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성게강의 (5) 법성은 원융하여 두 모습이 없다

법성원융무이상(法性圓融無二相)

제법부동본래적(諸法不動本來寂)

무명무상절일체(無名無相絶一切)

증지소지비여경(證智所知非餘境)

법성은 원융하여 두 모습이 없으며

모든 것은 동요않고 본래 고요해

이름도 모양도 모두 끊어졌나니

깨달은 지혜로 아는 바라 다른 경지 아니네

이상의 4구는 스스로 안으로 증득한 자내증(自內證)의 경계를 천명해 놓은 내용이라고 한다. 즉 깨달음의 경지를 열어서 보여 주는 내용으로, 현시증분(顯示證分)이라고 과목한 이 분(分)은 깨달은 분상에서 보는 법성의 설명이다.

법성(法性)이란 범어 dharmata의 역어(譯語)로 법의 체성(體性), 즉 우주의 모든 현상이 지니고 있는 불변의 본성을 말한다. 가시 감각적 현상인 차별의 경계를 넘어서 있는 본체계(本體界)의 실상을 가리키는 것이다. 또한 이것은 진여(眞如)를 달리 부르는 말이기도 한데, 진여법성(眞如法性) 혹은 진성(眞性)이라 하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말하는 불성(佛性)이 생명체의 세계인 정보(正報) 또는 근신(根身) 쪽에서 하는 말이라면, 법성이라는 말은 무생물의 세계인 의보(依報) 혹은 기계(器界) 쪽에서 하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진여와 불성 그리고 법성은 모두 같은 말인데, 이들 용어를 어느 쪽에서 쓰느냐에 따라 용어 선택이 달라질 뿐이다.

법성(法性)을 법과 성으로 글자를 떼어 해석할 때, 법(法)은 제법(諸法)의 법으로 모든 존재의 상황을 함께 묶어 표현하는 말이 된다. 즉 현상 속에 전개되는 일체 만유의 차별상이며, 이 차별상을 에워싼 시간과 공간적인 상황의 전체가 범주에 모두 들어가는 것이다. 존재 자체와 존재하는 방법은 존재론적인 차원에서는 모두 법의 카테고리(category)에 들어간다.

이러한 법의 근원인 본래의 성품은 모든 상대적인 차별에서 벗어난 전일적(全一的)인 것으로서 원융무애 하다고 설명한 것이 첫 구의 뜻이다. 실제로 상대적인 차별로 보는 현상은 모두 가상일 뿐이다. 마치 거울 속에 비치는 모든 물체의 모습이 실물이 아닌 허상인 것처럼, 인연에 의하여 일시적으로 존재하는 현상계의 제상(諸相)은 모두 공(空)한 것이기 때문에 공(空)해진 자리에서 보면 이미 상(相)이 없는 것이므로 원융할 뿐이다.

또한 본래의 성품(性品)은 사물이 가지는 개체적인 성질을 떠나 있다. 가령 물의 성질은 적셔 주는 수분 성질이고 불의 성질은 태워버리는 뜨거운 성질이지만, 물과 불의 성질은 법성 안에서는 원융하게 하나로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법성의 당체는 피차의 이동이 없어 동요하지 않으며 고요할 뿐이다. 즉 시간적인 상황과 공간적인 상황을 초월한 것이므로 어떠한 상황의 전개에 의해 현상을 나타내는 것이 이전(以前)이 되는 것이다.

여기서는 어떠한 개념이 성립되지 않으며 관념화되기를 또한 거부한다. 이름과 모양이란 겉으로 파악하는 개념적이면서 관념적인 허사로 실상이 이치와는 동떨어진 것이다. 꿈에 나타난 모습[몽경(夢境)]이 꿈을 꾸는 동안에는 있는 것 같지만 꿈을 깨고 나면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없다’라는 경지 또한 깨달아야 알 수 있는 것이므로 4구에서는 ‘다른 경계가 아니다’라고 하였던 것이다. 물론 여기서 안다는 것은 지적인 이해가 아닌 체험으로 얻어진 증오(證悟)의 경지를 말하는 것이다.

지안큰스님 글. 월간반야 2007년 5월 제78호

법성게강의 (4) 하나의 길에 시작과 끝이 없어

(1) 총석인의(總釋印意)

총괄적으로 도장(圖印)의 의미를 해석한다는 과목의 이름을 붙여 법계도를 짓게 된 까닭을 밝히는데, “석가여래께서 가르치신 그물과 같은 교법이 포괄하는 3종의 세간을 해인삼매로부터 드러내어 니타내기 위함이다” 라고 하였다. 해인삼매에 들었을 때 나타나는 3종의 세간, 즉 기세간(器世間)과 중생세간(衆生世間), 그리고 지정각세간(智正覺世間)의 모습을 보여 주기 위해서 법계도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특히 흰 종이 위에 도인(圖印)의 길을 표시하는 붉은 줄과 검은 글자로 만들어진 법계도가 3종 세간을 나타내는 것이라는 말이다. 한편 여기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이 다시 있다.

