것이다. 마음은 본래 모습이 없으므로, 취하거나 버릴 수 없고, 채우거나 비울 수 없고, 시끄럽거나 고요할 수 없다.

㉱ 좌선간심(坐禪看心)은 잘못이다

“도반들이여, 또 어떤 사람은 앉아서 마음을 보고 고요함을 관찰하면서 움직이지도 말고 일어나지도 말지니 이로 말미암아 공부가 이루어진다고 가르칩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이해하지 못하고 곧바로 집착하여 거꾸로 뒤집어집니다. 이와 같은 자가 많아서 이와 같이 서로 가르칩니다. 그러므로 큰 잘못임을 알아야 합니다.”

<요약>

앉아서 마음을 보고 고요함을 관찰하면서 움직이지도 않고 일어나지도 않는 것은 올바른 공부가 아니라 큰 잘못이다.

㉲점차 수행함은 없다

“깨달음인 자성은 본래 깨끗하니, 단지 이 마음을 쓰기만 하면 곧장 깨달음을 이룹니다.”

“어찌 자성이 본래 깨끗함을 기대했겠습니까? 어찌 자성이 본래 생멸(生滅)하지 않음을 기대했겠습니까? 어찌 자성이 본래 완전히 갖추어져 있음을 기대했겠습니까? 어찌 자성이 본래 흔들리지 않음을 기대했겠습니까? 어찌 자성이 만법(萬法)을 만들어낼 수 있음을 기대했겠습니까?”

“자성에는 잘못도 없고 어리석음도 없고 혼란도 없다. 순간순간 반야로써 비추어보아 늘 법의 모습에서 벗어나 자유자재하고 종횡무진할 수 있다면, 세울 무엇이 있겠는가? 자성이 스스로 깨달으면, 문득 깨닫고 문득 수행하고, 또한 점차(漸次)가 없다. 그러므로 어떤 법도 세우지 않는 것이다. 모든 법이 적멸(寂滅)한데, 무슨 차례가 있겠는가?”

“반야의 지혜 역시 크고 작음이 없지만, 모든 중생 스스로의 마음이 어리석음과 깨달음으로 같지 않기 때문에, 어리석은 마음은 밖을 보고 수행하여 깨달음을 찾으나, 자성(自性)을 깨닫지 못한다면 근기가 작은 것입니다. 만약 돈교(頓敎)를 깨닫고 바깥으로 수행하는 것에 집착하지 않으며, 다만 자기 마음에서 늘 바른 견해를 일으키고 피곤한 번뇌에 늘 물들지 않을 수 있다면, 곧 견성(見性)입니다.”

<요약>

자성은 본래 완전하여 아무런 모자람이 없으니 문득 자성을 깨달으면 그뿐, 점차로 차례차례 수행하여 나아갈 일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