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국스님─나를 향상시키는 역행보살

나를 향상시키는 역행보살 –

혜국스님

(석종사 선원장)- 이 세상과 역행보살(逆行菩薩)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는 사바(娑婆)입니다.

잡된 업(業)으로 얽혀 있어 참지 않고서는 살 수 없는 세상입니다.

이러한 사바세계이기에 완전하 게 악한 사람은 이곳에 못 태어납니다.

완벽하게 선한 사람 역시 이 세상에 못 태어납니다.

결국 이 세상에는 완벽하게 선한 사람이나 악한 사람은 없습니다.

악과 선이 섞인 사람만이 이 지구상에 태어납니다.

바꾸어 말하면 아무리 악 한 사람도 그 마음에는 선한 기운이 있고, 아무 리 선해보여도 악한 기운이 있습니다.

그리고 나 의 주위에는 때때로 나의 뜻을 거스르는 사람, 곧 역행보살(逆行菩薩)이 있어 우리의 앞길을 시 험합니다.

이 역행보살은 우리에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석가모니부처님께도 여러 명의 역행보살이 있었 으며, 가장 대표적인 인물은 제바달다였습니다.

– 야심의 노예 제바달다는 부처님의 사촌이요 아난존자의 형입니다.

그는 우바리 아난 등 석 가족의 여러 형제들과 함께 출가하여 부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제바달다는 올바른 수행은커녕, 날이 갈수록 나태함에 빠져들었습 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모든 사람들로부터 부처 님과 다름없는 존경을 받고 싶어 하였습니다.

그 당시 마가다국의 왕은 독실한 불교신자인 빔 비사라였으며, 태자는 아자타삿투였습니다.

아자타삿투는 제바달다의 꾐에 빠져 부왕 빔비 사라를 옥에 가두고 스스로 왕의 자리에 올랐으 며, 제바달다는 아자타삿투왕의 두터운 신임과 후원을 업고 부처님의 교단을 빼앗을 궁리를 하 였습니다.

어느 날, 제바달다와 그를 따르는 무리들이 영 축산으로 부처님을 찾아와 무례한 제의를 했습 니다.

“부처님께서는 이제 너무 연로하신데다 건강도 좋지 않으십니다.

그러니 교단을 저에게 맡기시 고 편히 쉬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부처님께서 거절하자, 제바달다는 아자타삿투왕 을 충동질하여 부처님을 죽이려는 무서운 음모 를 꾸몄습니다.

그리고는 칼을 잘 쓰는 자객을 부처님께 보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을 살해할 목적으로 그 옆에까지 간 자객은 몸이 떨리기만 할 뿐 꼼짝할 수조차 없었습니다.

이 모습을 보신 부처님께서 물으셨 습니다.

“어찌하여 그렇게 떨고만 있느냐?” 자객은 모든 사실을 털어놓고 부처님 앞에 엎 드려 용서를 빌었으며, 부처님의 용서를 받은 그는 출가하여 부처님의 충실한 제자가 되었습 니다.

얼마 뒤 부처님께서 영축산에서 내려오시는 날, 부처님을 해치기 위해 벼랑 위에 숨어 있던 제 바달다는 부처님께서 그 아래를 지나가시는 순 간 커다란 바위들을 굴려 떨어뜨렸습니다.

하지 만 정확하게 겨냥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바위들 은 몇 번 구르다가 좁은 골짜기에서 멈추고 말 았습니다.

제자들이 부처님 둘레를 감싸자 부처 님께서는 태연히 말씀하셨습니다.

“여래는 폭력에 의하여 목숨을 잃는 법이 없다.” 그리고는 다시 태연히 길을 가셨습니다.

두 차례 의 살해 음모가 모두 실패하자 제바달다는 부처 님께서 지나시는 길에 성질이 몹시 사나운 코끼 리를 풀어놓았습니다.

그러나 미친 듯이 날뛰던 코끼리까지도 부처님 앞에 이르자, 코를 아래로 늘어뜨리고 끓어앉는 것이었습니다.