“백지(白紙)는 기세간(器世間)을 표시한다. 백지에는 본래 염색이 되어 있지 않다. 먹으로 찍으니 검고, 붉은 획을 그으나 붉다. 기세간도 이와 같다. 깨끗하거나 더러운 것 중에 어느 한 쪽으로 치우쳐 있지 않다.

중생이 처하면 더러움에 물들고, 성현(聖賢)이 처하면 맑고 깨끗하다. 그러므로 검은 글자는 중생세간(衆生世間)을 나타낸다. 검은 글자는 모두 검고, 글자 하나 하나는 모두 같지 않다. 중생도 이와 같다. 무명번뇌(無名煩惱)가 모두 자신을 어둡게 덮고 있으며, 그것은 온갖 차별을 나타낸다.

반면에 붉게 그은 획은 지정각세간(智正覺世間)을 나타낸다. 붉게 그린 한 길은 처음부터 끝까지 끊어짐이 없이 모든 글자들 속에서 연결된 고리를 이루고, 그 빛과 색을 분명히 하고 있다. 부처님의 지혜도 또한 이와 같이 평등하고 광대하여 두루 중생들의 마음에 미친다. 십세(十世)가 상응하여 중생을 원만하고 밝게 비춰준다. 이런 까닭에 인(印)은 3종의 세간을 모두 갖추고 있다.“

이어 백지와 검은 글자 그리고 붉은 줄이 서로 상호관계 속에 있으면서도 서로 다른 것과 같이, 3종 세간이 융통상섭(融通相攝)하여 혼연히 한 덩어리를 이루지만, 그러면서도 문이 각각 달라 분명하고 동요하지 않는다고 설명하였다.

세간이란 세계라는 말과 같다. 앞서 설명했듯이, 시간과 공간에 의하여 한계지어지는 상태를 뜻한다. 범어의 loka를 세간, 혹은 세계라 번역한다.

(2)별해인상(別解印相)

별해인상(別解印相)이란 도인(圖印)을 하나 하나 나누어 해석한다는 뜻인데, 여기에 다시 설인문상(設印文相). 명자상(明字相). 석문의(釋文義)로 나누어져 설명된다.

1) 설인문상(說印文相)

의상스님이 직접 인문(印文)의 양상을 설명하는 것으로, 이를 요약하면 “인문이 하나의 길로 되어 있는 것은 여래의 일음(一音)을 나타내기 위함이다. 그 길이 번거롭게 많은 굴곡을 나타내고 있는 것은 중생들의 근기와 취향이 같지 않기 때문이다. 바로 삼승교(三乘敎)가 이에 해당된다.

그리고 이 하나의 길에 시작과 끝이 없는 것은 여래의 선교방편에는 일정하게 정해진 것이 없어 대응하는 세계에 따라 적당하게 융통되는 것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것은 원교(圓敎)에 해당한다.

4면이 4각으로 되어 있는 것은 사섭법(四攝法)과 사무량심(四無量心)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 인문(印文)은 삼승에 의하여 일승을 드러내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2) 명자상(明字相)

시문(詩文)의 모양을 밝히는 것으로, 의상스님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시문은 시작과 끝이 있는데, 그것은 수행하는 방편을 말하는 것으로 인(因)과 과(果)가 다름을 나타낸다. 그리고 문중(文中)에 많은 굴곡이 있는 것은 삼승의 근기와 취향이 차별되어 같지 않음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또 왜 첫 글자와 마지막 글자가 중앙에 있느냐 하면, 인과의 두 자리가 법성 집안의 진실한 덕(德)과 용(用)임을 표시하는 것인데, 그 성품이 중도(中道)에 있기 때문이다.

이상과 같이 도인(圖人)의 전체적인 의미 설명과 아울러 인문(印文)과 시문(詩文)의 모양에 대하여 설명하고 문의(文意)의 해석에 들어간다.

3) 석문의(釋文義)

시문, 즉 법성게 한 게송 한 게송의 뜻을 자세히 풀이해 나가는 부분이다.

법성게는 7언 30구의 시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1송부터 18송까지는 자리행(自利行)을 19송부터 22송 까지는 이타행(利他行)의 수행방법, 그리고 22송부터 30송까지는 수행의 이익을 나타내는 세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그리고 이 세 부분을 다시 자세하게 나누어 가면서 내용상 의미를 구분해 과목을 나눈다.

요산 지안큰스님 글. 월간반야 2007년 4월 제 77호.

법성게강의 (3) 참된근원으로 돌아가기 위해

의상스님이 법성게를 지은 유래에 대해서는 매우 신비스러운 설화가 전해진다. 최치원이 지은 의상전(義湘傳)에 기재되었다는 이 설화는, 고려시대 균여(均如)대사가 ‘일승법계도원통기(一乘法界圖圓通記)’를 지어 그 속에서 인용하여 소개하고 있다.

의상스님이 그의 스승 지엄(智儼)스님 문하에서 화엄을 수학하고 있을 때, 한 번은 꿈 속에 이상한 모양을 갖춘 신인 (神人)이 나타나 의상스님에게 “그대가 깨달은 바를 저술하여 여러 사람들이 알 수 있도록 하라” 고 하였다. 또 꿈속에서 선재동자(善財童子)가 총명약을 주었다. 그리고 푸른 옷을 입은 동자가 다시 나타나 세 번째로 비결(秘訣)을 주는 것이었다.

