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성품(性品) IV

마음의 본성(本性)

심즉시불(心卽是佛)이라, 중생의 마음이 곧 부처라는 말입니다.

이 말을 생각해 보십시요.

김가나 박가나, 지금 우리 마음은 모두가다 이런 제6의 의식(意識) 단계에 있는 셈이지요.

그런데, 마음이 곧 부처라, 비록 우리가 정화가 아직 못되어서 이런 불심(佛心)은 미처 못되어 있다 하더라도 불심과 내 마음은 곧 바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둘이 아닙니다.

한 마리의 파리도, 파리 마음 밖에는 못쓸 망정, 그도 역시 본질은 또한 똑같은 부처입니다.

부처와 이렇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또 하나의 전자(電子)도, 겉으로 인간의 눈에 보이는 것은 전자이지만 본바탕은 역시 불심(佛心)입니다. 불심과 이렇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따져볼 때는 천지우주가 모두가 다 불심을 바탕으로 합니다.

겉에 뜬 것을 중생이 잘못 봐서, 정유리무(情有理無)라, 망정(妄情)으로 봐서 나무요 소요 그렇게 보고, 중생이 가짜로 이름지어서 무슨 산이요, 그렇게 부르는 것입니다.

바로 보면은 다만 불심(佛心)이 이렇게 저렇게 변화한 것에 불과 합니다.

따라서 도인(道人)들은 전부를 다 부처로 본다는 것이 그래서 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성불하는 방법도 여기에서 추출(抽出)이 되어서, 구경지(究竟地)인 우리가 가야 할 고향, 여기를 딱집어 들고서 안 놓치고 항시 생각하면 그때는 빨리 가겠지요.

바로 이렇게 연결되어 있으니까 말입니다.
자기 마음 떠나가서 저만치 불심(佛心)이 있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 본바탕이 바로 불심이기 때문에 불심이란 그 마음 안 놓치고서 곧장 파고 들어가면, 그때는 우리가 불심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내가 생명인지라, 내 바탕, 천지 만유의 바탕인 불심(佛心)은 그야말로 보다 더 큰 생명이 되겠지요.

그래서 그런 생명을 하나의 원리로만 구하면 그때는 바싹 말라서 납득이 잘 안 되는 것이고 무미건조(無味乾燥)합니다. 생명이기 때문에 역시 흠모(欽慕) 추구(追求)하는 그러한 감성(感性)으로 구해야 합니다.

어제도 말씀 드렸습니다만, 어떤 종교나 고등종교 즉, 가장 고도한 문화종교는 모두가 다 신앙 대상을 생명으로 구합니다.

기독교는 ‘오! 하나님’ 또는 천도교는 ‘한울님’ 마호메트는 ‘알라신’ 모두가 다 생명으로 구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 신앙 대상을 생명으로 구하는 것은 우리 수행법의 가장 중추(中樞)인 것이고, 기타 방법은 하나의 개별적인 특수의 불과합니다.

화두(話頭)를 든다 무(無)자를 든다, 이런것은 그때그때 어느 사람에 따라서 특수한 것에 불과한 것이고, 줄거리는,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생명 자체를 생명 그대로 수용(受用)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화두를 들어서 의심하는 것이나 또는, 가만히 앉아서 있는 것이나, 그러한 참선의 방법도 많이 있으나, 이런 것은 하나의 방법인 것이요 어떠한 방법이든지 우리 본바탕 곧 불성(佛性)을 참구하는 것이 기본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부처님 당시나 도인들은 모두가 다, 생명을 생명으로 수용하는 근본으로써 우리를 지도해 왔던 것입니다.

불교는 일체 만법(萬法)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에 모든 법을 다 수용합니다.

어떤 법이나 본질은 부처이기 때문에 가사, 지성적(知性的)으로 구하나 어떻게 구하나, 들어가서 끄트머리에 가면 그때는 다 부처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법이나 다 용납(容納)할 망정 주장된 우리 수행법은 역시 뭐라해도, 부처님을 생명으로 구하고, 생명으로 생각하고, 생명으로 외우는 그런 식으로 하면서, 다른 방법은 종적(縱的)으로 용납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을 생각하는 것은 별것이 아니라고 생각할런지 모르지만, 부처님을 생각하는 그 순간 우리한테 공덕(功德)을 많이 줍니다.

기독교인들이 ‘오, 주여!’ 하는 그 생각도 역시 굉장히 많이 공덕을 주는 것입니다.

흐트러지고 망정(妄情)밖에 없는 우리 중생이 완벽한 존재를 구하는 그 마음으로 해서 우리 마음은 승화(昇華)가 되어서 본심(本心)으로 가까워지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불경(佛經)에도 ‘신위도원공덕모(信爲道源功德母)라’ 신앙심 이것은 도(道)의 근본인 동시에 공덕의 어머니라는 말입니다. 믿는 마음이 없으면 도(道)는 못 통합니다.

우리 중생은 안 보이지만 부처님이나 성인(聖人)의 말씀을 우선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우리가 실상(實相)이 보입니까?

그러나 부처님이나 성자(聖者)는 거짓말이 없습니다.

우리가 못 믿는 것은 그만치 업장(業障)이 무거운 소치입니다.

우리 마음의 광명이 밝아서 실상(實相)의, 불성(佛性)의 지혜가 우리한테 좀더 빛나 있다면 빨리 믿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두워서, 우리 본래 마음인 불성광명(佛性光明)이 빛나 있지 않으면 잘못 알고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淸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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