멀리서 제바달다와 함께 이 광경을 지켜보던 아 자타삿투왕은 마음에 큰 변화가 일어 제바달다가 왕궁에 출입하는 것을 금하였고, 스스로 부처님 을 찾아가 설법을 듣기 시작했습니다.

마침내 치미는 분노와 시기심을 이기지 못한 제 바달다는 열손가락에다 독을 바르고 부처님이 계신 곳으로 향하였고, 부처님께 다가가 손가락 으로 부처님의 얼굴을 할퀴려 하였습니다.

그 순간 밟고 있던 땅이 갑자기 갈라져 그는 끝 없는 어둠 속으로 빠져들고 말았습니다.

완벽한 복덕과 인간관계를 갖추고 계셨던 부처님 에 대한 제바달다의 시기 질투와 불교교단 제1인 자가 되겠다는 야망의 불길은 꺼질 줄을 몰랐습 니다.

그리하여 수없이 부처님을 괴롭혔고, 여러 차례 죽이고자까지 하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부처님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으셨고, 제바 달다를 끝없는 용서와 자비로만 대했습니다.

그리 하여 어떻게 되었습니까? 부처님의 인격은 위로 위로 하늘끝보다 더 높이 올라갔고, 제바달다는 제 업 때문에 지옥의 불길 속에 휩싸였습니다.

결국 제바달다의 역행 덕분에 부처님의 인격이 더욱 빛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가장 완벽한 인격을 갖춘 부처님께도 역행보살이 있었거늘, 복덕이 많이도 부족한 우리 중생들에 게 어찌 역행보살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들 주위에는 언제라 할 것도 없이 거의 대 부분 싫은 사람 미운 사람이 한 두 명 있습니다.

내 뜻을 거스르고, 내 눈에 거슬리는 사람이 있 기 마련입니다.

왜 우리는 이와 같은 사람과 더 불어 살아야 합니까? 지금 현재는 아닐지라도, 과거나 전생에 나 스스로 가 댜른 사람에게 미운 짓을 많이 했거나 미워하는 생각을 많이 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얄밉고 거슬리는 사람이 보이면 휩쓸리지 말고 스스로에게 청량제를 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내가 걸어온 길일지도 모른다.

받아들이 자.

그리고 풀자.” 만약 이 세상이 내 비위를 다 맞추어주고 내 말이 면 무엇이든 들어준다면 내 영혼은 맑아질 수 없 을 겁니다.

오히려 아만만 높아질 것입니다.

우리나라도 한때 대통령이 방귀를 뀌면, “각하! 시원하시겠습니다.”하고 아양을 떨던 시절이 있 었습니다.

하긴 요즘도 그렇다고 합니다.

큰 사고 가 일어나면 일부러 대통령에게 알리지 않는 경우 도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런 태도는 진정으로 나라의 대통령을 위하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흔히들 우리는 “만약 옆에 애를 먹이는 아들딸이 없고 따끔한 말로 꼬 집는 친구가 없다면, 좋은 일만 있고 모두가 마음 대로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라고들 합니다.

그러나 실지로 이와 같다면, 그 사람은 눈 감는 날까지 자기의 갈 길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게 됩 니다.

문제가 생긴 적이 없기 때문에, 스스로가 헤쳐 나가야 하는 상황이 오면 깜깜절벽에 선 것 처럼 방황하게 되는 것입니다.

나를 애먹이는 사람은 전생부터 선택된 사람입니 다.

나와 얽혀 내 영혼을 무장시켜 줄 뿐 아니라 마음을 넓게 만들어주고 어려움을 이겨 나가도록 단련시켜 주는 존재입니다.

곧 역행을 통하여 향 상의 길로 나아가게 해주는 역행보살(逆行菩薩)인 것입니다.

-월간 [법공양]3월호에서 –

혜국스님─가는 곳마다 주인이 되어 진실되게 사는 법

가는 곳마다 주인이 되어 진실되게 사는 법 –

혜국스님

오늘은 가는 곳마다 주인이 되어 진실 되게 사는 방법을 이야기해 봅시다.

