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에 둘을 보태면 몇인가?

기자 “지금 미국에서는 선의 선풍이 불고 있다고 합니다. 숭산 큰스님께서도 큰 역할을 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미국에서 포교 활동을 하셨던 가운데 특기할 만한 일이 있으면 들려주시지요.”

스님 “그곳 미국에 박사학위를 다섯 개나 받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의 아버지가 아들 친구를 붙들고 우리 아이를 제도해 달라는 부탁을 받은 모양이에요.

브라운대학, 하버드, 예일, 콜럼비아, 버클리…. 아무튼 이렇게 훌륭한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땄다는 이 친구는 아는 것이 많은 데다가 얼마나 오만한지 어느 누구의 말도 잘 듣지 않을 뿐 아니라 누구도 말을 잘 붙이지 못했다는 거예요.

그런데 한번은 이 박사의 친구가 ‘얘, 너 세계적으로 유명한 동양선사가 일본에 계시다가 오신 분이 있는데, 너한테 질문이 있다고 한다더라.’ 그러니까 그 친구 말이 ‘어떤 사람이든지 오라고 해.’하며 자신이 만만해 가지고 대답하더라는 거예요.

이렇게 해서 결국 그 선사와 박사가 한자리에서 만나게 되었지요. 그때 나는 샌프란시스코에 ‘버클리 젠 센터’라는 꽤 큰 선방을 가지고 있었는데, 한번은 예불하고 법문을 마치고 질문을 받는 시간인데 그 친구가 말한 만물박사가 앉아 있지 않겠어요.

그래서 내가 ‘질문을 하러 왔으면 질문을 하라.’ 했더니 ‘내가 언제 질문이 있다고 했느냐? 선사가 질문이 있다고 해서 왔는데 무엇이든지 물어 보시오.’하면서 그만 화를 벌컥 내더란 말이야.

그래서 가만히 생각해 보니 요놈이 서로 만나게 하려고 중간에서 농간을 부린 것이란 생각이 들어서 ‘그럼 좋다. 내가 질문이 있다.’ 이렇게 말을 해놓고는 ‘네가 100% 믿고 있는 자신있는 말을 한 마디만 일러다오.’

그랬더니 이 녀석이 머리를 컴퓨터식으로 회전하면서 그 말을 찾기 시작하는 거예요. 한참을 지나도 대답을 못해요.

그래서 내가 ‘네가 100% 믿는 말을 안다.’ 그랬더니 ‘어떻게 내 마음을 그렇게 잘 아느냐?’고 큰소리를 치더군요. 그래 내가 다시 물었지요.

‘하나에 둘을 보태면 몇이냐?’

‘셋이 아닙니까?’

‘그래 맞다.’

‘그거야 국민학생도 아는 거 아닙니까? 나는 좀더 고상한 말을 찾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고상하고 고상하지 않은 말이 어디 있느냐? 네가 100% 믿는 말이면 됐지….’

‘그렇지만 내가 박사학위를 다섯 개나 받은 사람인데 하나에다 둘 보태면 셋이라는 말을 해야겠습니까?’

‘너는 나보다 하나 더 몰라.’했더니 ‘무얼 더 아느냐?’고 반문을 해와요.

‘나한테 물어봐. 하나에다 둘 보태면 몇이냐고?’ 그랬더니 ‘도대체 하나에다 둘 보태면 얼 맙니까?’하고 물어왔어요.

‘없다. 제로다.’ 그랬더니 ‘내가 박사학위를 다섯 개나 땄어도 하나에다 둘을 보태면 아무 것도 없다는 얘기는 처음 들었다. 왜 그렇게 되느냐.’고 하면서 화를 벌컥 내요.

내가 대답해 주었지요.

