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국스님─`남 탓`말고 서로 존중하라

‘남 탓’말고 서로 존중하라.

-혜국스님-

우리는 역경을 극복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 니다.

그럼 어떻게 하여야 역경을 극복하고 향상 할 수 있는가? 최소한 역경을 만났을 때 ‘남 탓’ 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흔히들 사람들은 힘든 일이 생길수록 남 탓을 합니다.

부부가 되어 수 십 년을 함께 살았으면서도 조금 어려운 일만 있 어도 탓을 합니다.

“아이구, 내가 저 영감(마누라) 만나서 신세가 이 모양이야.

당신이 책임지시오.” 이것이 과연 합당 한 태도입니까?

– 수년 전에 아는 분과 산행을 하게 되었습니다.

지난 밤에 눈이 많이 와서 빙판이 되었지만, 그 분이 꼭 가야 할 상황이었기 때문에 산을 올랐습 니다.

일을 마치고 내려오는데, 길이 빙판으로 바뀌어 사람들이 많이 미끄러졌습니다.

그 중 사십 가량 되어 보이는 여인도 얼음길에 넘어졌는지 다리를 절뚝거리다가, 갑자기 남편인 듯한 사람을 향해 마구 화를 내며 퍼부었습니다.

“하필이면 눈이 온 날 여기를 오자고 해? 나는 오고싶지 않았는데…

결국은 이렇게 다쳤잖아!” 자신은 안 가겠다고 했는데 남편이 우겨서 오게 되었고, 그 때문에 자신이 다치게 되었다는 것이 었습니다.

멀뚱멀뚱 듣고 있던 남자는 그녀에게 ‘조금만 더 가면 된다’고 달래었습니다.

그런데 도 여인은 계속 화를 내면서 남편을 탓하며 절뚝 절뚝 내려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여인이 걸음을 잘못 걸어 빙판 길에 미끌어진 것 은 남편 때문이 아닙니다.

자기의 부주의로 발을 삔 것입니다.

내가 발을 헛디뎌 미끄러진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모든 액난과 고통은 내가 지어 내가 받는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 산을 남편이 오자고 하여 왔기 때문에 남편을 원망하는 아내! 정녕 이것이 맞는 이치입 니까? 참으로 사랑스런 아내가 아니라 애꿎은 인 연과 산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부디 남 탓을 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상대를 인정 하십시오.

대부분의 사람들은 상대방에게 맞추려는 노력 보 다는 상대가 내 마음에 맞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보편적인 인간의 마음이기에 부처님께서도 말씀 하셨습니다.

“인간관계로 인한 대부분의 고통은 상대방이 내 마음에 맞기를 바라는 것에서 비롯된 것이다.” 보통의 아내들은 남편이 술을 마시고 들어오면 바 가지를 긁어댑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아내는 술 먹은 사람의 입장에 서서 “그래요.

잘 마셨어요” 하면서 박자를 같이 맞추어줍니다.

남편 또한 아내의 입장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만약 아내가 친구들과 모여 장난 화투를 치고 있 다면 화를 내지 말고, “그동안 답답했던 마음, 화투장을 내리치면서 확 풀어 버리시오.

재미있 게 치시구려.” 하며 맞추어 주십시오.

아들딸이 공부하는 것보다 노는 것을 즐기더라도 긍정적으로 보십시오.

이렇게 상대방을 이해하고 맞추어 간다면, 더 이상 인간관계 때문에 사는 것이 고통스럽거나 힘들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말씀드리면, 어떻게든 상대방과 함께 타락의 길로 들어서라는 뜻으로 잘못 받아 들이는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긍정 적으로 보고 상대방에게 맞추라’는 것은 함께 타 락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자식들이 애를 먹이고 부부가 서로 속을 썩일 때 불자는 어떻게 생각하며 극복합니까? “지금의 저 모습은 업에 의해 잠깐 보이는 헛것 일뿐, 마음 속에 있는 불성(佛性)까지 변한 것은 아니다.

저 사람도 나와 다를 바 없는 미래의 부 처님이다.” 이렇게 생각하면서 상대방의 거슬리는 모습이나 성깔부리는 모습만을 볼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있는 부처 기운을 보아야 합니다.