가는 곳마다 주인이 된다는 말은 깨어 있거나 잠들어 있거나 기쁜 일이 있거나 슬픈 일이 있거나 내 감정에 속지 않고 내가 내 주인이 된다는 얘기입니다.

내가 내 주인이 된다는 일은 쉽기로 말하면 참으로 쉬운 일일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렵기로 말하면 참으로 어려운 일 중의 어려운 일입니다.

우리 자신이 살아온 인생을 돌아보면 육신, 즉 감정의 덩어리로 된 몸뚱이가 먹을 것을 달라고 하면 넣어주고 성을 내달라고 하면 화를 불같이 내주는 등 감정이 해달라는 대로 감정의 노예가 되어 사는 시간이 많지, 참마음이 주인되어 행동을 하는 일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팔만사천 번뇌 모든 욕심과 진심과 어리석은 망상번뇌가 우리의 주인 자리를 차지하고 내 마음의 주인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임제 스님은 가는 곳마다 주인 되는 세계를 “수행자가 부처를 구하면 부처를 잃게 되고 조사를 구하면 조사를 잃게 되고 도를 구하게 되면 도를 잃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어떻게 주인노릇을 해야 되고 내 주인이 어떠한 자세인가를 잘 표현한 세계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내 주인을 알아보겠습니까.

과연 내 주인은 어떠한 세계일까요.

모양이 있거나 귀에 들리는 소리가 있거나 무슨 색깔이 있다면 그것은 주인자리가 아닙니다.

허공은 중생의 눈으로는 볼 수가 없습니다.

허공에는 아무런 모양도 없고 소리도 없기 때문에 이 조계사 법당은 물론 많은 대중들이 다니거나 소리를 질러도 아무런 탈이 생기지 않습니다.

만약 허공에 모양이 있거나 색깔이 있다면 우리가 마음 놓고 허공에 의지하고 살 수 없을 것입니다.

허공은 먹물을 끼얹어도 물들지 않고 침을 뱉어도 묻지 않습니다.

바로 이 오염되지 않는 자리를 주인된 자리라고 합니다.

여러분의 몸 안에서 몸이 썩지 않도록 지켜주는 주인공, 법문을 들을 줄 알고 눈을 뜰 줄 알도록 하는 소소영영한 그 기운이 내 마음의 주인공일진대 주인을 내버려두고 감정이 하자는대로, 도적놈이 주인노릇 하도록 가만두어서는 안됩니다.

마음부처라고 하는 법당에 내 스스로 감정과 욕망과 도적놈을 불러들여 주인노릇을 하도록 내버려두는 일은 부처님을 믿는 제자라면 있어서는 안됩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주인공을 얼마나 믿고 있는지를 냉철하게 돌아보십시오.

얼마 안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산당정야좌무언山堂靜夜坐無言 산당의 고요한 밤에 말없이 앉았으니 적적요요본자연寂寂寥寥本自然 조용하고 조용하여 본래의 모습이다.

하사서풍동임야何事西風動林野 서풍은 어찌하여 수풀을 흔드는가 일성한안려장천一聲寒雁?長天 기러기 한 소리가 장천을 울리도다.

여러분의 눈으로 자신의 눈이 보입니까, 안보입니까? “안보입니다.”(대중) 그러면 마음을 갖고 마음을 보면 마음이 보입니까? “안보입니다.”(대중)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찾으려고 하거든요.

찾으려고 한다는 것은 찾는 내가 있고 찾는 대상이 따로 있을 때만 가능한 일입니다.

자신의 눈으로 자신의 눈을 보지 못하듯이 마음이라는 것은 찾는 주인과 찾는 대상이 나눠진 상태가 아니고 주와 객이 분리되기 이전 세계입니다.

찾으려고 하면 이미 잃어버리는 것이 되거든요.

그래서 부처를 구하면 부처를 잃게 되고 조사를 구하면 조사를 잃게 됩니다.

