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을 위한 생태주의

시화호의 전철을 밟을 것인가. 새만금간척사업과 경인운하는 어떻게 결론지어질 것인가. 북한산과 천성산의 운명은 또 어떻게 될 것인가. 통도사 앞의 초산 유원지 개발을 비롯하여 멀고 가까운 곳에서 개발과 보존과 관리의 문제로 사람과 대지가 온통 몸살을 앓고 있다.

과학기술의 비약적 진보와 인류 사상 유례 없는 물질적 풍요를 낳은 20세기. 그러나 이 세기는 전쟁과 혁명, 대량 살상과 인간 소외는 물론 환경 파괴로 얼룩지면서 21세기로 그 역할을 넘겼지만, 성장과 개발중심의 산업사회가 남긴 폐해의 중심에서 가장 두드러진 사상은 역시 생태주의(Ecology)라고 할 것이다. 환경오염ㆍ기상이변ㆍ굶주림ㆍ자원고갈ㆍ빈부격차ㆍ인종차별ㆍ노사갈등ㆍ전체주의ㆍ전쟁ㆍ여성차별ㆍ문화적 지배와 종속 등.

1979년 독일 출신의 유태계 철학자 한스 요나스는 『책임의 원칙』이라는 저서를 통해 환경윤리학 혹은 생태철학이라 불리는 새로운 사상의 장을 열었다. 이제껏 어떠한 대안도 허용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던 생태계의 파괴, 생태학적 위기의 문제점을 ‘신은 우리를 도울 수 없다. 우리가 신을 도와야 한다. 그것이 우리 자신을 궁극적으로 돕는 길이다’라고 간단히 서술하였다.

지금까지의 독선적인 인간중심주의에 경종을 울리면서 이 시대 중심 화두로 생태주의가 떠오른 것이다. 인간의 이익이 자연에 우선하니 경제적 가치와 공리적 가치를 따져 무관한 부분만 보존하자는 보존파와, 자연자원이 고갈되지 않도록 관리만 하자는 관리파가 주류를 이룬 시대 상황에서 인간중심주의를 비판하고 생태중심주의를 주창한 것이다. 인간이 자연의 일부라면 자연은 결코 단순한 수단일 수 없고, 그 자체로서 존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현대 기술문명과 자본주의는 우리에게 실제로 인간다운 삶을 실현할 수 있는 힘과 수단을 제공하였지만, 지나친 성공은 역설적이게도 우리를 파국의 위험에 빠뜨리고 있다. 자연은 인간 없이도 계속 존재할 것이라는 사실을 생각하면 정녕 위기에 처해 있는 것은 인간 자신이지 자연이 아니라는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자유를 실현하기 위하여 자연을 지배하려 하였지만 자연에 대한 지나친 지배는 결국 자유를 실현할 수 있는 가능성 마저 파괴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의 전통적 윤리가 오직 인간과 인간의 관계가 어떠해야 한다고 강조할 뿐,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대해서는 침묵했다. 그러기에 다른 사람의 의지와 자유를 훼손하지 않는 한 자연을 소유하고 지배하는 것은 자유라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인간의 자유가 기술을 통해 실현가능하고 기술과 개발에 의한 환경 파괴는 불가피하다는 근대적 사고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면, 결국 자연은 인간에게 보복을 한다는 것을 피부로 느끼고 있다. 자연에 속해 있는 인간이 자신의 자유를 실현하려면 먼저 자연과 유기적 관계를 맺지 않으면 안된다.

19세기말 오토 슈펭글러는 서구의 몰락을 예견하면서 ‘지구의 황혼’을 느꼈기에 환경파괴에 따른 생태위기가 생명을 위협하는 치명적 상황이라고 했다. 인도의 성자 간디 또한 일찌기 서구식 산업주의가 인류 모두에게 최악의 저주가 될 것이라고 경고 하였는데, 벌써 그 경고는 현실이 되어 다가왔다.

이제 우리 인간의 선택은 자명해졌다. 인간중심주의가 현 위기의 근원이 되어 종(種)으로서의 인간이 생태계를 파괴하였다면, 생물중심주의인 ‘근본생태주의’로 돌아가든지,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배 원인이 권력이나 자본 등이었다면 인간내부에 존재하는 환경파괴의 주범을 없애는 ‘사회생태주의’로 나아가든지 선택을 통해 성장제일주의적 산업문명을 넘어서는 탈 근대적 문명전환운동’을 지향해야만 할 것이다.