상대방 마음 속의 부처를 보고 함께 다듬어 나갈 줄 아는 것 이야말로 불자의 길이요, 상대방을 존중하는 것 이야말로 내가 살아나고 향상하는 길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월간 [법공양]3월호-

혜국스님─ 자신의 벽을 허물어라

자신의 벽을 허물어라

-혜국스님-

그럼 나 자신의 벽을 허물어버리기 위해서는 무엇부터 해야 하는가? ‘내가 누구인가’를 돌아 보아야 합니다.

나는 누구인가? 내가 나로 알고 있는 내 몸과 마음의 정체는 과연 무엇인가? 정녕 진짜는 무엇이란 말인가? 먼저 부처님의 몸부터 이야기해 봅시다.

우리 중생들이 부처님의 몸을 볼 때에는 반드시 육신(肉身)과 법신(法身)의 두 가지 측면에서 보아야 합니다.

29세에 출가하셔서 80세에 열반에 드신 석가모니 부처님은 눈에 보이는 역사적인 부처님이요 육신불입니다.

그리고 말로 전하지 못하고 글로 기록하지 못하는 대우주 진리 그 자체인 부처님을 우리는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이라고 합니다.

이 비로자나불이 바로 석가모니불의 법신입니다.

우리 중생들 또한 육신과 법신이 있습니다.

업을 따라 태어났다가 얼마동안의 삶이 끝나면 죽는 몸이 육신이며, 이 육신을 끌고 다니는 주인공이 법신이요 비로자나불입니다.

자연 법신의 측면에서 보면 부처와 중생은 조금도 다를 바가 없으며, 내가 곧 그대로 부처입니다.

그런데 중생은 법신이 아니라 육신인 이 몸뚱이를 ‘진짜 나’라고 고집하며 살아갑니다.

내 자신의 몸뚱이를 내 것이라고 착각을 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 몸이 내 것이 아니라 남의 것이라고 하면, 다른 사람이 마음대로 싣고 가서 누구에겐가 팔아버리기도 하고, 어느 곳으로 데려가서 노예처럼 부려먹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나의 몸은 남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마음대로 하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나의 몸은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인가?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 마음대로도 할 수 없지만 내 마음대로도 할 수가 없습니다.

나의 경우를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나는 13세 되던해인 1961년에 해인사에 들어왔습니다.

그때는 모두들 나를 보고 귀엽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떻습니까? 많이도 늙었습니다.

내 몸인지라 늙지말라고 했는데도 이렇게 늙었습니다.

아프지 말라고 했는데도 때때로 아픕니다.

가끔씩 법문을 할 때에는 목이 좀 시원하게 터져주길 바라는데도 목이 잠겨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 죽지 말라고 그래도 언젠가는 죽게 됩니다.

내 몸뚱이는 내 것인지라 내 마음대로 되어야 하는데, 내 마음대로 되지 않습니다.

이렇게 내 몸뚱이도 내 마음대로 안 되는데, 어찌 이 세상이 내 마음대로 되겠습니까? 내 몸뚱이라고 하는 ‘나’도 내 마음대로 못하는데, 어떻게 가족이 내 마음대로 되겠습니까? 만약에 가족이 내 마음대로 되기를 바란다면, 나 자신을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조상들을 내 마음대로 천도시키고자 한다면, 나 자신을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내가 내 마음을 길들여서, 나 자신을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을 때, 이 세상은 내 마음대로 되고 어떤 천도든 저절로 이루어지게 됩니다.

과연 어떠한 원리에 의해 이러한 일이 가능한 것인가? 우주 자연의 진리 쪽에서 보면, 앞뒤가 어긋나지 않고 딱 들어맞게 되어 있습니다.

한 번 살펴보십시오.

이 한반도에는 경기도 쪽으로 흘러가는 한강이 있고, 전라도 쪽으로 흘거가는 섬진강, 경상도 쪽으로 흘러가는 낙동강이 있습니다.