또 도를 구하면 도를 잃는 것입니다.

요즘 참선을 하는 사람들은 너무 급합니다.

빨리 도를 이루려고 하거든요.

그런데 도를 그렇게 빨리 얻을 수 있으면 누가 얻지 못했겠습니까.

또 “요즘 참선을 하는데, 이러이러한 것들이 보입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하고 묻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런 것을 보길 원하는 마음이 아직 남았으니 보이는 겁니다.

그건 그림자지 실상이 아니에요.

보고 싶은 마음의 그림자가 밖에 나가서 황금색으로도 보이고 부처님으로도 보이고 그러는 것이니 절대로 현혹되지 마세요.

실상은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입니다.

천척사륜 직하수 千尺絲綸 直下垂 일파자동 만파수 一波?動 萬波隨 야정수한 어불식 夜靜水寒 魚不食 만선공재 월명귀 滿船空載 月明歸 화두가 무엇입니까.

‘정전백수자(庭前柏樹子)’라는 화두가 있는데, 화두가 정전백수자 이 다섯 글자입니까, 아니면 조주 스님이 ‘정전백수자’하기 전 그 마음 속에 숨겨진 의(意), 뜻입니까? 말 나온 다음의 것은 화두가 아닙니다.

그 말 나오기 전, 조주 스님이 우리에게 보여준, 여러분 마음과 내 마음이 둘이 아닌 상태를 화두라고 합니다.

이 화두는 들어가고 나오는 자리가 아니거든요.

‘공’하면 전해질 소리인데 이걸 알아듣는 사람이 흔치 않아요.

‘뜰앞에 잣나무’라는 소리가 나오기 이전 조사 스님의 그 뜻이 화두입니다.

의심을 하기 위한 의심이 아니라 조사 스님들이 이미 보여주었으니 마음의 눈을 떠야 할 것이 아닙니까.

뜨는 방법이 의정이요 의심입니다.

화두라고 하는 것은 그 뜻이 나와 벽이 허물어져버린 상태를 보여준 것이니까 내가 찾아야 할 대상이 아니라 바로 내 자신입니다.

내 자신을 대상화시켜 버린 것이고 찾으려고 하는 놈과 찾아야할 대상을 둘로 나눠버린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 뜻을 읽을 수가 없는거예요.

이 상태로는 백날이 가도 수행이 나아가지 못합니다.

유명한 역사학자 토인비는, 20세기 가장 큰 사건은 불교가 서양에 전해진 것이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토인비가 지금까지 접한 모든 학문과 사상은 내 것만 옳고 남의 것은 그르다는 것이었는데, 뒤늦게 불교를 알고 보니 나와 남을 둘로 보지 않는 가르침이거든요.

이 불교야말로 진정한 평화를 이룰 수 있는 가르침이라는 믿음을 갖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토인비는 어떤 학문, 사상도 해내지 못한 일을 불교가 해낼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들은 그것을 앞서 끌어가야 하고 언제가는 이루어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 믿음이 참선하는 사람들이 가져야 할 자세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의 몸뚱이를 내 것이라고 생각을 하죠? “예.”(대중) 아니라면 내가 가져가서 밥도 짓게 하고 더러는 팔아서 불사에도 보태고 할테니까.

여러분 몸뚱이가 여러분 꺼라면 마음대로 되야 하죠.

그런데 맘대로 됩니까? 안되죠? “예.”(대중) 앞으로 여러분 꺼라고 하지를 말아요.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내 것이라고 하는 내 몸뚱이도 마음대로 안되는데 어떻게 가족들을 내 마음대로 하고 이 세상이 내 마음대로 되기를 바라겠느냐.

이 세상이 마음대로 되고 내 가족이 마음대로 되기를 바라걸랑 마음을 먼저 길들이라”고 했습니다.

네가 주인이 되면 진실되게 살게 된다고 하신 겁니다.

