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를 흔드는 바람

단풍든 나무 잎이 살며시 한 잎 두 잎 떨어지다가 바람이 불면 우수수 한꺼번에 여러 잎이 떨어져 흩날리는 모습을 이번 가을에도 여러 번 보았다. 산에 사는 사람이 나뭇잎 떨어지는 모습을 보면 갑자기 산이 쓸쓸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굳이 애상의 감정에 물들지 아니해도 나무 밑에서 바람에 떨어져 뒹구는 낙엽을 보면, 공연히 해가 지는 일몰을 볼 때처럼 세월 가는 것이 원망스러워지는 마음이 되더란 말이다. 무심히 오고 가는 세월이지만 이 세월 속에 사람은 정한(情恨)을 풀고 산다.

얼마 전 축담 밑에 심어 둔 장미가 철 늦은 꽃 한 송이를 피웠다. 너무나 선명하게 핀 하얀 백장미 꽃이었다. 무심히 꽃을 바라보다가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 “뜻 밖의 흰 꽃을 보면 친가에 부음이 들려온다더라. 상주(喪主)가 된다고 하던데….” 하는 생각을 하면서 몸이 몹시 불편하다던 속가 노모의 안부가 생각났다.

속가의 노모는 나를 이 세상에서 가장 무정한 자식이라고 했다. 그래도 중 된 아들의 체면을 생각해 주었는지 이 세상에서 가장 불효막심한 놈이라고 괘씸해하지는 않고, 무정한 자식이라고 두고두고 탄식을 했다는 걸 나는 잘 알고 있다. 35년의 중노릇을 하면서 노모를 만난 횟수는 한 손의 손가락이 겨우 찰 정도에 불과했다. 어쩌다가 만나 뵙는 인사에도 중이란 핑계로 인색해버렸던 것이다.

이튿날 승가고시 산림에 강의가 있어 직지사에 가 있었는데 상좌 인해로부터 속가 노보살이 별세했다는 전화가 왔다고 무연 수좌가 알려주었다. 순간 “드디어 사별의 슬픈 인연이 왔구나. 참회기도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이후 며칠간은 남모르는 회한을 되 뇌이며 우울한 상념에 사로잡혀 있었다. 어쩌다가 못난 아들을 낳아 효도 한번 받아보지 못하고 평생 가슴에 한이 맺히게 살아온 당신의 애처로운 모성이 출가한 무정한 사문에게는 너무나 부담스럽고 거추장스러웠다. 불효에 대한 한없는 자탄도 일어났지만 천륜이니 혈연이니 하는 것이 슬픔의 얼룩 밖에 남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누군가가 인연도 건강한 인연이 있다고 했는데 서로에게 아픔과 슬픔을 남겨주는 인연이라면 천륜도 병이 들어 건강을 잃은 것일까? 이조 중기의 명승(名僧) 진묵대사는 모친이 돌아간 뒤 제문을 손수 지어 ꡒ만세에 만세를 더 살더라도 자식의 마음에는 오히려 차지 않는데 백년 안에서 백년도 다 채우지 못하니 어머니의 명이 어찌 그리 짧습니까?ꡓ하고 탄식한 글이 생각난다.

장례식에도 참석 못한 죄책감 같은 회한도 남아 있고 아우들 보기에도 체면이 안서 명색에 암자의 주인처럼 사는 처지라 49재를 붙였다. 막상 재를 치루는 도중에 반야학당이나 경전교실의 멤버들에게 미안한 것이 한 두 가지가 아니고 폐 끼치는 것도 참으로 많다. 무어라 고마움을 표할 수 없이 감사한 인연에 합장을 해야 할 일들도 가슴에 새겨진다. 부모상(喪)이라는 것이 자식에게 있어서는 천형(天刑)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가장 지중한 부모 자식의 인연 속에 어찌 천형이 있어야 하는가? 떠난 뒤의 초상을 바라보고 차라리 슬픈 인연의 아름다운 회상을 먼 하늘가에 그림으로 그려 걸어두고 싶다. 중이 되어 사는 신세의 안타까움이 세속적 인연의 상처로 남는 것을 다시 한 번 느낀다.

24년 전에는 부친이 별세 했다. 그때는 큰절의 풋내기 강주 시절이었다. 부자간의 억울했던 사연을 가슴에 안고 회한의 눈물을 소리 없이 흘리며 조석 예불시 참회진언과 함께 망축을 드리며 49일간을 기도를 했다. 그렇게 위패 모시지 않는 재를 혼자의 기도로 봉행한 참회재는 부처님에 대한 신앙을 가슴 전역에 깊이 깔았다. 하나의 슬픔이 한 사람의 정신을 성숙하게 하는 힘이 된다는 사실을 그때 알았다. 누구의 시에 “갈증을 목 축이는 한 방울 이슬 같은 인연을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고 했던가? 이슬 같은 인연이라. 그렇다! 돌아가고 나서 생각해 보면 살아생전의 인연이 모두가 이슬 같은 인연이다. 이 이슬 같은 인연이 마음속에 죄송한 후회의 빗방울을 떨어뜨린다.

수욕정이풍부지(樹欲靜而風不止)

자욕양이친부대(子欲養而親不待)

나무가 고요히 있고자 하나 바람이 그치지를 않고 자식이 효도해 봉양하고자 하나 부모는 이미 떠나버렸다. 자신이 원망스러운 것이 괜히 나무를 흔드는 바람이 원망스럽다. 하나씩 떨어지는 잎을 왜 그냥 두지 못하고 어지러운 바람이 불어 우수수 낙엽이 한꺼번에 떨어지게 하는가? 잘 가지 않던 고향, 전화번호도 모르고 지냈던 속가이지만 한 쪽 부모라도 고향에 부모가 있다는 것과 돌아가 버려 없다는 것이 하늘과 땅의 차이인 것 같다. 마치 퐁퐁퐁 솟아나는 맑은 물이 있는 샘과 물이 말라 없어진 마른 우물의 차이처럼 느껴지면서 갑자기 가슴이 메말라버리는 것만 같다. 또 참회의 재를 올리며 다시 진언을 외운다. “옴 살바못자모디 사다야 사바하”

지안스님 글. 월간반야 2004년 12월 제4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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