이 세 강 중, 한강은 경기도를 흘러가는 동안 ‘한강’이라는 이름과 함께 나름대로의 흐름과 물맛을 지니 며, 섬진강은 전라도를 흘러가는 동안은 ‘섬진강’이라는 이름과 함께 독특한 흐름과 물맛을 지닙니다.

또 낙동강은 경상도를 흘러가는 동안 ‘낙동강’이라는 이름과 함께 나름대로의 흐름과 물맛을 지닙니다.

그러나 한강이든 섬진강이든 낙동강이든, 일단 바다에 흘러들어가고 나면 그 이름도 없어지고 고유한 흐름도 사라지며, 물맛 또한 짠맛이라고 하는 한 가지 맛[一味]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내 마음의 문을 열어 바다처럼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면, 받아들인 모든 것이 바다라고 하는 하나의 이름 속에서 한 맛이 됩니다.

그렇게 되면 어느 아들이 애를 먹인다한들 받아들이지 못할것이 무엇이며, 어느 조상에게 서운한 마음이 있었다 한들 녹여버리지 못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내 마음 바다가 넓어진 만큼, 보리심(菩提心)을 발한 만큼, 우리의 잠들어있는 영혼이 깨어나는 만큼,가정의 평화가 더 크게 찾아들고 조상 천도가 이루어 지게 되는 것입니다.

조상의 천도를 위해 기도를 하고 있는 불자들은, ‘내가 지금까지 얼마만큼 나 자신을 천도했는가’를 다시 한번 돌아보아야 합니다.

예를 들어 내가, 저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톡에 사는 이름도 성도 모르는 사람에 대해 서운한 마음을 일으킬 수 있겠습니까? 없습니다.

왜 입니까? 너무 멀리 있고 나와 인연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가까운 우리 가족에게는 서운한 마음도 갖게되고, 좋고 미운 생각들을 합니다.

왜 입니까? 너무가깝고 인연이 지중하기 때문입니다.

이 지구상의 같은 나라에 태어나 같은 성을 가지고 한 집안에서 살아가는 한 가족이 되었다는 것은 보통의 인연이 아닙니다.

이것을 확률적으로 따질 때는 정말 엄청난 사건입니다.

또 한 생명이 이 세상에 태어날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아버지의 몸에서 나온 2억의 정충 중에 어머니 자궁 속으로 들어가는 정충은 오직 하나의 생명입니다.

내가 잘났든 못났든 크든 작든, 2억대 1의 경쟁률을 뚫고 태어난 소중한 생명입니다.

만약 우리가 내 생명의 소중함과 인연의 소중함을 분명하게 안다면 영가들 또한 ‘아, 내가 정말 소중한 생명이요 소중한 인연 속에 있다’는 것을 자각하게 됩니다.

또 내가 정말 소중하다는 것을 자각하게 되면, 결코 행동을 함부로 할 수 없게 됩니다.

나쁜 짓은 자연히 멀리하게 되며, 착하고 보람된 일을 즐겨 행하게 됩니다.

그리고 절에서 조상들을 위한 기도를 드릴 때에도 스스로를 돌아보게 됩니다.

‘아! 조상들이 그때 당시에 나에게 이러저러한 일을 해주셨는데, 나는 과연 조상들을 위해 무엇을 하였는가? 저 조상들은 형제간에 정말 화목하기를 바라는데,나는 이 집안의 일원이 되어 형제의 화목을 위해서 얼마만큼 마음을 쓰고 있는가? 내아들딸만을 위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우주법계가 환경오염에서 벗어나게 하여 저 맑은 물을 자자손손 먹을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정말 내 영혼을 깨우는 일인데, 나는 눈앞의 내 이익만을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자신을 돌아보게 될 때 저절로 다음과 같은 발원을 하게 됩니다.

‘아버지 어머니, 참으로 당신께서 바라시던 것을 내가 오늘 마음에 깊이 새겼습니다.

나와 내 가족만을 위한 이기적인 생각에서 벗어나, 이 사회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는 일들을 할 수 있도록 노력해보겠습니다.’ 나 스스로를 돌아보고 마음의 문을 열어 발원을 하고 보살행을 하게 되면, ‘나’라는 벽이 허물어지기 시작하고, ‘나’의 벽이 허물어지면 조상의 벽도 허물어집니다.

