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장 1. 마하

불법은 세간 속에 있으며
세간을 떠나지 않고 깨달음이라
세간을 지나 따로 깨달음을 구하는 것은
마치 토끼의 뿔을 구하려는 것과 같도다

마하반야바라밀은
최존이요 최상이요 최제일이며
상도 없고 공도 없고 불공도 없나니
이것이 곧 여래의 진실상이로다

중국 당나라 때의 약산유엄선사는 당대의 대표적 고승인 마조도일과 석두회천선사의 법을 동시에 이은 대선지식이다.

이 스님은 좀처럼 법상에 올라가 설법하는 일이 없었다. 어느날 ‘큰스님의 상당법문 듣기가 원’이라는 대중들의 뜻에 따라, 원주는 스님께 법문을 간곡히 청하였다. 원주의 간청을 뿌리치지 못한 스님은 마침내 상단법문을 허락하였다.

“큰스님께서 상당법문을 하신다.”는 소문이 퍼지자 인근의 신도들까지 수만명이 법상을 차린 광장으로 몰려와서 귀하디 귀한 스님의 법문을 듣고자 하였다.

스님이 법상에 오르자 대중들은 숨을 죽이며 법문을 기다렸으나, 법상에 앉은 스님은 침묵으로 일관하다가 법상에서 내려와 방장실로 들어가버렸다.

원주가 뒤를 따라가서 물었다.

“스님께서는 상당법문을 허락하셨으면서 왜 설법을 하지 않으십니까?”

“원주야, 경에는 경사가 있고 논에는 논사가 있고 율에는 율사가 있거늘, 날더러 어찌하라는 것이냐? 언설은 교요, 행은 율이요, 선은 말이 없는 것임을 모르느냐?”

약산유엄선사는 언어를 초월한 법문을 보였고 무언의 대설법을 펼쳤던 것이다. 이처럼 법문은 언설을 떠난 것이요, 법의 문은 들어가는 것이지 듣는 것이 아니다.

불교의 참된 해탈법문은 문을 볼 수 있는 자만이 능히 들을 수 있다.

그러나 부처님은 중생을 위하여 이와같은 해탈법문을 말을 빌려 설명하셨다. 언설을 떠난 해탈법문을 굳이 한 말로 표현한다면 ‘마하반야바라밀’로 풀어볼 수 있다.

마하반야바라밀! 이것은 부처님의 해탈경계와 해탈지견을 함축성 있게 표현한 말이다.

먼저 마하의 뜻부터 살펴보기로 하자.

마하란 무엇인가?

“마하는 대야라.”

모든 경전과 선대의 고승들은 ‘크다’는 말로써 마하를 풀이하였다. 그리고 그 크기는 작은 것과 비교하여 볼 때 상대적으로 큰 것이 아니라, 감히 그 무엇과도 비교가 되지 않는 절대적인 크기이며 한없이 큰 것이라고 하였다.

과연 절대적으로 한없이 크다고 하면 얼마나 큰 것인가?

먼저 범어의 마하와 음이 똑같은 서양어의 ‘마하(Mach)’에 대하여 잠시 살펴보자.

서양어의 마하는 곧 ‘초음속’을 뜻한다.

오스트리아의 물리학자 마하 에른스트(Mach Ernst)가 초음속의 연구로 마하수의 개념을 도입하게 됨에 따라, 음속돌파에 대해 그의 이름을 붙여서 사용하게 된 것이다.

즉 사람의 말소리는 1초에 340m를 가며, 이 말소리보다 더 빠르면 음속돌파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비행기가 1초에 340m를 돌파하면 마하 1.0, 1초에 680m를 돌파하면 마하 2.0이라 부르고 있다. 머지 않아 마하 2.5가 나온다고 하니, 그 빠르기는 육안으로 쉽게 식별되지 않을 것이다.

이에 비해 마하반야바라밀의 ‘마하’를 과학적으로 살펴보면, 음속돌파가 아니라 광속돌파, 전광속돌파라고 할 수 있다. 1초에 지구를 일곱 바퀴 반을 도는 빛의 속도, 음속의 백만 배나 되는 30만km를 눈 깜짝할 사이에 가고 오는 속도를 마하라고 하는 것이다.

이것을 바꾸어 말하면 ‘무한능력, 영원생명’이라고 할 수 있다. 한량없는 능력을 지닌 영원한 생명자리가 마하의 자리인 것이다.

넓히면 온 법계에 가득 차지만
오므라뜨리면 바늘 구멍도 용납하지 못한다

우리의 마음자리, 이 마음이 어찌 눈 깜짝할 사이에 지구를 일곱 바퀴 반 도는 전광속의 능력만 갖추었겠는가? 한 생각 움직이는 가운데 삼천대천 세계를 수백 수천 바퀴를 돌고도 남는 능력이 있다.