김형춘 글 / 월간반야 2003년 8월 (제33호)

인간능력의 한계

인간을 만물의 영장이라 한다. 그러나 인간이 인간 스스로를 연구하는 것만큼 어려운 학문도 없을 것이다. 인간에 대한 게놈지도가 그려지고 각종 질병의 원인이 되는 유전인자가 속속 발견되고 있지만 그 역시 유한할 수밖에 없다. 그래도 미련을 갖고 연구에 연구를 거듭하는 이유는 인간이 갖고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믿기 때문이리라.

본래 인간은 참으로 무능하게 태어난다. 아마 어떤 다른 동물에 비겨도 인간만큼 무능하게 태어나는 존재는 드물 것이다. 갓난아기를 상상해 보라. 보호자의 도움이 없으면 얼마동안 더 생명을 부지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다른 동물들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비틀비틀 걷기도 하고 엄마 젖을 빨기도 하는 것을 본다. 아마 가장 무능하게 태어나는 존재가 인간이 아닌가 싶다.

그에 더하여 인간은 성장기간 또한 엄청나다. 성인 공자께서도 ‘삼십에 선다〔三十而立〕’고 하여 서른 살쯤 되어야 인격적ㆍ경제적ㆍ사회적으로 홀로서기를 할 수 있다고 보았다. 사실 요즈음도 대학 졸업과 남자의 경우는 병역의 의무를 마치고 취업도 해야 하고 결혼을 하여 가정을 꾸리다 보면 삼십 년도 오히려 부족할 정도다. 어떤 동물이 30년이란 성장기간을 거쳐 홀로서기를 하는가. 가장 무능하게 태어난 인간이 가장 긴 성장기간을 거쳐 자립하는 것만 본다면 결코 대단하다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처럼 늦깎이 존재이지만 인간은 ‘무한한 가능성’을 가졌다. 인류의 역사를 살펴보건대 오직 인간만이 문화를 가졌고, 그 문화의 바탕 위에 다시 발전에 발전을 거듭하는 모습을 보여왔다는 점이다. 다른 동물의 세계에서도 모듬살이를 하는 모습을 찾을 수는 있지만 인간처럼 새로운 문화를 열어가는 모습은 찾을 수가 없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인간 능력의 가능성의 한계는 존재할까. 철학자 키에르게고르는 허공의 거미줄에 매달린 거미를 보면서 ‘중간적 존재자로서의 인간’을 발견하였다고 한다. 이 거미를 기준으로 최상위는 ‘신의 경지’이고, 최하위의 경지는 ‘동물의 경지’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인간은 거미와 같은 중간적 존재로서 본능적으로 신의 경지에 가까운 위로 올라가려고 애쓴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인간으로서 최선을 다한 결과 신의 경지에 이른 사람들을 우리는 ‘깨달은 사람’, 또는 ‘성인’ 등으로 추앙하고 받드는 것이다. 거꾸로 인간임을 포기하고 끝없이 추락하여 동물의 경지로 떨어진 사람 또한 적지 않으니 이들을 일컬어 ‘인면수심(人面獸心)’이라 하지 않는가.

근년에 들어 해가 갈수록 존속 살해범이 늘어나고 있다 한다. 이를 어떻게 해석하면 좋을까. 단순히 세상살이가 어렵다고 치부하기에는 너무하지 않는가. 여기에다 최근 통계에 의하면 ‘노인학대’ 신고 건수가 급격히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더욱 놀랄 일은 신고 건수의 85%이상이 ‘아들’에 의해 저질러진 것으로 조사되어 가정에서 노인학대가 심각한 것으로 드러났다.

인간이기를 포기하고 본능적으로 신의 경지로, 지고의 선(善)의 경지로, 아름다움의 세계로 향하고자 하는 인간은 어디로 가고, 저급한 동물의 경지에서 헤매고 있는 것일까. 다만 아쉽고 부끄러울 뿐이다. 남을 가르치고 이끌어야 할 자리에 있는 사람으로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어받고 널리 펴야 할 불자로서.

김형춘 (반야거사회 회장) 글. 월간반야 2006년 10월 제71호

이웃나라의 역사왜곡

금년 4월 초순이면 일본의 역사교과서 검정본이 공개된다. 그러면 2001년도의 일본 역사교과서 왜곡 사태 때와 같은 상황이 한국에서 또 벌어지고 한국은 이 문제로 1개월 정도는 버글거릴 것이다. 이 같은 추측이 이즈음 일본인들의 일반적 생각이라고 얼마 전 일본을 다녀온 사람이 쓴 글을 읽었다.