우리가 화두를 들고 싶어도 내 몸뚱이 속에 있는 번뇌욕망이 (화두가) 들어오게 가만히 놔둡니까.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번뇌망상과 화두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망상번뇌가 일어나면 번뇌망상을 화두로 바꾸는 것이로구나, 즉 번뇌망상이라는 지능을 가지고 화두라고 하는 부처를 조성하는 것이니까, 참선법이라고 하는 것은 이 번뇌망상을 부처로 만드는 작업이라 할 수 있습니다.

‘번뇌가 곧 보리’라는 말이 여기서 나온 것입니다.

그렇게 할려면 화두를 정말로 믿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화두하는 그 시간 만큼은 내가 나와 같이 춤을 추는 시간이고 부처와 같이 있는 시간이구나.

일어나는 번뇌망상을 없애버리고 화두를 하는 것이 아니라 번뇌망상을 가지고 ‘어째서’ ‘왜’하고 살피다가 조금 더 나아가면 어째서도 없어지고 왜도 없어지게 됩니다.

오로지 조주 스님의 의정만 남게 된다 이 말이에요.

이렇게 분명한 것이라면 눈을 가지고 화두 수행에 나를 바쳐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화두 참선법은 일생을 바칠 가치가 있습니다.

자신의 인생문제는 나만이 해결할 수 있어요.

참나를 찾아 나서는데 무슨 하자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성인은 씨앗 심는 것을 중요시하지만 중생은 결과만 얻으려고 합니다.

씨앗을 심지 않으면 결과가 나오지 못합니다.

여러분이 ‘어째서’하고 의심을 품을 때 그것이 씨앗 심는 것입니다.

그 시간은 부처가 된 것입니다.

이는 화두가 작용이 된 것이거든요.

거기에 의심이 가고 잘못될 것이 없는 것처럼 이유를 붙일 필요도 없습니다.

(컵을 들어보이며)이걸 뭐라고 합니까? “컵이요.”(대중) 이 컵을 몸뚱이라고 합시다.

이 컵 안에는 물이 있습니다.

우리 몸 안에는 어떤 물이 있습니까.

망상번뇌라는 물이 있습니다.

망상번뇌는 흙탕물이 되어 우리 몸안을 계속 돌아가고 있습니다.

흙탕물이 돌아가듯이 돌아갈때는 그 안에 찌꺼기가 보입니까 안보입니까? “안보입니다.”(대중) 여러분이 텔레비전을 보거나 다른 사람하고 말할 땐 그 안에 있는 망상번뇌가 보일 리가 없습니다.

점점 찌꺼기를 집어 넣고 있으니 오히려 더 커져갈 뿐이죠.

그런데 가만히 놔두면 안에 찌꺼기가 가라앉습니다.

이때는 지금까지 내 속에 있던 찌꺼기가 보입니까, 안보입니까? “보여요.”(대중) 망상번뇌는 바깥에서 들어온게 아니라 내 속에 있으면서 주인 행세를 하고 있습니다.

화두는 이 망상번뇌를 볼 수 있을 정도로 가라앉게 해주는데, 대단하지 않습니까? 내 속에 있는 이 망상번뇌를 화두로 바꾸는 이게 공부입니다.

이건 딱딱 맞아 떨어지는 일이라구요.

화두 드는 수행자는 왜 뜰앞에 잣나무라고 했는지 조사관을 타파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화두 조사관을 타파하고 도를 깨닫는 걸 목적으로 해야지, 하는 도중에 뭐가 나타나거나 뭐가 보이는 것에 현혹되지 마세요.

여러분도 오늘부터는 화두를 등불, 스승으로 삼고 화두에 의지해서 망상번뇌에 속지 않고 살아가 보세요.

이 좋은 참선법을 만났으니 화두에 인생을 바칠 수 있는 씨앗 되기를 바랍니다.

