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 주인공을 찾음은 길흉화복의 해결보다 생사와 육도윤회로부터 해탈하는데 더 큰 목적이 있다고 보여집니다. 스님께서는 모든 중생들의 주인공 자리가 하나로 같아 한마음이라 하시는데 선문염송 233칙에 천동각선사가 밝힌 주인공 자리와 오대산 무착스님의 깨달은 이후의 말씀, ‘문수는 네 문수고 무착은 내 무착이다’ 한 것을 보면 깨달은 주인공이라 하더라도 동일한 한마음이라 하면 크게 어긋난 것이 아닌가 합니다. 큰스님께서 이미 깨달아 생사윤회에서 벗어나셨다면 중생들은 놓아두고라도 한마음의 제자들만이라도 이미 해탈이 함께 이루어졌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지금도 주인공을 찾는 노력들을 하고 있습니다. 옳게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大行)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일체중생에게는 불성이 깃들어 있으니 일체중생이 다 부처’라고 하셨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중생은 누구나 부처될 성품을 갖추었고 그것은 깨닫고 못깨닫고에 관계없는 근본성품인 것입니다. 부처님의 그런 말씀을 믿고 닦은 결과로 깨닫게 되는데 무엇을 깨닫느냐 하면 금생의 근본 성품이 부처자리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지 달리 무엇을 얻는 것은 아닙니다. 천년동안 어둠에 잠겨 있던 동굴에 촛불하나 밝히니 어둠은 본래 있던 것이 아니더라는 말이지요. 그렇게 자신의 본래 성품이 불성임을 깨닫고 보니 부처와 둘이 아니요 그냥 한자 리 한마음이더라 이겁니다. 네마음 내마음 하지만 그것은 객진번뇌에 물들어 있을 때이고 참성품의 자리에선 그대로 회통이 되니 내마음 네마음이 없고 그냥 광대무변하여 공이고 한마음이고 이곳 저곳이 없이 한자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마음 한자리 한몸입니다. 그걸 전체의 입장에서 보면 한마음이라 해도 좋고 그냥 부처라 해도 되고, 개별적 입장에서 보면 주인공 자리라 해도 되고 참나라 해도 좋고 그렇습니다. 이름은 그냥 이름일 뿐이니 뭐라고 불러도 좋습니다. 아버지 하시든지 하느님 하시든지 여래 하시든지 다 좋습니다. <금강경> 말씀에 여래를 명호로 보느냐 마음으로 보느냐 하지 않았던가요? 내가 주인공이라 한 것도 이름인데 요즘 사람들이 자주 밖에서 찾고 바깥부처에 의지하려하니까 안으로 들이대라는 뜻에서 주인공을 발견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역대 선사들이 다 안으로 일심을 말하는 까닭을 아실겁니다. 또 깨달은 자리에서 경계를 대하니 공과 색이 둘이 아니기에 색은 색대로 좋더라, 여여하더라, 그래서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더라 이겁니다. 그러니 문수는 네 문수고 무착은 내 무착이더라 하는 소리지요. 박선생께서 깨닫고 나니 박선생 모습이 그 모습 아닐까요? 근본에서 둘이 아니요 한마음인 고로 색이 곧 공이요 공이 곧 색이요, 공과 색이 다르지 않지만 색이 무너져 공이 된다고 한다면 어찌 색과 공이 둘이 아니란 말을 하겠습니까? 일체중생엔 다 부처될 성품이 있어 근본에서 한마음이지만 그것을 깨닫는 것은 누가 대신해줄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제가 맛을 보고 제가 알아야 하는 것이지 그렇다더라 하는 것은 진정으로 아는게 아닙니다. 본래는 다 같은 허공인데 스스로 벽을 쌓아 경계를 단단히 해놓았으니 그 벽을 헐고 본래 허공에 경계가 있지 않았다는 것을 알라고 가르치는 게 아닙니까? 물론 스승의 역할이 없는 것은 아니지요. 병아리가 껍질을 깨고 나오려면 어미 닭이 따뜻하게 품어줘야 하고 마지막 순간에 껍질을 쪼아주기도 하듯이 스승의 역할이 있습니다. 그러나 알 껍질을 깨고 나오는 것은 병아리의 성품이고 몫입니다. 스승이 깨달았고 한마음 한자리이니 따라서 제자도 다 해탈했어야지 왜 수행을 계속해야 하느냐 하시는데 그 말씀은 문자에 걸린 말씀입니다. 부처님과 보살님들의 서원이 대자대비요 일체중생을 다 건지시겠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위없는 깨달음을 얻으신 이후에는 더이상 수행할 중생이 없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 말도 말입니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