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 우리는 순수불교라고 하는 이름 하에 반야바라밀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순수불교란 무엇인가.
부처님께서 보신 바, 일체 중생이 모두 여래공덕을 지니고 있고 일체 중생이 원래부터 완전한 여래장이다. 조금도 물들은 바, 변한 바가 없다. 그 공덕 내용이 부처님 말씀 그대로 부처님과 더불어 조금도 차이가 없다. 그렇게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에 부처님께서 보신 바를 그대로 믿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그렇게 보셨지만 그것이 안 보여, 나는 범부요, 그렇게 해서 범부를 붙들고 범부성에 빠져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것이 세속범부들의 생각들입니다. 불광은 처음부터 부처님의 이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보신 바가 틀림없다. 나는 비록 범부같이 보이고 무능한 것같이 보이고, 과거에 좋지 않은 일을 몇 번이고 반복했지만 나의 본성인 즉 부처님의 보신 바가 틀림없다. 본성은 귀한 사람이다. 덕스런 사람이다. 지혜있는 사람이다. 부처님과 똑같은 사람이다. 부처님과 같은 권능을 가지고 평화와 번영을 가져올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는 자다. 불광반야바라밀 순수불교는 그렇게 믿는 것입니다.
아마 이 가르침은 부처님께서 이 땅에 나오신 은혜를 가장 완전하게 받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것은 깨달아야 된다. 견성해야 한다. 도통해야 한다. 수행을 많이 해야 그렇게 되지. 그럴 가능성이 있을 뿐이지 아주 그런 것은 아니다. 미래 성취의 가능성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부처님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중생이로소이다 하고 중생성을 붙들고 앉아서 부처님께서 보여주신 바 진실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말씀을 의심하지 않을 때까지 가려면 시간이 걸리는 것입니다.
조사 스님들이 공부하시다가 눈이 열려서 하시는 첫 말씀들이 대개 공통적인 것이 있습니다. 그때 이후로 부처님을 의심하지 않고, 법을 의심하지 않고, 승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때부터 삼보를 의심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바로 믿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진리를 보시고 진리의 눈으로 보신 바를 믿는 것입니다.
이 점이 우리 불광의 수행일 뿐만 아니라 일체 모든 형제들이, 모든 이웃들이, 일체 중생들이 모두 이것을 믿고 배워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스스로 빛나는 존재, 위대한 존재, 덕스런 존재, 행복한 모든 요소를 갖춘 존재인 것을 스스로 알고 스스로 그와 같은 신선한 행을 할 것입니다.
첫째 문제는 자성, 우리 본성입니다. 여래장이라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던 이 여래장은 우리 본성입니다. 이 본성은 잊어버린다고 없는 것이 아닙니다. 어디 가지 않습니다. 불교를 비방하고 배반하는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역시 어디 가지 않습니다. 모두가 바로 진리본성이다 하는 점에 있어서는 조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자기 자신이 불성이다. 여래장이다 하는 것을 스스로 깨닫는 것 이것이 제일 중요합니다.
깨닫지 못할 때는 부처님 말씀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배워서 믿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범부가 아니요, 내가 여래성을 갖춘 신성한 자다. 존엄한 자다. 부처님의 위대한 능력을 함께 지니고 있는 자다 하는 믿음을 회복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이 믿음이 선 사람은 몇가지 마음 속에서 돌이켜 본 바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거듭 말씀드리는 바이지만 본래 우리 스스로는 존귀한 사람들입니다. 내가 존귀한 사람이고, 우리 부모님이 존귀하여, 우리 가족들 형제와 온 이웃이 다 존귀한 것입니다. 이 존귀하다 하는 것, 존엄하다 하는 것, 신성하다 하는 것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그것을 긍정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본래 믿었든 안 믿었든 그런 것입니다. 붜님이 나오셨든 안 나오셨든 그런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스스로 존귀하다고 하는 것을 자가해야 할 것입니다.
두 번째는 우리의 존재가 누구에 의해서 만들어진 존재가 아니라는 것, 또 닦아서 이루어진 존재가 아니라는 것, 수행하고 많이 닦아서 성취하는 여래성이나 불성이나 여래장이 아닙니다. 부처님이 보시는 바 우리의 진실인 즉은 원래부터 그런 것입니다. 스스로 존재하는 것, 자존인 것입니다.
세 번째로 생각해야 될 것은 우리들 인간 하나하나는 부처님의 완전구족한 덕성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무한자입니다. 무한의 지혜와 덕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무한의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진리의 강물이 있다고 그러면 그 강물이 우리 생명 위에 넘쳐 흐르고 있습니다. 만인은 그렇게 절대 권능적인 지혜와 창조의 권능을 지니고 있습니다.