한 허공이 되고 하나의 바다가 되는 것입니다.

월간 [법공양]10월호에서

혜국스님─ 나를 향상시키는 역행보살

나를 향상시키는 역행보살

-혜국스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는 사바(娑婆)입니다.

잡된 업(業)으로 얽혀 있어 참지 않고서는 살 수없는 세상입니다.

이러한 사바세계이기에 완전하게 악한 사람은 이곳에 못 태어납니다.

완벽하게 선한 사람 역시 이 세상에 못 태어납니다.

결국 이 세상에는 완벽하게 선한 사람이나 악한 사람은 없습니다.

악과 선이 섞인 사람만이 이 지구상에 태어납니다.

바꾸어 말하면 아무리 악한 사람도 그 마음에는 선한 기운이 있고, 아무리 선해보여도 악한 기운이 있습니다.

그리고 나의 주위에는 때때로 나의 뜻을 거스르는 사람, 곧 역행보살(逆行菩薩)이 있어 우리의 앞길을 시험합니다.

이 역행보살은 우리에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석가모니부처님께도 여러 명의 역행보살이 있었으며, 가장 대표적인 인물은 제바달다였습니다.

야심의 노예 제바달다는 부처님의 사촌이요 아난존자의 형입니다.

그는 우바리 아난 등 석가족의 여러 형제들과 함께 출가하여 부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제바달다는 올바른수행은커녕, 날이 갈수록 나태함에 빠져들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모든 사람들로부터 부처님과 다름없는 존경을 받고 싶어 하였습니다.

그 당시 마가다국의 왕은 독실한 불교신자인 빔비사라였으며, 태자는 아자타삿투였습니다.

아자타삿투는 제바달다의 꾐에 빠져 부왕 빔비사라를 옥에 가두고 스스로 왕의 자리에 올랐으며, 제바달다는 아자타삿투왕의 두터운 신임과 후원을 업고 부처님의 교단을 빼앗을 궁리를 하였습니다.

어느 날, 제바달다와 그를 따르는 무리들이 영축산으로 부처님을 찾아와 무례한 제의를 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이제 너무 연로하신데다 건강도좋지 않으십니다.

그러니 교단을 저에게 맡기시고 편히 쉬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부처님께서 거절하자, 제바달다는 아자타삿투왕을 충동질하여 부처님을 죽이려는 무서운 음모를 꾸몄습니다.

그리고는 칼을 잘 쓰는 자객을 부처님께 보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을 살해할 목적으로 그 옆에까지간 자객은 몸이 떨리기만 할 뿐 꼼짝할 수조차없었습니다.

이 모습을 보신 부처님께서 물으셨습니다.

“어찌하여 그렇게 떨고만 있느냐?” 자객은 모든 사실을 털어놓고 부처님 앞에 엎드려 용서를 빌었으며, 부처님의 용서를 받은 그는 출가하여 부처님의 충실한 제자가 되었습니다.

얼마 뒤 부처님께서 영축산에서 내려오시는 날, 부처님을 해치기 위해 벼랑 위에 숨어 있던 제바달다는 부처님께서 그 아래를 지나가시는 순간 커다란 바위들을 굴려 떨어뜨렸습니다.

하지만 정확하게 겨냥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바위들은 몇 번 구르다가 좁은 골짜기에서 멈추고 말았습니다.

제자들이 부처님 둘레를 감싸자 부처님께서는 태연히 말씀하셨습니다.

“여래는 폭력에 의하여 목숨을 잃는 법이 없다.” 그리고는 다시 태연히 길을 가셨습니다.

두 차례의 살해 음모가 모두 실패하자 제바달다는 부처님께서 지나시는 길에 성질이 몹시 사나운 코끼리를 풀어놓았습니다.

그러나 미친 듯이 날뛰던 코끼리까지도 부처님 앞에 이르자, 코를 아래로 늘어뜨리고 끓어앉는 것이었습니다.

멀리서 제바달다와 함께 이 광경을 지켜보던 아자타삿투왕은 마음에 큰 변화가 일어 제바달다가왕궁에 출입하는 것을 금하였고, 스스로 부처님을 찾아가 설법을 듣기 시작했습니다.