혜국스님─“오직 자기 자신만이 몸과 마음을 괴롭히고 있지 않은가”

“오직 자기 자신만이 몸과 마음을 괴롭히고 있지 않은가”

-혜국스님-

“불호노신(不好勞神)커든 하용소친(何用疎親)가”, 정신을 괴롭힘이 좋지 않거늘 어찌 성기고 친함을 쓸 것인가, 친하고 멀리함이 있어서 정신을 괴롭힌다는 이 말은 평등성인 우리 본마음을 모르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평생 동안 자기 스스로 정신을 괴롭힙니다.

거의 혹사시키는 정도입니다.

몸은 피곤하면 쉬어주기도 하고 아프면 치료받기도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우리 정신은 몸이 쉬는 휴식시간에도 계속 괴롭힘을 당합니다.

그런데 정신은 다른 사람이 괴롭힐 수가 없는 겁니다.

오직 자기 자신만이 괴롭힐 수가 있는 것이지요.

그러니 정신을 괴롭히고 괴롭히지 않는 것은 남의 탓이 아니고 순전히 내 탓입니다.

이미 지나가버린 과거를 가슴에 부여잡고 놓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수시로 다시 생각하고 반복하면서 정신을 괴롭히는데 주로 인간과의 관계에서만 그렇습니다.

예를 들자면 우리가 어렸을 적 한반도를 지나간 ‘사라호’라는 태풍이나 몇 년 전 ‘매미’라는 큰 태풍이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에 입힌 피해는 대단했습니다.

그러나 그 태풍을 상대로, 태풍을 부여잡고 소송을 하거나 다투느라고 정신을 괴롭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 말은 지나간 태풍은 이미 지나갔기 때문에 마음에 붙들고 있지 않다는 얘기입니다.

생각에서 내려놓았다는 말이지요.

생각에서 놓아 버리면 정신을 괴롭힐 일이 없습니다.

내 마음의 상처로 남아 있어서 정신을 괴롭히고 있다는 얘기는 내 자신이 과거를 붙들고 있으면서 놓지 못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내 마음의 상처나 분노는 모두가 내 자신이 붙들고 놓지 못하는 내 감정이라는 말입니다.

이미 지나가 버린 과거사를 붙들고 환영과 싸우고 있는 것이지요.

한번 지나가 버린 강물에 두 번 다시 손을 씻을 수 없다는 말과 같이 이미 지나간 일은, 사실은 현재에 없는 일인데 우리가 환영에 속는 것입니다.

태양 빛이나 대지는 악한 사람이나 선한 사람이나 친하고 성긴 게 없습니다.

텅빈 상태로 좋다, 나쁘다는 분별이 없는 것이지요.

그런 까닭에 허공은 믿음 그 자체라 좋다, 나쁘다 하는 생각자체가 아예 일어나지 않는 겁니다.

무심(無心) 상태이니 이렇게 믿는 게 참 신뢰요, 참 믿음입니다.

우리 마음도 이와 같이 된다면 친하고 성김만 없는 게 아니라 정신을 괴롭힐 생각 자체가 없어진다는 진리의 말씀입니다.

이런 가르침은 우리에게 있는 소중한 보배를 보여주는 길이요, 언제 깨달아도 깨달아야 할 내 본래 고향소식입니다.

그 다음으로 “욕취일승(慾趣一乘)이어든 물오육진(勿惡六塵)하라”, 일승(一乘)으로 나아가고자 하거든 육진(六塵)을 싫어하지 말라, 정신을 괴롭히는 원인은 육진을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일승과 육진은 경계가 없습니다.

상대적인 개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먼저 육진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이 세상 태어날 때 눈과 귀, 코와 입, 몸과 의식 이렇게 여섯 가지 육근(六根)을 구비하고 나옵니다.

이 가운데 몸에는 팔, 다리 육체적인 모든 부분이 포함되어 있겠지요.

이 여섯 가지를 육근이라고 하고 육근에서 작용이 일어나면 눈(眼)은 색(色) 즉 경계를 보고, 귀(耳)는 소리를 듣고, 코(鼻)는 향기를 맡고, 입(舌)은 맛을 보며, 몸(身)은 촉감을 느끼고, 의식(意)은 온갖 생각을 일으키게 합니다.