무한자의 자기한정이라는 표현을 종종합니다마는 무한자는 형상이 될 수 없습니다. 형상화 되려면 어떠한시간과 장소에 어떠한 조건으로 한정지어서 광덕이라는 사람이 저렇게 생긴 사람이다라고 그렇게 한정지었을 때 그런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니까 무한성, 절대성에 자기한정이 새로운 창조를 가져 오는 것이라는 점에 있어서 만인은 자기가 자기 스스로를창조하며 자기 세계를 창조할 권능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창조하든가, 마음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마음에 그리는 것입니다. 본래 무한성인데 마음에 그리면 그리는 만큼 한정이 되는 것입니다. 한정이 되면 마음에 있는 것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있는 것은 마음에 있는 것입니다.
매사가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에 있는 것이 이루어지는 것이다라고 생각하면 마음 자체의 뿌리인 자기 생명은 무정의 내용이 자기 마음에 있는 것입니다. 자기 마음에 있는 것이 이루어진다. 집안 환경이 좋거나 나쁘거나, 친구지간 사이가 안 좋거나, 특별히 어떤 사회환경이 좋거나 안 좋거나 하는 그 모두는 바깥에의 누구누구 때문이라고 하는 그 누구의 책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의 마음에 그 원인이 있다는 것입니다. 마음에 잇는 것이 이루어지고, 마음에 있는 것이 눈앞에 나타났기 때문에 마음에 있는 것이 나타나고자 하려면 그 마음을 고쳐야 합니다.
구호로는 평화를 외치면서도 마음에서는 공포를, 파괴를 생각하고 있다고 한다면 그 평화는 아무리 이루려해봐도 이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평화를 이루고자 하거든 만인의 가슴에 평화를 간직해야 합니다. 평화를 끊임없이 생각하고 끊임없이 그 마음을 지켜나가야 합니다.
이 접은 창조성이라고 하는 무한성을 지니고 있는 인간으로서 마땅히 항상 자기 마음에서 있는 것이 이루어진다고 하는 점을 얘기해서 일체유심조의 가르침을 실천할 생각을 해야 하겠지요.
또 한가지 중요한 것은 이 여래장, 불성이라고 하는 우리의 본성, 이것은 내 본성, 네 본성 따로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동일자입니다. 동일법성, 한 물건이며, 대립된 자가 아닙니다. 이것은 참 중요한 발견입니다. 모두는 남남이 아니고, 미워할 대상이 아니요, 대립할 대상이 아니다. 본체는 한 몸이다. 이렇게 본다면 제일 중요한 것은 자비와 협동입니다. 자비심, 이것이 진리본성인 여래장세계를 여는 문이고 여래성의 공덕대로 사는 길입니다.
우리 마음 가운데 왜 착한 일을 해야 하는가. 왜 베풀어야 하는가. 왜 정의를 따라야 하는가. 그 이유를 어렸을 때부터 의심해 왔다고 그랬습니다. 여기서 해답이 다 나오는 것입니다. 만인은 다 남남이 아닙니다. 서로 대립할 존재가 아닙니다. 서로가 한몸인 까닭에, 동일자인 까닭에 이웃에게 베풀 때 그 사람에게 복이 돌아오는 것이고, 한 손이 건강하면 그 몸이 건강한 것입니다. 바른손, 왼손, 바른발, 왼발, 온 몸이 한몸으로 구성되어 있지만은 그 모가 건강할 때 몸이 건강한 것입니다. 한사람이라도 불행한 사람이 있어서는 이 사회가 평화하고 행복한 세상이 될 수가 없지요.
동일자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우리 사회가 많은 문제를 반성하게 됩니다. 어떤 계층간 대립이라든가, 아니면 서로의 이해대립을 통해서 차등사회가 만들어진다든가 하는 그 모두는 존재의 진실을 어기는 것이기 때문에 행복이 올 수가 없고 성공이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동일자라 하는 것을 깨달아서 절대적으로 다툼의식 대립의식을 버려야 합니다. 다툼의식 대립의식을 버리면 자비심, 협동심, 자기본성에 입각한 본성의 흐름을 곧 알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절에 들어와서 맨 처음에 배우는 보조 스님 법문이 있습니다. 아마 그 법문에 그렇게 나와 있는 걸로 압니다. 간탐-물건에 대해서 간탐심을 내는 것은 그것이 마군의 짓이고, 자비한 마음으로 보시를 한다고 하는 것은 이것이 법왕의 아들 즉 법왕자다. 그런 법왕의 아들은나 자신의 진실법, 여래장 그 자체의 광명이다. 이렇게 말을 해야 하겠지요.