마침내 치미는 분노와 시기심을 이기지 못한 제바달다는 열손가락에다 독을 바르고 부처님이 계신 곳으로 향하였고, 부처님께 다가가 손가락으로 부처님의 얼굴을 할퀴려 하였습니다.

그 순간 밟고 있던 땅이 갑자기 갈라져 그는 끝없는 어둠 속으로 빠져들고 말았습니다.

완벽한 복덕과 인간관계를 갖추고 계셨던 부처님에 대한 제바달다의 시기 질투와 불교교단 제1인자가 되겠다는 야망의 불길은 꺼질 줄을 몰랐습니다.

그리하여 수없이 부처님을 괴롭혔고, 여러 차례 죽이고자까지 하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부처님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으셨고, 제바달다를 끝없는 용서와 자비로만 대했습니다.

그리하여 어떻게 되었습니까? 부처님의 인격은 위로 위로 하늘끝보다 더 높이 올라갔고, 제바달다는 제 업 때문에 지옥의 불길 속에 휩싸였습니다.

결국 제바달다의 역행 덕분에 부처님의 인격이 더욱 빛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가장 완벽한 인격을 갖춘 부처님께도 역행보살이 있었거늘, 복덕이 많이도 부족한 우리 중생들에게 어찌 역행보살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들 주위에는 언제라 할 것도 없이 거의 대부분 싫은 사람 미운 사람이 한 두 명 있습니다.

내 뜻을 거스르고, 내 눈에 거슬리는 사람이 있기 마련입니다.

왜 우리는 이와 같은 사람과 더불어 살아야 합니까? 지금 현재는 아닐지라도, 과거나 전생에 나 스스로가 다른 사람에게 미운 짓을 많이 했거나 미워하는 생각을 많이 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얄밉고 거슬리는 사람이 보이면 휩쓸리지 말고 스스로에게 청량제를 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내가 걸어온 길일지도 모른다.

받아들이자.

그리고 풀자.” 만약 이 세상이 내 비위를 다 맞추어주고 내 말이면 무엇이든 들어준다면 내 영혼은 맑아질 수 없을 겁니다.

오히려 아만만 높아질 것입니다.

우리나라도 한때 대통령이 방귀를 뀌면, “각하!시원하시겠습니다.”하고 아양을 떨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하긴 요즘도 그렇다고 합니다.

큰 사고가 일어나면 일부러 대통령에게 알리지 않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런 태도는 진정으로 나라의 대통령을 위하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흔히들 우리는 “만약 옆에 애를 먹이는 아들딸이 없고 따끔한 말로 꼬집는 친구가 없다면, 좋은 일만 있고 모두가 마음대로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라고들 합니다.

그러나 실지로 이와 같다면, 그 사람은 눈 감는 날까지 자기의 갈 길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게 됩니다.

문제가 생긴 적이 없기 때문에, 스스로가 헤쳐 나가야 하는 상황이 오면 깜깜절벽에 선 것처럼 방황하게 되는 것입니다.

나를 애먹이는 사람은 전생부터 선택된 사람입니다.

나와 얽혀 내 영혼을 무장시켜 줄 뿐 아니라 마음을 넓게 만들어주고 어려움을 이겨 나가도록 단련시켜 주는 존재입니다.

곧 역행을 통하여 향상의 길로 나아가게 해주는 역행보살(逆行菩薩)인 것입니다.

우리는 역경을 극복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럼 어떻게 하여야 역경을 극복하고 향상 할 수 있는가? 최소한 역경을 만났을 때 ‘남 탓’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흔히들 사람들은 힘든 일이 생길수록 남 탓을 합니다.

부부가 되어 수 십 년을 함께 살았으면서도 조금 어려운 일만 있어도 탓을 합니다.

“아이구, 내가 저 영감(마누라) 만나서 신세가 이모양이야.

당신이 책임지시오.” 이것이 과연 합당한 태도입니까? 수년 전에 아는 분과 산행을 하게 되었습니다.

