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속지 않으려면

무명(無明)이란 밝지 못한 마음, 가려진 마음이다.

밝지 못한 마음이 나면 본래 밝고 깨끗한 자기를 잊어버리고 바깥 경계에 동요하게 된다.

어떤 처녀가 한 농군을 보았다. 인물이 훤칠하게 잘 생겼고 직분도 좋고 가문도 좋았다. 남이 알까 모르게 사랑하고 싶은 충동이 일어났다.

“아, 저런 사람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그래서 남몰래 편지를 썼다.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죽을 때까지 함께 살고 싶습니다. 나의 모든 것을 다 바치고 싶습니다.’
상대방도 그 편지를 받고 알아들었다.

“좋습니다. 당신이 그렇게 나를 좋아한다면 언제 한 번 만납시다.”

그렇게 해서 만나고 나니 마음이 더욱 통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저를 어떻게 내 애인을 만들까 하는 생각에서 눈·귀·코·혀·몸 뜻을 지속적으로 접촉하였다. 받아들이는 것이 따뜻하였다. 물론 그 가운데서는 좋지 않은 점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좋지 않은 것은 다 버리고 좋은 점만 사랑하였다. 사랑하다보니 통째로 갖고 싶었다.

그래서 결혼식이라는 것을 하였다. 그랬더니 뜻밖에 거기서 아이를 배더니 아이가 태어났다.

그래서 좋아서 어찌나 기쁘던지 “어허둥둥 내 사랑아 – ” 하고 먼저 사랑하던 애인 이상으로 그것들을 사랑하고 기쁘게 길렀다.

그랬더니 나이가 드니 점점 노쇠해지더니 병이 들고 갖가지 고통거리가 생겨 슬픈 정경을 바라보다가 그만 죽고 말았다.

“괜히 왔다 가는구먼 -.”

그때사 깨달았다.

“낳아도 안 낳아도 상관없는 것. 내 가슴만 이렇게 찢고 간다.”고 후회하였다.

이것이 12인연이다. 최초의 일념 남자와 여자를 보는 최초의 일념, 그것이 무명이다. 남자라는 것을 보지 않았으면 그 다음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런데 남자를 보았기 때문에 그 최초의 한 생각에 의해서 편지를 쓰는 행(行)이 이루어지고, 피차가 서로 알게 되는 식(識)이 이루어졌으며, 여기에 좋아한다는 명색(名色)이 붙고,

눈·귀·코·혀·몸·뜻(六入)으로 접촉하여 그 좋은 것을 받아들여[受], 사랑하고[愛], 사랑하다보니 아주 자기 것을 만들어[取] 아주 한 살림을 차리고[有] 한 살림을 차려 살다 보니 아이를 낳았다[生]. 난 것이 어느새 늙어[老] 병들고[病] 갖가지 고통사를 연출하다가 그만 죽어버리니[死] 그것이 인생이었다.

‘차라리 한 생각을 일으키지 아니하였다면 이런 결과는 없었을 것’하고 후회를 하여도 그때는 이미 소용이 없었다.

어떤가? 인생이란 이런 것이다. 어디 인생뿐이던가? 이 세상 모든 것이 이렇게 되어 성·주·괴·공(成·住·壞·空)하고 생·주·이·멸(生·住·異·滅)하는 것이다.

그러면 아무 생각도 하지 말고 그냥 바보처럼 살라는 말인가?

그건 아니다. 무명에 의해서 일으키는 결과는 이렇지만 명(明)에 대한 일은 이런 결과가 없다. 밝고 밝은 마음에는 취하고 버리는 것도 없고, 예쁘고 미운 것도 없고 나고 죽는 것도 없으므로 그 속에서 일어나는 만 가지 행사는 생사와는 관계가 없다.

그러므로 불교의 생활은 명(明)의 생활이요, 지혜의 생활이다. 명·지혜가 없는 생활은 고통의 생활이다. 명에 의한 삶은 설사 고통이 온다 하더라도 그것이 고통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으므로 늙든지, 죽든지, 병들든지 상관이 없다.

늙으면 늙어서 좋고 병들면 병들어서 좋은데 공부하고 죽으면 죽어서 교훈을 남긴다. 제불보살들이 죽어서 ‘선명(善名)’을 남긴다 하는 것은 바로 이것을 의미한 것이다.

그러면 그 무명이라고 하는 것이 어떻게 생기는 것인가? 갑자기 바람처럼 생기는 것이므로 ‘홀연무명(忽然無明)·무명풍(無明風)’이라 말하는 것이다.

바람이 불면 파도가 생긴다. 한 파도가 생기면 만 파도가 생긴다. 그래서 일파자동만파수(一波磁動萬波隨)라고 하지 않는가? 누가 시켜서가 아니다.

그런데 꼭 시키는 것과 같거든, 그것은 신이 시키고 귀신이 장난한 것이 아니고 전생에 맺었던 인연력(因緣力)이 통한 것이고, 욕심이 동한 것이다. 똑같은 사람을 보는데도 좋은 사람이 있고 싫은 사람이 있거든, 다 이것도 인연 때문이야.

그래서 불교학자들은 이 12인연을 시간적으로 3세에 배대하여 무·명·행·식은 과거의 업력에 의해서 일어난 것이요, 명색·육입·촉·수·애·취·유까지는 금생에 맺어 일어난 인연이며, 생·노·사·우·비·고·뇌는 미래의 결과다.

이렇게 하여 삼세양중인과(三世兩重因果)를 조직하였다.

그리고 또 어떤 사람은 심리학적인 측면에서 무명을 맹목적인 삶에 비유하여 목적 없이 눈에 띄이는 대로 집착된 생활을 한 결과를 이 12인연으로 설명하는 이도 있고, 하나의 인생을 생리학적인 면에서 설명하여 놓은 사람도 있다.

예컨대, 부모님들의 맹목적인 사랑은 무명·행·식이요, 어머니 태에 들어가 자리를 잡고 정신과 육체가 분리되고, 눈·귀·코·혀·몸·뜻이 생겨 세상에 태어나는 것은 명색·6입·촉이며,

태어나서 온갖 것을 받아들이고·사랑하고·취하여 자기의 소유를 만드는 것은 수·애·취·유며, 다시 제2의 생명을 낳아 늙고 병들어 죽게 한 것은 생·노·사·우·비·고·뇌다. 이렇게 설명한 이도 있다.

어쨌든 12인연은 이 세상 만물이 시간 속에서 어떻게 성·주·괴·공하고 생·주·이·멸 하느냐 하는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그러니까 그 만드는 것은 자기의 마음이다. 콩을 갖다가 두부를 만들 때 갈아서 간수를 치고 엉기게 하여 순두부를 만들어 놓고 가다를 들이대는데, 그 틀을 둥글게 할 것이냐 모나게 할 것이냐 하는 것은 만드는 사람의 마음 여하에 달린 것 아니다.

만들어 놓고 나면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예쁘다·밉다·잘 생겼다·못 생겼다 하지만 결국 그 놈을 뚝배기 속에 들어가 보글보글 끓다가 입 속에 들어가면 진국만 다 빨리고 나머지는 똥이 되어 화장실에 배설된다.

허망한 일이지, 그러니 무상하다고 않겠는가? 그러나 그 무상 속에서 이 세상은 이루어진다.

그러니 그것도 우습게 생각하니까 우습지 멋있게 생각하면 또 멋있다. 그러니까 모든 것이 생각이고 마음이다. 마음에 속지 않으려면 무명심을 일으키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崇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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