주관인 육근이 만나는 객관 즉 색(色),성(聲),향(香),미(味),촉(觸),법(法) 여섯가지 상대를 육진(六塵)이라고 합니다.

사족을 붙여 설명하자면 육근이란 외부에서 정보를 받아들이는 눈과 귀, 코와 입, 몸까지 다섯 가지와 내부에서 정보를 받아들이는 의식(意識)으로서, 이 여섯 가지 주관을 육근(六根)이라고 하는 겁니다.

이렇게 외부에서 받아들이는 정보 즉 다섯 가지 오근은 색(色),성(聲),향(香),미(味),촉(觸)으로 이렇게 다섯 가지 경계로 받아들이고 내부에서 정보를 받아들이는 의식은 온갖 삼라만상이라는 현상계 즉 일체 세상법으로 받아들여서 판단하고 정리하는 겁니다.

그런데 판단하는 의식이 사실 있는 그대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고 과거에 자기가 축적해 놓은 경험 즉 업(業)에 의해서 판단하게 되는 겁니다.

따라서 그 판단이 자기 중심적으로 되는 것이 문제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외부에서 정보를 받아들이는 눈과 귀, 코와 입, 몸 다섯가지 오근(五根)이 받아들이는 정보를, 내부의 식(識)인 의근(意根)은 과거의 습관화된 잠재의식에 의해서 판단하고 결정하고 객관적인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자기가 익힌 습관 즉 업(業)에 의해 판단하기 때문에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이 되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육근(六根)이란 업(業)의 그림자요, 육진(六塵)이란 육근(六根)의 그림자입니다.

거기에서 더 나아가 주관인 눈(眼)이 객관인 색(色)을 만나면 좋다, 나쁘다 하는 분별을 일으킵니다.

또는 ‘저산에 핀 들국화가 흰색이다, 보라색이다’ 라고 분별을 하게 되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 귀(耳)로 음악을 듣고 있다고 할 때 그냥 듣기만 한다면 귀는 이근(耳根)이요, 소리는 성진(聲塵)인데 거기에서 이 음악소리는 클래식이다, 이 소리는 판소리다, 아니면 흥타령이다 하고 분별하는 식(識)이 나오게 되는 겁니다.

이러한 분별이 내 잠재의식에 익힌 습관에 따라 좋다, 나쁘다 하는 분별식을 만들고 나아가서 색(色), 성(聲), 향(香), 미(味), 촉(觸), 법(法)에 따른 안식(眼識), 이식(耳識), 비식(鼻識), 설식(舌識), 신식(身識), 의식(意識) 이러한 육식(六識)이 생기게 되는 겁니다.

이렇게 육근(六根), 육진(六塵), 육식(六識)을 합해서 십팔계(十八界)라고 하는데 우리가 보고 듣는 모든 세계가 이 십팔계 안에 포함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 몸을 자동차라고 한다면 자동차가 달리는 것도, ‘빵빵’하며 소리를 내는 것도, 자동차를 정차해서 세우는 것도 모두 운전수가 하는 것이다, 운전수가 모든 걸 움직이니 운전수는 일승(一乘)이라고 생각하고 자동차는 육근(六根) 육진(六塵)이구나, 이렇게 생각하면 이미 알음알이에 빠졌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운전수와 자동차가 하나가 되어야 속도를 내고 달리는 자동차가 되는데 이때는 자동차와 운전수가 둘이 아닙니다.

운전수와 자동차가 하나로 되어 속력이 나오는 겁니다.

그러니 말을 하는 내 입장에서는 설근(舌根)인데 듣는 상대방 입장에서는 이근(耳根)이라고 하니, 이름만 다를 뿐 육근(六根)의 체(體)는 같을 수밖에 없는 겁니다.

신심명에서는 이 모든 말과 생각에서 이름이 끊어지고 마음길이 멸(滅)한 자리를 보여주시려고 이렇게 고구정녕(苦口丁寧) 가르치고 있는 겁니다.