지난 밤에 눈이 많이 와서 빙판이 되었지만, 그 분이 꼭 가야 할 상황이었기 때문에 산을 올랐습니다.

일을 마치고 내려오는데, 길이 빙판으로 바뀌어 사람들이 많이 미끄러졌습니다.

그 중 사십 가량되어 보이는 여인도 얼음길에 넘어졌는지 다리를 절뚝거리다가, 갑자기 남편인 듯한 사람을 향해 마구 화를 내며 퍼부었습니다.

“하필이면 눈이 온 날 여기를 오자고 해? 나는 오고싶지 않았는데…

결국은 이렇게 다쳤잖아!” 자신은 안 가겠다고 했는데 남편이 우겨서 오게 되었고, 그 때문에 자신이 다치게 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멀뚱멀뚱 듣고 있던 남자는 그녀에게 ‘조금만 더 가면 된다’고 달래었습니다.

그런데도 여인은 계속 화를 내면서 남편을 탓하며 절뚝절뚝 내려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여인이 걸음을 잘못 걸어 빙판 길에 미끌어진 것은 남편 때문이 아닙니다.

자기의 부주의로 발을 삔 것입니다.

내가 발을 헛디뎌 미끄러진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모든 액난과 고통은 내가 지어 내가 받는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 산을 남편이 오자고 하여 왔기 때문에 남편을 원망하는 아내! 정녕 이것이 맞는 이치입니까? 참으로 사랑스런 아내가 아니라 애꿎은 인연과 산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부디 남 탓을 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상대를 인정 하십시오.

대부분의 사람들은 상대방에게 맞추려는 노력 보다는 상대가 내 마음에 맞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보편적인 인간의 마음이기에 부처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인간관계로 인한 대부분의 고통은 상대방이 내마음에 맞기를 바라는 것에서 비롯된 것이다.” 보통의 아내들은 남편이 술을 마시고 들어오면 바가지를 긁어댑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아내는 술먹은 사람의 입장에 서서 “그래요.

잘 마셨어요”하면서 박자를 같이 맞추어줍니다.

남편 또한 아내의 입장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만약 아내가 친구들과 모여 장난 화투를 치고 있다면 화를 내지 말고, “그동안 답답했던 마음,화투장을 내리치면서 확 풀어 버리시오.

재미있게 치시구려.” 하며 맞추어 주십시오.

아들딸이 공부하는 것보다 노는 것을 즐기더라도 긍정적으로 보십시오.

이렇게 상대방을 이해하고 맞추어 간다면, 더 이상 인간관계 때문에 사는 것이 고통스럽거나 힘들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말씀드리면, 어떻게든 상대방과 함께 타락의 길로 들어서라는 뜻으로 잘못 받아 들이는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긍정적으로 보고 상대방에게 맞추라’는 것은 함께 타락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자식들이 애를 먹이고 부부가 서로 속을 썩일 때 불자는 어떻게 생각하며 극복합니까? “지금의 저 모습은 업에 의해 잠깐 보이는 헛것일뿐, 마음 속에 있는 불성(佛性)까지 변한 것은 아니다.

저 사람도 나와 다를 바 없는 미래의 부처님이다.” 이렇게 생각하면서 상대방의 거슬리는 모습이나 성깔부리는 모습만을 볼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있는 부처 기운을 보아야 합니다.

상대방 마음 속의 부처를 보고 함께 다듬어 나갈 줄 아는 것이야말로 불자의 길이요, 상대방을 존중하는 것이야말로 내가 살아나고 향상하는 길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제 한 걸음 더 나아가, 미움과 증오심을 어떻게 처리하는 것이 현명한지에 대해 이야기해 보고자 합니다.

수 년 전, 달라이라마 스님을 만났을 때 여쭈었습니다.

“스님은 중국인이 정말 밉지 않습니까?”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1959년 중국군의 무력탄압으로 인해 티베트는 점령을 당하였습니다.

그때 중국군이 티베트 여인들에게 저지른 참으로 끔직한 짓을 대부분의 티베트 스님들은 망명길에 오르면서 보았습니다.

비참하게 죽어가는 그 처참한 모습을 보면서 비통함과 애절함을 품고 히말라야를 넘어 다람살라까지 온 것입니다.