이와같은 무한능력, 영원생명을 갖춘 우리들 마음의 작용이 마하(Mach)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일체함령은 누구 할 것 없이 이 마하의 마음을 갖추고 있다.

그러나 이 마하심을 어떻게 사용하느냐 하는 것은 사람에 따라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는 다시 두 가지로 나누면, 마하심을 모으면서 사는 존재와 무한능력, 영원생명을 마구 흩으면서 사는 존재로 구분할 수 있다.

마하심을 가장 완벽하게 모으신 분이 부처님이라면, 소설 <서유기> 속의 주인공인 손오공은 마하심을 마구 흩으면서 산 대표적인 존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마음 원숭이가 강강하여
이를 제어하기 어렵구나

손오공의 ‘오공’은 공을 깨달았다는 뜻이다. 그러나 손오공이 처음부터 공을 깨달은 존재는 아니다.

아주 먼 옛날, 동승신주 오래국의 바다 가운데 있는 화과산의 꼭대기에는 선석 하나가 있었다. 이 선석은 천지의 기운을 받아 하나의 돌알을 낳았고, 알은 바람을 만나자 돌원숭이로 변하였다.

화장장엄찰해로부터 하나의 생명이 나온 것이다.

그뒤 원숭이들의 왕이 되어 자칭 ‘미후왕’이라 이름한 돌원숭이는 4백여 년 동안 편안한 생활 속에 빠져 있다가, 불로장생의 비법을 터득하고자 신선도를 터득한 수보리 조사(부처님의 십대제자 가운데 한 사람인 수보리는 공을 가장 잘 해독한 해공제일의 존자이다)를 찾아 갔다.

수보리 조사는 ‘손’이라는 성과 함께 모름지기 공을 깨달아야함을 강조하면서 ‘오공’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손오공은 20년 동안 수보리 조사의 은밀한 지도 아래 부지런히 수행하여 갖가지 술법을 익혔다. 마하의 능력을 개발한 것이다.

그러나 손오공은 이 술법을 바르게 사용하지 않았다. 용궁에 들어가서는 여의봉을 빼앗았고, 삼십삼천에서는 천도복숭아를 수백 개나 몰래 따먹었으며, 도솔단의 금단을 훔치는 등 그 횡포가 끝이 없었다. 뿐만 아니라 스스로를 옥황상제와 동격으로 삼아 ‘제천대성’이라 부르게 하였다.

손오공의 이와같은 만행에 격분한 옥황상제는 사천왕에게 10만의 천병을 주어 손오공을 잡아 처단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이들 10만 명의 천병들도 자기의 몸털을 뽑아 수많은 분신을 만들어내며 싸우는 손오공을 당할 수가 없었다.

옥황상제는 그 뒤에도 손오공을 무찌르기 위해 여러 차례 군대를 파견하였으나 번번히 실패하였고, 더욱 교만해진 손오공은 옥황상제의 자리를 자기에게 물려주지 않으면 계속 천궁을 파괴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어쩔 수 없이 옥황상제는 석가모니 부처님께 손오공을 잡아줄 것을 간청하였다. 청에 따라 손오공은 부처님은 물었다.

“그대는 무슨 재주가 있게에 감히 천하를 어지럽히고 천궁을 차지하려 드는가?”

“나에게는 재주가 많지! 72가지 조화를 일으킬 줄 알고 불로장생의 도술이 있어. 게다가 근두운을 일으켜 타고 한번 곤두박질치면 10만8천리를 날 수 있어. 이런데도 천위를 못 얻는다고 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나와 한번 내기를 해보자. 그대가 만일 근두운을 타고 내 오른 손바닥을 벗어날 수 있다고 한다면 그대의 승리로 하리라. 그대가 승리하면 천궁을 그대에게 내줄 것이로다.”

손오공은 비웃음을 입가에 띠며 연꽃잎만한 크기의 부처님 손바닥 위에 올라섰다.

“자, 간다.”

손오공은 부지런히 몸을 굴려 하늘 끝을 향해 날아 올라갔다.

한참을 가다가 ‘이제는 부처도 도저히 따라오지 못하겠지.’ 하면서 돌아서려고 하는데, 앞에 다섯 개의 불그스름한 기둥이 솟아 있는 것이 보였다.

“아, 이곳이 하늘 끝이로구나. 여기에다 증거를 남겨두고 돌아가야 부처가 진 것을 인정하겠지.”

손오공은 자기의 몸털 한 가닥을 뽑아 붓을 만든 다음, 가운데 기둥에다 써내려갔다.

“제천대성, 이곳에 놀러오다.”

그리고 원숭이답게 첫번째 기둥 밑뿌리에 오줌까지 찔끔 갈긴 다음, 근두운을 돌려 갔던 길로 힘차게 돌아와 부처님의 손바닥에 내려 앉았다.

