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살이 국토를 장엄하여 불국토를 이루는데 무상의 여의보주를 가졌으니 보살은 이 보주를 항상 굴리어 대위신력을 발휘하고 중생을 제도한다.
이 보주는 마하반야바라밀이다. 관세음보살도 마하반야바라밀로 관자재하시어 오온개공하여 일체 고액에서 해탈하신다. 일체 보살이 반야바라밀다로 일체 공포를 타파하고 자유를 성취하며 열반을 증득하고 성불한다.
마하반야바라밀다는 이것이 대신주다. 대명주다. 무상등주다. 무등주다. 마하반야바라밀다가 구르는 곳에 일체 고가 없어지며 일체의 장애가 타파되며 삼악도가 없어진다.
광명천지가 열리고 일체 소원이 성취되며 자재해탈을 얻게 된다. 일체 불 보살과 함께 하게 되어 그 위신력을 쓰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불광보살은 생각마다 걸음마다 항상 마하반야바라밀을 힘차게 염송하는 것이다.”『불광법회요전』
항상 읽었던 낯익은 글이지만 읽어보면 우리가 닦고 있는 것을 다시 말해주는 것 같아서 의미가 새롭습니다. 우리는 현상세계에 살지만 현상의 고난에서 탈출하려고 하면 마음을 먼저 비워야 합니다. 마음 가득히 현상세계의 고난과 어려움과 미움과 사랑과 또 애착 같은 것을 마음 가득히 두고 있어서는 우리의 환경에서 조화스럽고 평화스러운 성과가 오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마음을 바꿔야 합니다.
마음에 있는 것이 이루어집니다. 이 말을 항상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그리고 반야바라밀에는 부처님의 생명, 부처님의 진리, 부처님의 위신력이 함께 하는 것이기 때문에 어떤 장애도 반야바라밀 염하는 일념 하에 소멸됩니다. 끊임없이 일체 장애가 온다 하더라도 소멸됩니다. 우리는 반야바라밀이 가지고 있는 걸림 없는 신력을 쓰는 사람인 것입니다.
며칠 전에 어느 거사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저한테 “바라밀 염송을 하는데 바라밀 관을 할 때는 어떻게 합니까.”하고 물어왔습니다. 우리 불광형제들이 구도정진때는 바라밀 관을 한다고 앉아 계실 겁니다.
반야바라밀을 입으로 부르고 생각으로 염합니다. 반야바라밀을 입으로 부르는 것은 송(頌)이고 생각으로 염하는 것은 염(念)입니다. 염해서 염하는 것을 보는 것을 관(觀)이라 합니다. 염하는 것을 염하는 것, 염하는 것을 관하는 이것이 반야바라밀관입니다.
그러니까 소리를 내서 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하면 바라밀송이 되고, 거기에 염, 생각이 함께 있으면 염송이 되고, 염송을 하면서 염송하는 그 자리를 항상 비춰보면 그것이 바라밀 관이 되는 것입니다. 바라밀관할 때는 소리도 내지 않고, 생각도 움직이지 않고, 반야바라밀 생각 일으킨 그 자리만 끊임없이 지켜보면서 반야바라밀을 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반야바라밀관하는 사람은 반야바라밀을 자기 마음 속에서 끊임없이 지켜보고 소리내는 것도 아니고, 입을 움직이는 것도 아니고, 염이 염하는 것을 보기 때문에 염하는 것도 끊어진 그러한 관계가 되는 것이 반야바라밀관입니다.
이것이 구도정진 때 아니면 각자 집에서 하고 오나가나 차안에서든지 어디든지 시간 있는 자리에서 다 하시리라 믿습니다마는, 특별히 물어와서 거기에 대한 설명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제가 알고 있기로는 그 거사님은 아주 소년시절부터 불법에 귀의해서 수행을 많이 하고 오늘 우리 불광법회에서도 모든 사람들에게 부러움을 살만큼 성실한 수행을 하고 있는 것으로 믿고 있습니다.
반야바라밀은 온 몸으로 하는 것입니다.
