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명제인 ‘비우라’는 것은 마음속의 잡된 생각을 비우라는 것이다. 많고 많은 사람들, 과거의 부처님과 수많은 조사들은 불문 속에서 도를 이루었다.
부처님의 세계로 들어가는 불문. 그 첫 번째 관문을 우리는 일주문이라고 한다. 기둥을 일렬로 세워서 만든 대문이라 하여 일주문이라 한 것이다. 이 일주문에는 문짝이 달려 있지 않다. 그냥 뻥 뚫려 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일주문을 달리 공문이라고도 한다.
공문은 뻥 뚫려 있기에 누구나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다. 가난한 사람, 부유한 사람, 죄많은 사람, 깨끗한 사람을 구분하지 않는다. 들어오고자 하는 사람은 들어올 수 있고, 나가고자 하는 사람은 마음대로 나갈 수 있다. 이렇게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문이 공문인 것이다.
그러나 이 문을 통과하여 부처님의 경지로 나아가고자 하는 이에게는 단 한 가지 제약이 주어진다. 잡된 생각을 텅 비우고 참된 주인공을 찾겠다는 한마음을 잘 다져서 이 문을 들어서라는 것이다. 비록 문짝을 달지 않아 뻥 뚫려 있는 공문이지만, 그 잡된 생각들이 공문을 메워 유문으로 만들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잡된 생각이란 무엇인가?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의 삼독심, 재욕, 색욕, 식욕, 명예욕, 수면욕 등 오욕락이 그것이다. 이들에 의해 사랑에 걸리고 재물에 걸리고 명예에 걸리고 감정에 휘말리게 되면, 어느새 공문의 기둥과 기둥사이에는 문짝이 생겨나와 유문으로 바뀌어버린다. 그리고 출입을 막기 위해 스스로 빗장을 굳게 걸어버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먼저 놓아버리고 비워버릴 줄 알아야 한다. 탐착하고 있으면, 꼭 담고 있으면 결코 공문을 통과할 수가 없다. 이제 이를 일깨우는 부처님 당시의 이야기 한 편을 음미하면서 끝맺음을 하여보자.
어느날 흑씨 바라문은 신통을 부려서 만든 합환오동 꽃 두 송이를 양손에 들고 와서 부처님께 바치고자 하였다. 그 때 부처님은 조용한 음성으로 흑씨 바라문을 불렀다.
“선인아!”
“예, 부처님.”
“버려라.”
흑씨 바라문이 왼손에 든 꽃송이를 버리자 부처님은 다시 말씀하셨다.
“선인아, 버려라”
이번에는 오른손에 든 꽃송이도 버렸다. 그러자 부처님은 다시 말씀하셨다.
“선인아, 버려라.”
“부처님, 저의 두 손은 이미 비었습니다. 다시 무엇을 버리라 하시나이까?”
“나는 너에게 그 꽃을 버리라고 한 것이 아니다. 너의 마음에 가득 차 있는 번뇌망상을 일시에 버려서 더 이상 버릴 것이 없게 될 때 생사를 면하게 되느니라.”
부처님의 이 말씀 끝에 흑씨 바라문은 대오를 하였다.
부처님께서 흑씨 바라문에게 말씀하신 ‘버려라’. 이 한마디야말로 공문으로 들어가는 지름길이다. 어찌 참된 해탈과 진리를 밖에서만 구할 것인가?
놓아버리자.
비워버리자.
놓아버리고 비워버릴 때 모든 고통과 장애가 사라지고 해탈의 세계, 부처님의 정토가 우리들 앞에 펼쳐지는 것이다.
이제 전체의 내용을 다시 한번 정리하고자 한다.
우리는 과연 무엇을 위하여 살아야 하는 것인가? 돈, 명예, 쾌락, 육체? 아니다. 그것 이전에 참된 나의 주인인 마음자리를 위하면서 살아야 한다. 그리하여 ‘나’ 속에 있는 천상천하 유아독존을 회복해 가져야 한다. 우리 모두의 소원처럼, 더 이상은 괴롭고 어리석게 살지 말고 행복하고 지혜롭게 살아야 한다.
그렇게 사는데 필요한 묘법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항상 주인공을 점검하고 내 속의 구정물을 비우면서 사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
이를 부디 명심하여, 우리 모두 영원과 행복과 자유와 청정이 깃든 세계를 향해 노를 저어가야 하리라.
日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