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화두 두는 법

진로형탈사비상(塵勞逈脫事非常)이니
긴파승두주일장(緊把繩頭做一場)이어다
불시일번한철골(不是一飜寒徹骨)이면
쟁득매화박비향(爭得梅花撲鼻香)고

진로를 멀리 벗어나는 것이 예사 일이 아니니
승두를 꽉 잡고 한바탕 지을지어다.
한 차례 추위가 뼈 속에 사무치지 않으면
어찌 매화가 코를 찌르는 향기를 얻으리오.

어떤 스님이 조주(趙州)에게 묻되, “개가 불성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조주 스님이 답하시되 “무(無)” 하셨으니, 이것이 ‘무자(無字)’ 화두의 시초인 것이다.

종문중(宗門中)에서 이 ‘무자’를 제일 많이 칭찬을 해놓았으니 ‘무자’ 화두에 대해서 말씀해보면, 부처님께서는 일체 중생이 모두 불성이 있다고 하셨는데 조주 스님만은 왜 “무(無)” 라고 하셨겠는가?

이 ‘무자’에 대해서 있다 없다,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 참으로 없다, 허무(虛無)다, 이와 같이 이리저리 두 갈래로 분별하지 말고 능소(能所)가 끊어지고 상대도 없이 다만 홑으로 “어째서 ‘무(無)’ 라고 했는고?” 하고만 생각해라.

여기에는 공(空)도 또한 거둘 수 없으며 유상(有相)·무상(無相)을 붙일 것도 없다. 필경 알 수 없는 의심 하나만이 남으니 이것만 추켜들어라. “조주 스님은 어째서 ‘무’라고 했는고?”

만약 조주 스님의 “무” 라고 하신 도리를 입껍데기로만 따져서 알았다고 하면 타일(他日)에 염라대왕의 철방을 맞을 것이다. 한번 조주 스님의 “무(無)” 라고 하신 뜻을 바로 보아야 생사해탈을 하는 법이다.

삼세제불의 골수요, 역대조사의 안목이다. “무(無)” 라고 말할 때 이미 그 의지가 확 드러나 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참으로 영특한 사람이면 당장 언하에 대오할 것이다.

이 ‘무자’ 화두에 대해서 별별 해석이 다 나와 있다. 혹자는 일체 명근을 끊어버리는 칼이다, 또는 일체를 열어주는 자물쇠통이다, 일체를 쓸어버리는 쇠빗자루다, 나귀를 매어두는 말뚝이다 등등의 한량없는 말들이 나와 있다.

그렇다. 나는 여기에 삼십 방을 주리라.

‘무자’ 화두하는 학자들이여, 조주 스님의 “무” 라고 하신 그 의지가 “무” 에 있는 것이 아니다. 기실(其實) 엉뚱한 곳에 있는 것이니 제발 조주 스님의 뜻을 찾으려고 애쓸지언정 ‘무자(無字)’에 떨어져서 광음을 헛되이 보내지 않기를 재삼 부탁하노라.

이 ‘무자’ 화두 지어감에 좋은 비유 설화가 있으니 옛날 중국 당나라에 천하일색인 양귀비가 있었는데 당 현종의 애첩으로 궁성에 살고 있었다. 이 양귀비와 정부 안록산은 서로가 보고 싶어 못 견딜 지경이었다.

빈호소옥무타사(頻呼小玉無他事)라
지요단랑인득성(只要檀郞認得聲)이로다

자주 소옥이를 부르는 것은 다른 일이 아니라
다못 낭군에게 소리를 알리고자 함이로다.

양귀비는 자기의 종인 소옥을 아무 할 일 없이 큰 소리로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자꾸 부른다. 왜 양귀비는 소옥을 그렇게 부를까? 다만 낭군에게 자기의 음성을 들리게 하기 위함이다. 양귀비의 뜻이 소옥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소옥을 통해서 자기의 음성을 안록산에게 알리는데 본 뜻이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무자’ 화두는 ‘무자’ 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니고, “무” 라고 말씀하신 조주 스님에게 뜻이 있는 것이니, ‘무’라는 말을 천착(穿鑿)하지 말고 “무” 라 말씀하신 조주 스님의 의지를 참구할 지니라.

또 어떤 스님이 조주 스님께 묻되, “어떤 것이 ‘조사서래의’ 입니까? (如何是祖師西來意)”하니 답하시되, “판치생모(板齒生毛)니라.” 하셨다. 그러면 조주 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을까? 이 화두도 ‘무자’ 화두와 같이 ‘판치생모’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니고 “판치생모” 라고 말씀하신 조주 스님께 뜻이 있는 것이니, 학자들은 꼭 조주 스님의 뜻을 참구할 지어다.