의상스님이 이런 이야기를 스승인 지엄스님에게 하였더니, 지엄스님은 이를 듣고 “신인이 신령스러운 것을 나에게는 한 번을 주더니 너에게는 세 번을 주었구나, 널리 수행하여 네가 터득한 경지를 표현하도록 하라”고 했다.

의상스님은 스승의 명을 따라 그가 터득한 오묘한 경지를 순서대로 부지런히 써서 『대승장(大乘章)』10권을 완성해 스승에게 잘못이 없는지 보아주기를 청했다. 이에 지엄스님이 그것을 보고 난 뒤, 뜻은 좋으나 말이 너무 옹색하다 하여 다시 고쳐지었다.

그러고 난 뒤, 지엄스님과 의상스님이 함께 불전에 나아가 그것을 불에 사르면서 “부처님의 뜻에 맞는 글자는 타지 않게 해 주소서”하고 기원을 하였더니, 210자가 타지 않고 남았다. 의상스님은 타지 않고 남은 글자를 주워서 다시 불 속에 던졌으나 역시 타지 않았다. 지엄스님은 눈물을 흘리면서 감동하여 칭찬하였다.

의상스님은 글자를 연결하여 게(偈)가 되게 하려고 며칠 동안 문을 걸고 글자를 연결해 맞추어 마침내 30구(句)를 이루니, 삼관(三觀)의 오묘한 뜻을 포괄하고 십현(十玄)의 아름다움을 드러내었다 하였다.

이상과 같은 설화는 법계도가 만들어진 과정을 신비스럽게 설명하고 있다. 다만 의상스님이 스스로 깨달음 경지를 여러 사람에게 알려 주기 위해 법계도를 만들었다고 그 동기를 분명하게 밝혀 놓았다. 이 점에 관해서는 의상스님이 직접 법계도의 첫머리에서 언급해 놓은 말도 있다.

“이(理)에 의하고 교(敎)에 근거하여 간단한 반시(槃詩)를 만들어 이름에 집착하는 무리들로 하여금 그 이름마저 없는 참된 근원으로 돌아가게 하기 위해서다.”

이렇게 법성게를 짓게 된 동기를 밝힘으로써 많은 사람들이 법성게를 통하여 참된 근원으로 돌아가게 되기를 바랬던 것이다. 『삼국유사』의 ‘의상전교’편에서는 법계도가 완성된 때를 총장(總章, 당 고종 때의 연호) 원년 무진년(서기 668년)이었다고 밝히고 있다. 그 해에 스승 지엄스님도 열반에 든다.

법계도는 해인함매(海印三昧)의 세계를 도인(圖印)을 통하여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마음을 곧잘 바다에 비유한다. 바다는 깊고 넓은 것이며, 한없는 보배를 간직하고, 만상(萬象)을 비쳐주는 능력을 갖고 있다. 마음의 바다도 이와 같이 깊고 넓으며 무한한 보배를 가지고 있는데, 깨달음의 세계는 이와 같은 마음을 통하여 비춰 진다.

다만 파도가 일고 있는 바다에 깨달음의 세계, 즉 참된 진리의 세계가 비춰지기 위해서는 먼저 물결이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 파도가 일고 있는 바다에는 만상이 비춰지지 않는 법이기 때문이다. 파도는 바람이 불어서 일어난 것이므로 바람이 자면 바다는 고요하며 만상이 저절로 비춰지는 것이다.

마음의 바다에 무명(無名)의 바람이 불지 않아 번뇌이 파도가 쉬어지면 고요한 법성의 세계가 여실히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파도가 잠든 바다, 거기에 진실한 실상의 세계가 나타난 것을 해인(海印)이라 하고, 번뇌가 잠든 마음의 바다를 해인삼매(海印三昧)라고 하는 것이다. 법계도는 해인도라고 바뀌어 불려지기도 한다.

법계도는 직관으로 밖에 증득할 수 없는 깨달음의 세계를 상징하는 하나의 표징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의상스님은 그의 제자들 가운데 공부를 성취한 사람에게 깨달음을 인정하는 증표로써 법계도를 수여하였던 것이다.

의상스님은 법계도에 대한 소(疎)를 지어 법계도의 이해를 도와주려 하였다. 법계도에 대한 주석서로는 의상스님이 직접 지은 『법계도기총수록(法系圖記叢隨록)』2권, 고려 때 균여대사가 지은 일승법계도원통기(一乘法界圖圓通記)』2권, 조선시대 생육신(生六臣)중 한 사람으로 승명(僧名)을 설잠(雪岑)이라고 했던 매월당 김시습이 지은 『일승법계도주』(一 乘法系圖註)1권 등이 있다.

의상스님은 그의 소(疎)에서 법계도에 관한 전체적인 해석과 도인(圖印)의 각부분 하나 하나에 개별적인 풀이를 함으로써 두 가지 면으로 해석하였다.

지안큰스님 글. 월간반야 2007년 3월 제76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