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성품(性品) V

불성광명(佛性光明)

불성(佛性)은 무엇인가?

불성은 광명 뿐입니다.

그러나 불성광명(佛性光明)은 사바세계에서 보는 보통 유한적(有限的)인 그런 광명이 아니라 영원적인 진리를 갖춘 광명입니다.

광명을 부정하는 마음은 무엇인가? 그것은 어둠입니다.

또한 물질이란 것은 일차 광명을 부정하는 데서 물질이 생기는 것입니다.

나중에 불교를 깊이 연구해 보시면 재미도 있고, 또 그야말로 과학을 보다 더 이끌 수 있는 지혜가 나오겠습니다만 우주가 텅 빈 태초(太初)에 우주가 이루어질 때, 어떻게 해서 원자(原子)가 생기고 물질이 생겼을까? 불교에서는 우주의 모든 것은 중생의 업(業) 따라서 이루어 진다고 합니다.

우주가 텅 비어서 허무(虛無)가 되어버리지만 다만 빈 것은 아닙니다.

광명으로 꽉 차 있고 다만 형체만 비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 그냥 이런 몸이 아닌 광명체(光明體)인 중생들이 생각하면, 생각하는 힘 곧, 업력(業力)이 모이고 모여서 원자(原子)를 만드는 것입니다.

이런 중생들은 그때는 형상이 없이 다만 광명을 몸으로 하는 중생만 존재합니다.

그러나 그런 중생도 아직 성불을 못했기 때문에 분별하는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분별하는 마음 싫어하는 마음이 있으면 그냥 즉시에 싫어하는 마음의 에너지, 업력 따라서 바로 전자(電子)가 이루어집니다.

또는 내키는 마음이 있으면 내키는 마음 즉시에 또 거기에서 자기(磁氣)가 이루어집니다.

이런 전자(電子)와 자기(磁氣)가 이렇게 모이고 쌓여서 물질이 되고 우주가 형성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근원(根源)은 역시 불심(佛心)입니다.

불심을 우리가 불별 시비한 데서 그때그때 물질이 이루어지는 것이기에 물질은 결국 광명을 일차 부정한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마음이 밝아지면 밝아질수록 물질에 대하여 차근차근 과소평가(過小評價)하게 되고 또, 무시(無視)하게 되는 것입니다.

닦아보면 알지마는, 닦아본 분들은 자기 몸을 굉장히 원수로 여깁니다.

여러분도 닦아보십시요.

숨이 막히는 것도 이 얼마나 원수입니까,

일차 한 고비를 넘어서 몸에 부담이 없으면 그때는 모르겠습니다만 부담이 없을 때까지, 그동안 까지는 굉장히 몸이 부담스러운 것입니다.

그래서 몸이 원수로 알아지는 것입니다.

조금 잘 먹으면 배부르고 조금 덜 먹으면 배고프고 어디가 조금 언치면 우리 색신(色身)을 구성한 원소(元素) 가 부자유하니까 아프고 말입니다.

하여튼 우리는 모두가 다, 일체가 다 마음임을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 입니다.

그리고서, 그러한 마음을 생명으로 곧, 부처님으로 생각하고 구하며 부처님의 이름을 우리가 찾는 것입니다.

이런 불성(佛性)은 천지우주의 밑바닥이고 우주가 다 불성(佛性)이기 때문에 몇 마디 말로는 표현을 다 못합니다.

따라서 부처님이나 도인들이 말씀하신 부처님의 대명사인 이름 따라서 겨우 느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아미타불’ 하면, 우리가 뜻은 별로 모를 망정 그 말은 벌써 ‘우주의 모든 실존(實存)의 대명사구나’ 이렇게 느낄 수가 있는 것입니다.

. 또 관세음 보살은 아미타불이 활용하는 하나의 기운, 이것이 관세음 보살입니다.

불경(佛經)에서 보면 ‘관음삼십삼신(觀音三十三身)’ 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관음(觀音)의 몸이 설흔세가지로 화신(化身)한다는 말입니다.

부처의 몸, 또는 사람 몸, 국토의 몸 또는 귀신 몸 등 이와 같이 화신이 됩니다.

따라서 관음 보살은 무엇인고 하면, 부처님의 체(體)가, 부처님이 그때그때 만유(萬有)로 형성하는 그것이 관음 보살입니다. 또한 동시에 만유(萬有)를 다시 부처한테로 이끌어 가는 그것이 관음 보살입니다.