입으로 외우고, 생각으로 외우고, 생각을 생각하는 그 생각하는 물건 가지고 반야바라밀을 관하고, 이렇게 함으로써 바로 내 생명의 율동, 내 생명의 환희, 내 생명의 움직임, 이것이 바로 반야바라밀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잘 되는 사람이 있고 잘 안 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마하반야바라밀을 입으로 부르는데도 생각은 딴 생각이 올 때가 있고, 또 생각을 하면서도 어느덧 딴 생각이 끼어들어 와서 생각이 지속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제가 형제들에게 권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전에 같이 모여 공부할 때에 여러 차례 말씀드렸습니다마는 바로 호흡입니다. 앉아서 바라밀 염송(염불)할 때에 조용히 입을 다물고 코로 호흡을 들이마셔서 아랫배(단전), 지하 삼층(배꼽 밑 세 치)에 멈췄다가 서서히 토합니다. 들이마실 때는 약간 빠르게 해도 괜찮고 머물렀다가 토할 때 약간 완만하게 천천히 합니다. 그리고 이 호흡은 아주 진지하게 합니다. 진지하게 될 때 호흡하는 생각과 호흡(후)하는 근육운동이 함께 갑니다. 호흡과 생각이 같이 갑니다.
그렇게 해서 호흡을 익혀두시면 그 다음에 반야바라밀 염송은 염으로 하고 호흡도 호흡대로 해서 호흡하는 곳에 반야바라밀 염송이 같이 따라가고 반야바라밀과 항상 호흡이 함께 있어서 마음이 산란해 지지가 않습니다. 호흡에 힘을 얻으면, 안정력, 흔들림이 없는 깊은 마음, 즉 정력(定力)이 빨리 이루어집니다.
저도 처음에 선방에 와서 참선하다가 상기(上氣)가 되었습니다. 어거지 공부를 잘못해서 골이 아프고 골이 무겁고 해서 무얼 할 수 가 없었어요. 골이 쏟아지는 것 같아 서지요. 그래서 제가 존경하는 노장님께 말씀을 드렸더니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자네 틀렸네. 수좌가 상기가 오르면 과부 바람난 걸세.”
그러니까 뭐 하겠다고 생각하지 말고 마음놓아 버려라고 하시더군요. 그런데 이 말씀은 참선이고 화두고 뭐고 다 놓아버려야 낫는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 때 제 나이 스물 다섯 살인데 죽으면 죽었지 어떻게 이 길에 뛰어들어서 중간에 쉴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그 다음에 별 방법을 다 쓰다가 소천 노화상을 만나서 호흡법을 배웠습니다. 호흡도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순호흡법도 있습니다. 역호흡법도 있고 역호흡법은 태식이라 그러지요. 애기가 배 안에 있을 때 태안에서 하는 호흡입니다. 폐기법, 토기법 등 여러 가지 수행 법이 있더군요. 그 가운데 한 가지를 선택해서 하라고 해서 제가 호흡을 했습니다마는 처음에는 호흡을 하려니까 화두가 안 되고, 화두를 하려니까 호흡이 안되고 해서 가만히 생각하다가 호흡이 익어질 때까지는 화두를 팽개쳐버리자고 하며 화두를 내버리고 앉아서 진지하게 다부지게 호흡만 했습니다. 그래서 얼마간 했더니 성과가 났습니다.
골 무거운 것도 나아지고 골 아픈 것도 그 때 가셨습니다. 그리고 몇 시간 앉아 있어도 몸이 가뿐하고, 앉아서 정진하는 좌정력도 생겼습니다. 그 다음에 잠자는 것, 그 전에는 잠 안 자면 큰일나는 것처럼 알고 하루에 몇 시간은 잠자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잠이 싹 줄어 버렸습니다. 잠도 세 시간 네 시간 정도 자면 되었고 그나마도 내일 그렇게 안 잤으니까 며칠이 지나도 잠을 자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잠을 안 자도 되기에 잠 안 자기를 며칠씩 해 보았습니다.