작년 여름 중국의 이른바 ‘동북공정’이 문제되어 고구려사를 자기 역사 속에 귀속시키겠다고 나왔을 때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국민여론은 우리의 역사를 도둑질 당했다고 들끓었고, 국민들은 분개하여 표현할 수 있는 갖가지 행동으로 분풀이를 하였다. 그 결과 ‘고구려

연구재단’ 설립이라는 가시적 성과(?)를 얻고는 몇 달 가지 않아 시들하고 말았다.

이웃나라의 ‘역사왜곡’이나 ‘역사강탈’이 있을 때마다 거의 예외 없이 우리의 행동은 감정표현 위주의 화풀이를 했다. 그리고는 자성(自省)의 귀결점으로 ‘국사교육 강화’를 외쳤다. 원인도 한결같이 국사교육에 임하는 철학이나 그것을 바탕으로 한 교육과정을 바꾸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수차례 유사한 상황을 겪고도 한 걸음도 더 나아가지 못하고 오히려 퇴보한 느낌이다.

인류사회의 역사는 어느 정도 왜곡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아메리카 인디언의 역사는 왜곡의 수준을 넘어 아주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가야’의 역사가 그러했고, ‘백제’의 역사가 신라에 의해 얼마나 묻히고 왜곡되었겠는가. 이처럼 역사는 강자의 손에 의해 끊임없이 수정 혹은 왜곡된다는 것이 역사적 진실이다. 강자와 승자는 늘 자기의 역사를 쓰고 싶어 하니까.

1995년 김영삼 전 대통령은 한일관계가 지금과 비슷한 상황에서 “일본의 버르장머리를 고쳐놓겠다”고 했지만 이후 외교관계만 악화되었다. 지난 23일 노 대통령은 대 국민 서신을 통해 최근 일본의 독도영유권 분쟁 시도, 교과서 왜곡, 신사참배 등 우경화 움직임에 대해 단호한 정면대응 의지를 천명하고 “반드시 뿌리를 뽑도록 하겠다”고 했는데 한번 지켜볼 일이다.

그렇다면 진정 주변국의 왜곡된 역사관을 시정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두말할 나위 없이 힘을 기르는 것 뿐이다. 분노나 배척이나 원망은 능사가 아니다. 일시적으로 국민감정을 자극하여 단합의 계기를 삼을 수는 있어도 근본적인 해결책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주변국에서는 ‘국내용’이라고 비웃지 않았던가. 고금을 통해 국제관계에서의 진리는 힘이다. 영원한 친구도 영원한 적도 없다. 우리의 현대사에서 중국과 대만이 그러했고, 소련과 러시아가 그러했고, 일본이 이런 역사를 증명해주고 있지 않는가. 이제 연례행사처럼 맞을 이웃나라의 역사왜곡을 근원적으로 차단해야 할 방법을 찾고 실천해야 할 때가 되었다.

한 민족이 자기의 개성을 가지고 국가적인 자주권을 유지하려면 그 나라의 교육적 바탕이 ‘자국어(自國語)’와 ‘자국사(自國史)’가 되어야 한다. 이것은 편협한 민족주의나 더 나아가 국수주의적 발상이라 비판할지 모르나, 민족적인 합의에 기초한 국민교육의 철학적 바탕이며 우선순위에 놓아야 할 국정의 지표가 되어야 한다. 오늘날처럼 국민적 가치관이 혼란스러울 때 생각나는 분들이 있다면 박은식ㆍ단재 신채호ㆍ한힌샘 주시경ㆍ외솔 최현배 선생님 등이 아닐까.

지금까지 우리는 몰라서 행하지 못한 것이 아니다. 듣는 지혜(聞慧), 생각하는 지혜(思慧)와 실행하는 지혜(修慧)를 우리 불가에서는 3혜라고 했고, 듣고 이해하고 깨달은 바를 생활로 실행하지 못한다면 깨달음이 아니라고 했다. 어쩌면 그것은 거짓이거나 비슷한 것이거나 속임수일 뿐이라고 했다. 남을 탓하기 전에 힘을 바탕으로 우리의 바른 대응태세를 정립하고 과감하고 지속적인 실천이 요구될 따름이다.

김형춘 香岩 (반야거사회장) 글. 월간반야 2005년 4월 제53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