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의 근본계율인 5계 중 제1계는 불살생계(不殺生戒)이다. 불교의 모든 계율 중, 청정을 생명으로 삼는 스님들만이 지키는 구족계(具足戒)의 제1계만이 ‘음행하지 말라’는 불음계(不淫戒)일 뿐, 나머지 재가계, 보살계, 사미계 등은 모두 불살생계를 제1계로 삼고 있다.
그렇다면 왜 대부분의 계율에서는 불살생계를 첫머리에 둔 것일까? 그 까닭은 생명존중 정신과 자비심을 기르기 위해서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자신의 부귀영화를 바라지 않는 사람은 없다. 누구나가 이 육신만은 병 없이 항상 건강하고, 우리 가족은 늘 편안하며, 하는 일마다 다 잘 되기를 희망한다.
그러나 그것이 뜻대로만은 되지 않는다. 하찮은 일들이 점차 큰 문제로 발전하여 밤낮으로 괴롭히니, 근심 걱정이 끊이지 않고 편안할 날이 별로 없다. 1년 12달 365일을 지내놓고 나서 가만히 돌이켜보라. 병든 날, 근심하고 걱정한 시간, 남하고 다투며 싸운 시간 등을 빼고 나면 참으로 마음 편한 날이 며칠이나 되었나를? 여기에다 다시 죽음의 사촌이라고 하는 잠자리에 든 시간까지 제하여보라.
또 있다. 잠을 깬 낮이라 하더라도 옳지 못한 생각, 나쁜 행동을 한 동안은 떳떳한 삶을 살았다고 할 수 가 없을 것이다. 도리어 그 시간은 병을 앓거나 떳떳한 삶을 위해 근심 걱정하며 산 시간보다 더 가치가 없는 시간이요, 삶의 중지라고도 할 수 있는 잠든 시간만도 못한, 그야말로 썩은 삶이요, 죽은 삶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과연 우리가 누리는 가치있는 시간이란 얼마만큼이나 되는 것일까?
육신의 괴로움과 생활고로 인한 괴로움, 그리고 마음의 괴로움…… 이와같은 괴로움으로 가득차 있는 것이 우리의 인생이다. 그러나 이런 괴로움, 저런 괴로움이 가득하다 할지라도 인생에 있어서 가장 큰 괴로움은 역시 죽음이다.
재산이 소중하고 부귀영화가 아무리 좋다해도 그것을 생명과 맞바꿀 수는 없다. 그 까닭이 무엇인가? 이 세상에 있어 생명보다 소중한 것은 없기 때문이다. 아무리 장수를 하고 유복한 일생을 산 사람이라 하더라도 “이제 살만큼 살았으니 그만 죽어라”고 하면 섭섭해하지않는 사람이 없다. 끝없이 살려 하고 무조건 죽기 싫어하는 것이 생명에 대한 모든 중생의 공통된 본능이요, 전 우주와도 바꿀 수 없고 부처님이나 하느님보다 더 소중히 여기는 것이 생명인 것이다.
인간뿐만이 아니다. 나는 새도 미물인 곤충의 경우에 있어서도 생존을 지속하려고 하는 강렬한 욕망은 커다란 애착으로,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애념(愛念)으로 정착되어 가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중생은 생의 반대인 죽음을 두려워하게 되고, 어떻게 해서든지 죽음을 면해보겠다는 생각이 잠재의식의 밑바닥에 깊이 자리잡게 되는 것이다. 나아가 생에 대한 애념이 강한 만큼 죽음에 대한 혐오(嫌惡) 또한 비례하기 마련이다. 생을 희구하고 죽음을 미워하는 마음은 어찌할 수 없는 중생의 본성인 것이다.
이와같이 모든 중생이 본능적으로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 생명이기 때문에 남의 생명을 끊는 것보다 더 큰 죄업은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내 목숨이 소중한 것과 마찬가지로 남의 목숨도 소중한 것이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불교계율의 첫머리에 살생을 저지르면 안된다는 불살생계를 둔 것이다.
또 한 가지 이유는 살생이 불성(佛性)의 씨앗이 싹트는 것을 막는 행위일 뿐 아니라 자비심을 애초부터 거역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자애로운 마음으로 능히 중생을 즐겁게 해주고
슬퍼하는 마음으로 능히 중생의 괴로움을 뿌리뽑네
以慈能與衆生之樂
以悲能拔有情誌苦
참된 불자라면 사랑하는 마음[慈心]으로 중생에게 즐거움을 베풀어주고, 가여워하는 마음[悲心]으로 중생들의 괴로움을 건져주어야 한다. 그런데 이 자비는 다른 중생만을 위하는 것이 아니다. 바로 ‘나’ 자신을 위하는 것이다. 바로 이 자비는 우리를 깨달음의 길로 인도하는 지름길이요, 부처를 이룰 수 있게 하는 덕행(德行)이다.
부처님께서 불살생계를 제1계로 삼은 까닭은 불교정신의 결정체인 자비심을 일깨워 해탈의 세계로 나아가게 하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日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