일주일도 안 자보고 열흘도 안 자보고 보름도 안 자보고 나중에는 이십 일도 잠을 자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뭐가 되는 게 아니기 때문에 한 달에 한 번씩 일주일식 안자본다는가 그렇게 해가면서 또 조금씩 잠을 자둬가면서 정진하던 것이 생각납니다.
반야바라밀을 생각으로 염하더라도 호흡으로 항상 호흡과 함께 하는, 호흡 들이마시는 것, 호흡 머무는 것, 호흡 토하는 것, 마하반야바라밀이 하나가 되어서 하면 산란한 생각, 이 생각 저 생각 이러나는 생각도 없어져 버리고, 안정력도 생기고 수마 같은 것도 없어지고 몸이 사뭇 가벼워집니다. 그리고 거기서 얻은 것들이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그래서 반야바라밀을 염송할 때 산란심이 있으신 분들은 호흡을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될 수 있으면 모든 분들이 호흡을 해서 안정된 정력을 토대로 하는 정진력을 길렀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되면 호흡은 호흡대로 되고 반야바라밀은 반야바라밀이 하나가 되어서 딱 앉아 있으면 호흡과 반야바라밀이 하나가 되어서 아주 사뭇 공부에 안정력과 정진력을 얻게 됩니다.
우리의 현상계는 구름에 가리운 달을 보는 것처럼 그것이 완전하고 원만한 경계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현상경계란 미혹된 마음이 보는 세계이므로 그것은 진실존재 법성본연의 반야바라밀 경계가 되지 못합니다. 부처님 말씀과 같이 꿈과 같고 환과 같고 그림자 같으며 잠깐이기 때문에 이슬 같고 번개 같은 것입니다. 이러한 현실 경계가 비록 꿈이나 환이라고 하여 그것을 버리고 달려나갔다고 하여 몽환에서 벗어나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필경 미망세계를 돌고 돌아 끝이 없습니다.
왜일까? 다름이 아니라 어둠을 치우자면 불을 밝혀야 하지 않겠습니까. 불을 밝힐 때 어둠은 스스로 그 존재의 허무를 나타내고 맙니다. 우리는 마땅히 끊임없이 스스로를 돌이켜 바라밀의 광명을 발견하여야 합니다. 바라밀을 염하여 반야광명이 빛나는 곳에 허무한 어둠, 온갖 고난, 불안 공포가 자취조차 없이 사라집니다. 고난을 근원적으로 소탕하는 방법은 반야바라밀을 염하고 관하는 데 있다는 말은 이에서 온 말입니다.
반야바라밀을 염하고 반야바라밀의 마음을 열 때 진리의 전성적인 힘 부처님의 위신력이 넘쳐나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구름 걷힌 푸른 하늘에는 찬란한 햇살이 막힘 없이 쏟아지는 것입니다. 마음을 현상에서 돌려 반야바라밀에 뛰어들었을 때 거기에는 부처님의 지혜 부처님의 자비 부처님의 은덕을 보게 되는 것이니 이것이 바라밀행자의 행복이라 할 것입니다.
온 천지가 부처님 자미광명뿐인 것입니다. 일초일목에서도 신비한 자비의 힘이 움직이고 있는 것을 보게되고 부처님의 자비가 얼마나 겹겹이 우리를 감싸고 있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 안의 현상이 영원 안정 은혜의 현상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여기서 감사와 환희와 물결은 터져 나옵니다. 아, 행복할지라. 반야바라밀행자여.
여기서 현상계는 허망한 현상이고 반야바라밀은 진리요, 실답게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실다운 자기 생명에서부터 벗어났을 때, 실다운 부처님 공덕세계에서 마음을 딴 데로 돌렸을 때, 괴로움과 고난과 장애가 있지만 고난과 괴로움과 고통이 닥쳐오거든 생각을 돌이켜서 내 생명의 실다운 참모습인 마하반야바라밀 쪽으로 마음을 돌립시다. 그곳에는 부처님의 한량없는 광명이, 한량없는 위신력이 넘쳐나게 흘러오는 곳이 됩니다. 그렇게 되면 어떤 고난과 재난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행복할지라. 불광불자여.
光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