오직 일승(一乘)의 세계를 깨닫게 하려고요.

“육진불오(六塵不惡)하면 환동정각(還同正覺)이라”, 육진을 싫어하지 않으면 도리어 정각과 같음이라 하는 이 말은 육진이 정각에서 나오고 있다는 말과 같습니다.

귀(耳)라는 근(根)으로 누가 엄청나게 모함하는 소리를 들었다거나 아니면 눈(眼)이라는 근(根)으로 남이 토해놓은 오물이 내 옷을 더럽혔다고 해도 내 본질(本質), 내 근본(根本) 마음에는 모함당하거나 더럽혀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역력하게 보고 감정에 끌려가지 않는다면 바로 모든 육진은 육진이 아니라 깨달음의 작용이 됩니다.

그렇게 되면 육진은 본인을 어떻게 할 수가 없는 겁니다.

이러한 이치를 성성적적(惺惺寂寂)이라고 합니다.

마치 바다에서 물거품이 천번만번 일어났다 꺼졌다 하더라도 바닷물 자체는 일어났다 꺼졌다하는 일이 본래 없는 이치와 같습니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물거품 자체가 바닷물이라는 사실을 알면 생(生)하고 멸(滅)하는 사실 자체가 그림자임을 깨닫게 된다는 가르침입니다.

그렇게 볼 때 내안에서 육근, 육진을 통하여 일어나는 일체의 생각인 좋다, 싫다, 밉다, 곱다, 너다, 나다 하는 모든 분별은 바닷물에서 일어나는 물거품과 같다는 얘기입니다.

이러한 차원에서 육진불오(六塵不惡)를 우리 삶에서 살펴보면 내 단점, 내 못된 성질이라는 물거품을 어떻게 다스려나가야 하는가 길이 보이게 됩니다.

각자 자기 자신의 단점이나 모자라다고 느끼는 그 생각을 자신의 본질이라는 바닷물에서 일어나는 물거품으로 보고 연기공성(緣起空性)을 깨달으면 그 길이 곧 길 없는 길입니다.

길 없는 길이란 말길이 끊어진 길입니다.

생각의 한계를 벗어난 길, 대자유의 길입니다.

그러나 대자유니, 생각의 한계니 말의 흔적이 있으면 이미 길 없는 길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옛 스승들은 말길을 끊어주고 마음길이 멸(滅)하게 하기 위하여 길 없는 길을 할(喝)과 방(棒)으로 보여주신 겁니다.

본 마음에서 보면 나의 모든 단점과 못된 성질까지도 모두 내 마음 본질에서 일어나는 파장일 뿐이요, 습관 일뿐입니다.

자기단점이라는 물거품은 싫어할수록 더 강해집니다.

바닷물을 휘저으면 물거품이 더 일어나는 이치와 같습니다.

자기단점을 사랑하도록 해보십시오.

누가 뭐라 해도 지금 이 성질이 나를 있도록 만들어준 소중한 나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있을 수 있도록 나를 유지시켜 왔기에, 있는 그대로인 오늘의 나를 고맙게 생각하셔야 합니다.

그런 뒤 내 못된 성질이 일어나는 근본을 자세히 관(觀)해 보십시오.

바로 내 못된 성질이 내 본마음에서 나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한 이치를 바로 보면 제법무아(諸法無我) 연기공성(緣起空性)인 참 나를 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옛 스승들은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본시 산에 사는 사람이라 산중이야기를 즐겨 나눈다.

5월에 솔바람 팔고 싶으나 그대들 값 모를까 그게 두렵네.” 여기서 산이 과연 어떤 산인가, 산중이야기가 어떠한 이야기인가? 한번 깊이 생각해 볼 일입니다.

그리고 5월에 솔바람 팔고 싶으나 모든 중생들이 믿지 못하는 게 참으로 안타깝다는 스승들의 대자대비를 느낄 수 있었으면 참 좋겠습니다.

그 느낌이 발심(發心)으로 이어졌으면 하는 바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