그런데서, 아미타불(阿彌陀佛)이나 관음보살(觀音菩薩)이나 같은 의미 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내 근본이요 우주의 근본인 부처님을 생각하면서, 부처님을 우리는 다 알 수가 없는 것 이나까 다만 그저, ‘끝도 갓도 없는 우주에 펼친 광명, 영원적인 진리를 갖춘 광명이 부처구나’ ‘부처님은 우주의 모든 실존의 대명 사구나’ 이렇게 느끼면서 부처님을 생명으로 구하고, 부처님 이름을 외우며 염(念)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공부할 때 사소한 것에 얽매이면 공부가 안됩니다.

참선을 제 아무리 많이 했다 하더라도 마음이 옹졸하면 공부는 못 트이는 것입니다.

마음을 확 열어야 합니다.

어제도 말씀 드렸습니다만, 어느 문제를 의심이나 한다든가, 주문(呪文)만 해서 공부하면 된다고 하면 흔히 사람이 고집만 강해지기도 합니다.

먼저 마음을 열어놓고 해야 합니다.

물론, 공부하면 열려지겠지만, 잘못 나가면 공부한다고 해봤자 도리어 마음이 더 옹졸해집니다.

따라서, 우선 마음 열어서, 비록 내가 미처 못 증(證)했다해도, 내 마음은 천지우주를 다 감싸있다고, 모두를 다 자기마음에다 딱 집어 넣어야 합니다.

어제 말씀마따나, 양자강 물을 한번에 들이마시는, 그런 기운이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부처님을 천지 우주의 전부로 보는 지위에서, 전부를 내가 다 감싸버리는 그런 기백(氣魄)으로 해서, 공부를 해야만이 차근차근 마음 지평(地平)이 열려 갑니다.

그렇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역시, 그러한 광대무변(廣大無邊)한 광명을 상상하면서 부처님 이름을 외우고 염(念)하는 것입니다.

부처님 이름은 그냥 우리 중생 이름과는 다릅니다.

부처님 이름은 명호부사의(名號不思義)라, 이름 자체에 부사의한 뜻이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우리 몸에 향(香)을 지니면 우리 몸에서는 그냥 향 냄새가 풍깁니다.

우리 몸에다 나쁜 냄새를 지니면 또 역시 나쁜 냄새가 풍깁니다.

그와 똑같이, 가장 높은 이름이고 일체 공덕이 갖추어 있는 그러한 공덕 이름이 부처님 이름이기 때문에, 부처님 이름을 자꾸만 외워 쌓면, 그때는 향광장엄(香光莊嚴)이라, 우리 몸에 향기로운 영원자(永遠者)의 빛이 감싼다는 말입니다.

‘관음 보살(觀音菩薩)’ 을 하루에 몇 만번 해 보십시요.

그 사람 얼굴은 이상하게 빛나갑니다.

원래 우리가 부처인지라 또 이름 자체에 영원적인 의미가 포함되어 있어놔서, 부르면 부를수록 결국은 우리 몸이나 우리 마음은 향기롭고 빛나갑니다.

광명은 차근차근 증장(增長)되어 갑니다.

원래 불심(佛心)은 광명뿐인 것인데, 우리 중생심은 일차 어두워졌다 하더라도, 부처님을 불러 쌓면 그때는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차근차근 광명의 비중이 더 높아져서 우리 마음이 광명쪽으로, 불성광명으로, 불심(佛心)으로 가까워진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광명만으로 충만(充滿)하면 그때는 성불(成佛)이 되겠지요.

광명만으로 충만하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부처님을 한시도 안 놓쳐야 합니다.

그러기에, 부처님 이름은 지극청정보주면호(至極淸淨寶珠名號)라, 지극스럽고 또는 청정하고 보주(寶珠)라, 보배같은 그런 광명이 빛나는 이름이라는 말입니다.

그러기에, 아미타불이나 그런 부처님은 무량광불(無量光佛)이라 합니다.

이러한, 무량한 부처님의 광명을 염두에 두고서 찰나도 잊지 말고서 가는 것이, 이것이 참선입니다.

어려운 말로 하면 일상삼매(一相三昧)라, 천지우주를 부처님의 일상(一相)으로 보는 것이고, 일행삼매(一行三昧)라, 일상(一相)으로 보는 그것을 안 끊어지게시리 사뭇 이어 간다는 말입니다. 일상삼매와 일행삼매, 이것이 참선입니다.

이렇게 해서, 꼭 우리 이번 용맹정진 동안에 부처님 쪽으로 가까이 가셔서 한사코 부처님을 견불성불(見佛成佛)이라, 반드시 이러한 10식인 불심(佛心)을 바라고서 성불하시길 간절히 바라면서 오늘 말씀 마칩니다.

淸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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