이렇게 본다면 한 나라가 망하고 한 민족이 망하고 한 계층이 망하는데 그 사회와 그 국가와 그 세계가 평화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망국을 둔 채 세계평화가 있을 수 없다고 지키지 못해서 망국을 만들었다고 그러면 자기 나라 자기가 지키지 못해서 세계평화를 깨뜨리는 불행을 불러오는 것이지요.
또 침범에 의해서 이웃나라에 망국을 만들었다고 하면 망국의 존재라고 하는 침범한 그 사람이 세계불난을 일으킨 것이다, 그런 말이 되는 것이지요. 그것은 그러한 사회뿐만 아니라 경제적인 시책에 있어서나 사회적인 문제에 있어서 다 마찬가지입니다.
얼마 전에 브라질인가 어딘가 분명한 기억이 안 납니다마는 세계의 각국 대통령이 다 모였었지요. 우리나라에서는 국무총리가 갔다고 신문에 그랬습니다마는 자연보호, 자연보호만 하더라도 자연을 파괴한 자가 어느나라인가 소위 선진국이라고 하는 나라들이 대량 물량을 소비하고 물량을 생산하는 과정에서 오염을 극대화시켰다고 해서 부담을 주라고 서로 떠들다가 결국 화려한 이름 밑에 결실은 별것 없이 그저 선언적인 몇마디 합의를 보고 일단 헤어졌다고 하는 것을 신문에서 봤습니다. 어쨌든 근본이 동일자인 까닭에 세계가 한세계요. 나라가 한나라입니다. 어떤 나라가 망하고 어떤 나라가 흥한 법이 없고 어떤 지역이 흥하기 위해서 어떤 지역이 파멸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근래 종종 생각하는 것입니다마는 아프리카에는 사백만 명이니 사천만 명이니 하는 사람들이 기아에 허덕이고 있고 몇백 만 명이 죽어가고 있다고 전해옵니다. 그러면서도 우리 인류세계는 그런 사실에 대해서 대책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 경제적으로 계산해서 자기 나라 단우에 경제의 벽을 쳐놓은 관계로 해서 결국 한족에는 양식이 부족해서 굶어 죽어가고 있는데 한쪽에는 생산제한을 하고 생산억제를 하고 그에 대한 보조금을 주어가면서까지 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성을 가진 인간사회가 버젓이 그렇게 행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동일자며, 우리는 각각 남남이 아니고, 한몸이요, 하나의 진리요, 하나의 생명입니다. 서로 함께 살고 있는 것이라는 철저한 자각이 없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하고 생각해 봅니다. 그렇다면 무엇보다도 부처님의 이 가르침, 모두는 한몸이요, 모두는 진리의 주인이요, 모두는 절대 신성 존엄의 주인이다 하는 사실, 모두는 동체다하는 사실을 전해주는 전법에 근거한 것이 다시 생각납니다.
거듭 우리가 마음 속에 다짐해야 할 것은 인간권위입니다. 인간의 신성, 인간의 존엄, 인간의 권위를 생각해서라도 이 동일자 의식, 자존의 문제, 창조성, 이것을 우리는 배워야 하겠습니다.
우리 모두는 범부가 아닙니다. 범부는 무능력자가 아닙니다. 범부는 정토에 태어나기 위해서 어떤 과정을 거칠 사람이 아닙니다. 모두가 본래 완전무결한 진리의 본체성입니다. 부처님과 더불어 한생명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 권위, 인간의 존엄, 인간의 절대가치 그것에 대해서 깊은 긍정을 하고 이를 향해서 온갖 방면에서 노력을 해야겠습니다.
중요한 것은 한 사람 한 사람입니다. 서로를 존귀하고 권위스러운 분들이다 하고 자기 스스로뿐만 아니라 함께 한 모든 경우에 동일 생명이다 하는 것을 자각하는 것입니다.
우리 불자들만큼 가슴에다 진리를 품고 평화를 위해서 인류 동일체를 위해서 세계를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우리 불광 한 사람 한 사람의 안정된 기쁨의 국토와 환경을 만든다는 것에 그치지 아니하고, 온누리 온세계 온중생을 하나의 생명, 하나의 진리 하나의 평화 번영으로 이끌어야 할 이유가 거기 있는 것입니다.
알고 보면 우리 형제들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참으로 큽니다. 이 일은 아는 사람에 의해서 행해야 합니다. 서로 대립하고 끊임없이 전쟁을 확장하고 서로 다툼이 정당화되어서 파괴가 연일 이어지고 있는 이 속에서 오직 밝음과 평화와 번영과 안녕을 그리고 궁극적인 인간의 행복을 지켜줄 사람은 우리 불자밖에 없습니다. 모두가 자각을 가지고 용기를 가지고수행과 전법에 힘을 씁시다.
光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