히말라야를 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나도한 번 가 본 적이 있는데, 3천m를 넘어서자 풀 한포기 나무 한그루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4천m를 가면 들이마실 공기가 없어 숨소리가 ‘헉헉’하고 매우 거칠게 변합니다.

눈앞에서 어머니와 누이들이 당하고 죽는 모습을 보고 그 힘든 길을 걸어온 티베트 스님들인데, 중국인이 어찌 밉지 않을 리 있겠습니까? 보통사람이라면 그 생각만 나도 두고두고 외칠 것입니다.

‘이 못된 중국놈들! 하늘 아래 같이 살지 못할 이원수들! 그 원한만은 꼭 갚겠다.’ 그런데 달라이라마께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간이 이 육체를 가지고 타락의 길을 선택하면 한없이 굴러 떨어져서 축생이나 다름없는 길로 들어갑니다.

그래서 결국에는 어린아이 납치나 강도짓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게 됩니다.

반대로 몸이라는 자동차를 잘 이끌면 부처의 길로 갈 수 있게 되는데, 이때의 몸은 아주 소중한 그릇이 됩니다.

이렇게 부처를 담을 수 있는 그릇에 남을 미워하고 증오하는 생각을 담고 다닌다면 소중한 인생을 망치는 것이 됩니다.

내 몸뚱이에 중국인들을 증오하고 미워하는 생각을 품고 다닌다면, 결국에는 중국인들보다 내 자신이 먼저 망가져버릴 것입니다.

증오로만 살다가 인생을 마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금생에서는 연꽃을 피우지 못하고, 마음농사 역시 짓지 못하게 됩니다.

나는 스스로가 이렇게 사는 것을 허락하지 못합니다.

부처의 길을 가야 할 소중한 육신에 남을 미워하는 더러운 생각을 담아 두어서야 되겠습니까? 내가 증오를 이겨내며 평생 동안 수행을 한 까닭은 중국인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해서였습니다.

지금 내 마음에는 그들을 미워하는 마음이 전혀 없습니다.” 미워하고 증오하고 원망하는 마음, 이 마음을 없애기란 정말 쉽지가 않습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떤 이에 대해 미워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남편이나 자식들, 이웃과 친구 동료 등에 대해 미워하는 마음이 조금씩 있습니다.

곧 주변에 ‘꼴통’이 있기 마련이며, 나와 맞지 않는 이 꼴통들이 애를 먹이는 경우가 자주 있습니다.

그런데 ‘나를 애먹이는 사람’도 그냥 이 세상에 오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전생에 그 사람에게 빚을 졌기 때문에 나에게로 와서 꼴통 짓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향상을 하고 부처의 길을 가기 위해서는, 복을 쌓고 공덕을 짓기 위해서는 꼴통인 그 사람을 참아내어야 합니다.

가족 중에도 유독 꼴통 짓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친구 회사동료 중에도 맞지 않는 사람, 싫은사람이 꼭 있기 마련입니다.

자연 그와 같은 사람을 만나면 싫어지고 짜증이 나고 기분이 나빠집니다.

하지만 그들이 누구입니까? 바로 역행보살입니다.

나로 하여금 역행을 극복하게 하여, 나를 한 단계높이 올라갈 수 있게 만들어 주는 보살입니다.

그러므로 그와 같은 사람을 만나면 ‘증오’보다는 향상의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저 사람이 없다면 내가 어떻게 참는 법을 수행하겠는가? 이렇게 역행보살의 인연으로 만났으니, 향상의 기회로 삼을 뿐 저 사람을 미워하면 안 된다.’ 나아가 달라이라마 스님처럼 ‘ 부처를 이루어야 할 내 몸 안에 증오심 같은 쪼잔한 마음을 넣어둘 수 없다’라고 생각하게 된다면, 그리고 증오심을 자비심으로 바꾼다면 정말 대단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적어도 우리 불자들은 ‘나’를 괴롭게 하고 힘들게 했던 사람들이 잘못되거나 어려움에 빠져 있는 것을 보면서 고소해 하거나 기뻐해서는 안됩니다.

