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 전생의 선업이 금생의 선과로, 금생의 악업이 내생의 악과로 나타날 것으로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분의 글을 보니까 ‘불교는 궁극적 으로 윤회를 끊고 따라서 전생과 후생을 영원히 단절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성불못한 사람은 계속 윤회하는 것인지요.
大行) 지은대로 받고 뿌린대로 거두는 것은 철칙입니다. 거기엔 예외가 없습니다. 그러니 선업은 선과를 낳고 악업은 악과를 낳지요. 그런데 중생의 성품은 본래 청정하고 밝아서 그대로 여여하니 더럽다 깨끗하다 할 것이 없습니다. 누구나 다 부처될 자격을 갖고 있다 하는 것도 다 그말입니 다. 그렇게 불성의 자리에서 보면 너 나의 구별이 없이 평등하여 일체가 둘이 아닙니다. 내가 전체요 전체가 나인 것입니다. 말하자면 따로 나다 너다 할 주체 가 있질 않습니다. 그러니 윤회의 주체인들 있겠습니까? 뭔가 영혼이라는 실체가 있어서 그것이 과보를 받고 그것이 윤회한다고 생각하신다면 그건 잘못입니다. <금강경>에서는 무릇 모든 상을 다 허망한 것이라 가르치고 있습니다. 꿈 같 고 그림자 같고 물거품 같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색과 공을 둘로 보아서는 안된 다는 가르침입니다. 내가 공부하는 분들에게 ‘주인공을 믿고 주인공에 일체를 놓아라’ 할 때의 주인공은 내 주인공 네 주인공이면서 동시에 전체 한마음 주인공입니다. 그래 서 개별적인 실체로서의 주인공이 아닌 이름의 주인공이요 공(空)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사람들은 그렇다면 악업 선업은 누가 짓고 악과 선과는 누가 받느냐고 할테지만 그것은 다 무명*집착이 낳는 업식의 작용일 뿐입니다. 우리가 육신을 지닌 한 생명체로 태어나기 위해서는 부모의 정혈을 빌어 몸뚱 이를 만들고 거기에 영원한 생명과 업식이 계합됨으로써 태어나게 되는데 바로 영원한 생명이 곧 불성이요 진여요 본래면목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자신의 참 성품을 깨닫지 못하기에 업식을 나의 근본바탕이라고 생각해서 윤회하는 주체가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누누히 깨닫기를 강조하신 참 성품의 자리에서 보면 선과니 악과니 하는 것과 육도윤회라는 게 다 업식의 놀음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윤회의 주체 는 없다 하겠는데 또 업식의 작용이 있으니 윤회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열심히 공부해서 마음의 정체를 깨달으신다면 본래로 물들지 않고 나지도 죽지도 않는 참성품을 알게 될 것이고 그때가면 영혼이 있느냐 없느냐, 윤회하느냐 않느냐의 의문도 저절로 풀리게 될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연기법도 그렇습니다. 이것이 있으므로써 저것이 있고 저 것이 있으므로써 이것이 있다, 또는 그 반대로 이것이 없으면 저것이 없다는 근 본도리를 말씀하신 것이지요. 그러니 생이라는 시작이 있으므로 노사라는 끝이 있는 것입니다. 생도 그렇습니 다. 한 생각 일어나니까 집착이 생기고 그 집착이 생을 낳게 했지요. 부처님께서는 무시이래로, 즉 시작을 말할 수 없는 무명이 시작되면서 유가 있 고 생이 있게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고로 생이 없으면 유가 없고 유가 없으면 궁극엔 무명이 없고 무명이 없으면 그대로 여여하고 물들지 않는 구경열반이라 하셨습니다. 질문하신 분께서는 자꾸 형상의 세계를 떠올리시는 모양인데 형상을 여의고 마 음의 세계에서 자신의 근본이 도대체 무엇인가를 참구해보기 바랍니다. 내가 오늘의 자신을 있게한 근본자리, 주인공에 일체를 놓고 맡기라 하는 것은 한 생 각 돌고 도는 윤회의 굴레를 따라가지 말고 본래 물들지 않고 나지도 죽지도 않는 참 성품을 믿고 귀의하라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