“어째서 ‘무’라 했는고?” 하는 것과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하는 것은 조금도 다름이 없는 것이다.

이렇게 화두를 지어감에 망념이 일어나지 않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중생살이 전체가 망상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화두가 잘 된다, 잘 안된다, 망상이 생긴다, 마음이 산란하다 등의 생각이 있으면 화두의 순일지묘(純一之妙)가 없게 되는 것이니, 일어나는 망념이 무엇이든 간에 그것을 상관도 말며 두려워도 말 것이다. 그대로 내버려두어라.

그리고는 그저 알수 없는 의심 하나만 간절히 간절히 일으킬 것이며, 없어지거든 또 일으키고 부지런히 거각하여 끊어지지 않게만 자꾸 이어주어라. 이렇게 오래오래 물러나지만 않고 해나간다면 견성 못할까 걱정할 것도 없는 것이다.

고인의 말씀에, “만약 능히 신심만 물러나지 않는다면 누가 견성성불을 못하리오(若能信心不退 誰不見性成佛).” 라고 하셨느니라.

또한 공부를 지어감에 속효심(速效心)을 내기가 쉬우나 이는 절대 금물(禁物)이다. 이것으로 인해 마음이 급해지고 생각이 쉬어지지 않게 된다. 이렇게 되고 보면 화두는 점점 멀어지고 자리가 잡혀지지 않게 된다.

또 공부 지음에 깨닫기를 기다리는 마음을 두지 말아야 한다. 자연적으로 일어나는 망념은 할 수 없거니와 ‘크게 깨달아야겠다’ 라는 망념을 고의로 일으킬 필요는 없는 것이다.

‘좌선함에 눈을 감고 하는 수가 많은데 눈을 감고 할진댄 혼침(昏沈)과 무기(無記)에 떨어지기가 일쑤며, 또한 흑산하귀굴(黑山下鬼窟)에 떨어진다’ 고 고인이 밝게 말씀하셨으니, 두 눈을 평상으로 뜨고 허리는 쭉 펴고 맹렬하면서도 간절한 마음으로 알 수 없는 의심 하나만 깨끗 깨끗이 자꾸 일으켜 매하지 않게 할 따름이다.

흔히들 화두를 머리에 두고 참구하기가 쉽다. 여기에 속효심이 가해지게 되면 상기(上氣)가 일어나게 된다. 모든 열기가 전부 머리로 치밀게 되어 머리 아픈 병이 생기게 된다. 이 상기병이 생기면 공부하기가 지극히 힘이 든다. 심하면 머리로 출혈이 되며 몸은 걷잡을 수 없이 쇠약해진다.

내가 소시에 이 상기병으로 말할 수 없는 고통과 헤아릴 수 없는 해를 받아 왔으나 결국은 자치지방(自治之方)으로 완치시켰다. 그 자치지방이란 다른 것이 아니고 호흡법이다. 이 호흡법은 참선과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에 여기에 간곡히 말을 하는 바이다.

정좌(正坐)하여 숨을 천천히 내어 쉬되, 단전 부위를 허리 쪽으로 살며시 당기면서 천천히 내쉰다. 그 다음 들어오는 숨은 팔부쯤 들어 마신다. 그때 자기 신체기량(身體氣量)에 따라 잠깐 멈추되 고통스럽지 않을 만큼 하면 족하다. 이때 화두는 단전(배꼽 밑 일촌 삼푼)에 두고 의심을 잘 관(觀)해야 한다.

그리고 이 호흡법은 숨을 내쉴 때 묘가 있는 것이니 코에 부드러운 털을 대어도 흔들리지 않을 정도로 천천히 쉬되 이때도 역시 화두를 잘 관해야 한다. 들어가고 나오는 숨에는 상관말고 오직 단전에 둔 의심만을 묘하게 관해야 한다.

처음에는 잘 되질 않으나 언제든지 생각이 나거든 서너 번씩 하다가 차츰 길들여 가면 머리가 청쾌해지고, 정신이 맑아지며, 눈이 깨끗해짐을 느낄 것이다. 나중에 화두가 순일해지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호흡이 자연히 잘 되는 것이다.

일파유조수부득(一把柳條收不得)하야
화풍탑재옥난간(和風搭在玉欄干)이다

한 웅큼 버들가지를 거두어 잡지 못하여
바람과 함께 옥난간에 걸어 두노라.

불소(不少)한 허물을 옥난간에 걸어 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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