오히려나 역시 그와 같은 처지가 될 수 있음을 상기하면서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리고 스스로를 점검해야 합니다.

‘나는 지금 어디쯤 와 있는가?’ ‘내 원을 성취함에 필요한 힘을 얼마나 길렀는가?’ ‘내 소중한 사람들의 힘든 모습을 얼마나 이해해 주고 있는가’ ‘소중한 사람들을 위해 무엇을 해주고 있는가?’ 이렇게 자신과 주변을 되돌아 보면서 모두가 함께 잘되고 깨어나는 길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남이 잘되는 것에 대해서도 좋은쪽으로 마음을 써야 합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남이 잘되면 시기심과 질투심을 일으키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다른 사람 잘되는 것이 내가 잘되는 일임을 알기 때문에 시기.질투하지 않고 따라서 기뻐합니다.

이것이 수희입니다.

속담에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말이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대학입시에서 내 자식이 떨어지고 다른집 자식이 합격하면 배 아파합니다.

‘저집 아니는 어쩌다 재수가 좋아서 됐겠지.

그 아이가 내 아들보다 잘난 구석이 어디 한군데라도 있었던가.’ 그런데 남이 잘되는 것을 함께 기뻐해 주지 않고 시기심을 일으켜 ‘안좋은 소리’를 하게되면, 도리어 ‘안되는 기운’이 내게로 모입니다.

남이 잘못되기를 바라는 잘못된 기운이 내 집으로 모여들어 내 집안을 흔들게 됩니다.

왜입니까? 애당초 내가 안되는 씨앗을 심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내 자식은 떨어졌지만 그 집이라도 합격 하였구나.

정말 다행이다’라고 생각하면 나와 내집에 잘되는 기운이 모이게 되며, 다음에는 자연히 내 자식들에게도 좋은 일이 생기게 됩니다.

수희(隨喜)! 지혜로운 사람은 남이 잘되는 것을 자신의 일처럼 함께 기뻐합니다 .

이렇게 남이 잘되는 것을 자신의 일처럼 함께 기뻐합니다.

이렇게 남이 잘되는 것을 기뻐할 줄 아는 사람은 넓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요, 넓은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그 마음 넓이만큼 많은 복이 깃들게 됩니다.

실로 넓은 마음의 소유자가 되는 것은 노력으로 충분히 이룰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잘된 일을 보고 함께 좋아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은 넓어 집니다.

남이 잘되는 것을 참으로 기뻐해 줄수 있고 찬탄해 줄수 있는 넓은 마음을 지닌 사람은 능히 자기 자신을 아름답게 꾸밀줄 알고 가정과 가족을 아름답게 가꿀줄 압니다.

그리고 마침내는 부처님의 세계를 향해 열심히 나아갈 수 있게 됩니다.

부디 시기.

질투 말고 수희.찬탄 하십시요.

시기.

질투하면 나쁜기운.

나쁜 인연이 모여들고, 수희.

찬탄하면 좋은인연, 좋은 기운이 가득 충만하게 된다는 것을 꼭 기억하기시 바랍니다.

사바세계에서는 편안하게 살기가 용이하지 않습니다.

휘몰아치는 고난과 역경 때문에 순탄하게 항해를 하기가 힘이 들고, 욕심처럼 살기란 거의 불가능 합니다.

하지만 이 힘듬이, 특히 인간관계 속의 힘듬이 우리를 훌륭하게 성장 시킵니다.

‘태풍치는 바다가 아니면 명선장이 나올 수 없다’는 영국 속담으로도 알수 있듯이, 인간관계의 어려움을 잘 극복하면 우리는 고해를 능히 건너는 대보살이 될수 있습니다.

힘들게 하고 애를 먹이는 역행보살과 함께 할때 오히려 멋진 원을 세우고 선을 잘 그은 다음 묵묵히 농사를 지어가는 사람, ‘남탓’보다는 서로를 존중할 줄 아는 사람, 미움 증오 분노 시기 질투를 자비 용서 이해 수희 찬탄을 하는 사람이 되어 참으로 복되고 평화롭게 살기를 축원 드립니다.

마하반야바라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