“어떤 사람이 나에게 사과를 한 개 주었다. 내가 먹었지, 그 다음에 사과를 또 두 개 주었지. 그런데 그것도 또 먹었어. 그 사람은 분명 나에게 사과를 세 개 주었는데 사과는 없어졌어. 그러니까 제로가 되지 않았느냐, 숫자라는 것과 실제는 다르다. 《반야심경》에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이라는 도리가 바로 여기에 있다. 있는 것이 없는 것이요, 없는 것이 있다는 도리다. 우리 불교는 유치원생이 하는 것이야. 내가 또 하나 묻겠는데 하나 더하기 둘은 셋과, 하나 더하기 둘을 제로라는 것 중 어느 것이 맞느냐?”

“둘 다 맞지요.”

“그게 틀린 거다. 나는 다 맞지 않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어디서 나왔느냐? 둘은 또 어디서 나왔느냐? 셋은, 제로는 어디서 나왔느냐? 누가 만든 거냐? 개가 셀 수 있느냐? 닭이 셈을 할 줄 아느냐? 너의 생각이 하나, 둘, 셋을 만들었고, 너의 생각이 하늘과 땅을 만들었지. 본래는 하늘도 땅도 없고, 하나, 둘, 셋도 없는 거야. 자 예를 들어보자. 저 눈(雪)이 무슨 색깔이냐?”

“흰색입니다.”

“그것 틀렸다.”

“왜 그것이 틀립니까?”

“네가 눈한테 물어보아라.”

“눈이 어떻게 대답합니까?”

“대답을 안한 걸 보니 눈이 희다는 말을 안한 것 아니냐? 네가 눈이 희다고 했지 눈이 언제 내 색깔이 희다고 얘기하더냐?”고 했더니 한대 얻어맞았다고 하더구만 하하…(웃음)

“해를 너는 썬(SUN)이라 하고 나는 해라고 한다. 물론 자기 멋대로 지은 거지, 태양이라는 것은 본래 이름이 없어…. 이 모든 것은 네 생각이 만들었을 뿐이야.

네 생각이 만들었으니까 네 생각이 없어지면 하나 둘 셋이 있겠는가? 이게 색즉시공 공즉시색에서 무색(無色) 무공(無空)으로 넘어가는 도리라는 거야. 네 생각이 태양하고 끊어질 때 어떻다고 생각하겠는가? 자 어떤가? 생각 이전의 세계를 생각해 본 일이 있는가?”

“없다.”

“데카르트도 나는 생각하기 때문에 존재한다고 그랬거든. 그러니까 나라는 것도 생각에서 나온 거야. 내 생각이 딱 끊어져야 내가 없어지는 거야. 내가 없다는 것은 내 마음이 텅 비어지고 대허공 같이 되고, 대허공 같이 되면 대원경이 되어가지고 맑은 거울 같아서 산에 비추면 산이 되고, 물에 비추면 물이 되고 비추는 그대로야. 하늘은 푸르고 물은 흘러가고, 개는 멍멍 짖고, 소금은 짜고, 설탕은 달고…. 이것이 실상이라는 거다.”

이렇게 《반야심경》의 도리를 설명하자 박사학위 다섯 개라는 것도 아무 쓸모가 없음을 알았는지 ‘선생님 제자가 되겠습니다.’ 이러는 거예요.

이런 쟁쟁한 놈을 굴복시켜 놓으니 그 밑에 사람들은 아무 것도 아니야. 서양 사람들은 한국 수좌들처럼 윽박지르며 시키면 통하지가 않아요. 머리들이 논리적이기 때문에 가르치는 것도 하나하나 논리적으로 가르쳐서 자기들의 이론이 밑받침되지 못하는 곳까지 끌고 가야 해요.

하나하나 따져서 합리적인 옳은 답이 나와야 믿습니다. 그래서 많은 미국인들이 출가해 스님이 되었고 지금 화계사 국제선원에 많은 스님들이 동안거 참선 정진하고 있어요. 아주 열심입니다.

이렇게 먼 외국에서도 부처님 법을 찾아 화계사로 오는데 우리 화계사 불자님들도 새해에는 더욱 열심히 부처님 법을 공부해야 합니다.”

기자 “네, 열심히 공부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댓글 달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항목은 *(으)로 표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