“이제 돌아왔다. 어서 약속대로 천궁을 넘겨라.”

“이 오줌싸개 원숭이놈! 너는 내 손바닥에서 한걸음도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머리를 숙여 아래를 보아라.”

부처님의 지시에 따라 아래를 보니 부처님의 가운데 손가락에는 ‘제천대성, 이곳에 놀러오다.’라고 씌어 있었고, 엄지 손가락 사이에는 자기가 갈긴 오줌 냄새가 아직도 남아 있었다. 그러나 손오공은 패배를 인정하지 않았다.

“사기다. 사기야! 나는 또 한번 다녀올 테다.”

고함을 치며 손오공이 펄쩍 뛰쳐 나가려고 하자, 부처님은 재빨리 손바닥을 뒤집어서 손오공을 오음산 속에 가두어버렸다. 색, 수, 상, 행, 식이라 불리우는 오음의 감옥 속에 가두신 것이다.

소설 <서유기>에는 손오공의 탄생에서부터 오음산에 갇힐 때까지의 이야기를 많은 지면을 할애하여 재미있게 엮어 놓았다.

그리고 이에 대해 하나의 게송을 남겼다.

그 옛날 알이 화하여 사람되기를 배웠고,
뜻을 세우고 행을 닦아 도진의 과를 이루었다.
만겁의 옮김이 없이 승경에서 지내더니,
하루아침에 변고 있어 정신이 흩어졌도다.
하늘을 속이고 위를 넘보며 높은 자리를 꿈꾸었고,
성인을 능멸하고 금단을 훔치고
대륜을 어지럽히도다.
약을 궤뚫어 가득 찼으니 이제는 과보만 있음일세.
모르도다. 어느새 번신을 얻으니…

천지의 기운을 받고 태어난 돌원숭이는 생사를 초월하는 도를 얻고자 하였다. 그러나 돌원숭이는 공의 깊은 도리를 완전히 깨닫지 못한 채, 마하의 본질을 미처 체극하지 못한 채 물러난 것이다. 그리고 술법에 집착하고 재주 부리는 데 재미를 느껴 ‘오공’이 아니라 ‘미색’이 되고 말았고, 그 업이 쌓이고 쌓여 마침내는 오음 속에 갇히는 존재가 되고 만 것이다.

마하의 능력을 지닌 손오공을 오음산에 가둔 것은 결코 부처님이 아니다. 손오공 스스로가 오음산에 갇혔을 뿐이다.

스스로가 지닌 마하의 무한능력, 영원생명을 올바로 발휘하기보다는 방일과 타락과 색에 집착하는 길로 나아감으로써, 그 길 끝에 열려 있는 오음산의 감옥 속으로 자연스럽게 빨려 들어간 것이다.

우리들 중생도 그러하다. 스스로가 지닌 마하의 능력을 개발하기보다는 미혹 속에 빠지고 오음에 결박당하여 살아가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스스로가 색, 수, 상, 행, 식의 오음산을 만들어 갇혀, 부자유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들 오음 가운데 색은 곧 대상이다. 내 마음의 대상이 되는 색깔, 소리, 향기, 맛, 감촉 등이 곧 색인 것이다.

마음이 이들 대상을 접할 때 감수작용이 일어나게 되는 것을 수라고 한다. 즉, 마음이 대상에 끄달려서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 수이다. 그러나 수는 받아들이는 것으로 끝나는 경우가 드물다. 좋은 것을 보니 갖고 싶고, 예쁜 것을 보니 하고 싶고, 맛있는 것을 접하니 먹고 싶다는 등의 끄달리는 마음이 끊이지 않는다.

그리고 이와같이 먹고 싶고 보고 싶고 갖고 싶고 하고 싶은 마음은 단순히 ‘싶다’는 생각에서만 머무르지 않고, 더욱 전개되어 어떤 결론이 도출될 때까지 여러가지 사량분별을 일으키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상이다. 우리가 일으키는 공상, 망상, 몽상 등이 모두 이 상에 속한다.

이와같은 상의 과정을 거쳐 마음으로 결론을 맺거나 말을 하거나 행동으로 옮겨 취사선택하는 행을 짓게 되고, 이 행의 결과에 따른 즐거움과 괴로움, 희노애락의 모든 과보가 마음에 맺어지는 것이 식인 것이다.

우리가 108번뇌, 8만4천만번뇌라고 하는 것도 결국 이 오음을 벗어나지 않는다.

소설 <서유기>에서 손오공은 마침내 이 오음의 결박 속에 갇히고 말았다. 성격이 강강한 그 마음 원숭이는 마침내 부자유의 존재가 되고 만 것이다.

그렇다면 이와같은 오음의 결박에서 벗어나 참된 해탈의 세계로 이르게 하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반야이다. 반야에 의해 피안의 세계에 도달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日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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