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계(法界)의 본성(本性)
우리는 이와 같은 법계(法界)의 한계를 아는 것이 필요한데 다만 이러한 한계가 있을 뿐 아니라, 더 나아가서 알 것은, 본바탕은 부처라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사람으로서 현재는 인법계(人法界)중에 있습니다.
우리 의식이 인법계에 있기에 또한 코, 입 등, 이런 몸을 받아 나왔습니다.
만약 우리가 천법계(天法界)에 올라간다면 그때는 광명(光明)을 몸으로 합니다.
이런 허물어지고 냄새나고 더러운 몸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비록 우리 의식이 인법계에 있기에 이런 몸을 받아 나왔으나 우리 의식은 무한합니다.
저번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 일체의 모든것이 마음으로 이루어졌고, 만법이 유식(萬法唯識)이라, 세상 일체 만물인 만법이 다 오직 식(識), 의식뿐이다’ 는 이런 말은 납득하기가 참 곤란스러운 말이나 이런 데서 불교의 참으로 심오(深奧)한 뜻이 있습니다.
우리의 의식은, 사람이 되었으면 사람으로서, 그 사람이 김아무개는 김아무개로서 제한되어 있고 박아무개는 박아무개로서 제한되어 있어서, 현재는 비록 사람의 의식을 쓰고 있지요.
그러나, 우리가 쓰는 사람의 의식은 하나의 촛점에 불과하고 우리의 잠재의식인 의식의 심층(深層) 가운데는 지옥이나 축생이나 아귀나 또는 아수라나 이런 요소가 다 갊아(藏), 숨어 있습니다.
또한 동시에 그 위로는 역시 천법계, 성문법계, 연각, 보살, 부처, 이러한 보다 높은 차원의 마음이 다 숨어 있습니다.
또한 지옥계의 지옥중생으로 태어나서 간단없이 고생을 받고 있다고 합시다.
지옥 중생은 지옥고를 받으면서 의식이 어떻게 판단도 못하고 고생만 합니다.
무간지옥(無間地獄) 같은 것은 고(苦)만 사뭇 받으니까 어떻게 숨도 내쉴 틈이 없다는 말입니다.
일일일야(一日日夜)에 만사만생(萬死萬生)이라, 하루 밤 하루 낮에 만번 죽고 만번 태어나니 어떻게 생각할 틈이나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런 고통을 받는 무간지옥일 망정 역시 그 식의 잠재의식 곧, 식(識)의 심층 깊이에는 역시 사람같은 식도 있고 부처같은 식도 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것이 공평(公平)히 있는 것이 아니라, 본바탕(本性)은 부처가 본바탕이고 다른 것은 임시로 거기에 요소만 숨어있을 뿐입니다.
‘심즉시불(心卽是佛)이라, 마음이 바로 부처니라’ 하는 부처님이나 도인들 말씀을 우리가 흔히 많이 씁니다.
이런 말씀은 무엇인고 하면 우리마음이 저만치 간격을 두고서 부처가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심즉(心卽), 마음이 곧 부처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비록 사람일망정 우리 마음의 본바탕, 본성(本性)은 역시 부처 입니다.
지옥같은 마음, 사람같은 마음, 이런 마음들이 단지 요소로만 거기에 조금씩 묻어 있을 뿐입니다.
그것도 역시 본바탕, 본저변(本底邊)은 부처라는 말입니다.
겉에 뜬 촛점에서만 지옥이고 지옥같은 인연 따라서 되니까 지옥같은 마음이 생기는 것이고, 인연 따라 업(業)에 따라서 이렇게 사람같은 모양으로 태어나서 사람같은 마음을 쓰는 것이지, 이 마음도 역시 저변에는 모두가 부처뿐이라는 말입니다.
심즉시불(心卽是佛)이라, 이 마음 바로 부처입니다.
그러기에 회광반조(廻光返照)라, 이 마음 돌이켜서 저변만 보면, 밑창만 보면 그때는 우리가 부처가 되고 만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 마음이라는 것이 ‘내가 누구다’ 하는 때에는 항시 이러한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남을 미워할 때 그 미워하는 마음은 그 사람을 죽이고도 싶겠지요,
미워하는 마음이 사무치면 그 사람 죽이고 맙니다.
그 마음은 분명히 지옥 마음입니다.
남을 미워할 때는 가장 저속한 마음을 쓰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장 고귀한 마음, 본래 마음은 부처인데 이 부처 마음은 일체중생을 다 깨닫게 하고 모든 진리를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불교인들은 역시 이러한 부처의 마음자리, 이 마음자리를 안 놓치게 하는 것이 참선(參禪)이고, 참다운 염불(念佛)입니다.
우리가 알고 보면 부처님 가르침은 삼조(三祖) 승찬(僧璨 ?∼606)대사의 신심명(信心銘)에도 있듯이 ‘지도무난이나, 유혐간택(至道無難唯嫌揀擇)이라’ 지극한 진리인 도(道)는 별로 어렵지 않으나, 오직 간택을 꺼린다 즉, 우리 범부 망상(妄想)으로 자꾸만 헤아린다는 말입니다.
헤아리는 그것 때문에 자꾸 이렇게 얽히고 설키고 합니다.
같은 형제간에도 의견이 각각 다르고 소위 민주주의 사회라 하지마는 한 나라에서 정당(政黨)이 이렇게도 많이 구구하게 있는 것을 보십시요.
그런 것이 모두가 다 부처 마음이 아니라 범부의 마음으로 자기 몸뚱이를 중심으로해서 움직이는 것입니다.
즉 말하자면 현상계를 보고서 그것만이 전부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불교인이 아니더라도 스피노자(Spinoza 1632∼1677)같은 철인들은 참 좋은 말을 많이 했습니다.
‘영원의 상에서 현실을 관찰하라. 그러면 그대 마음은 영원에 참여한다’
이런 말은 바꿔서 보면 내나야 부처나 도인들 견지에서 현실을 보라는 뜻입니다
우리 중생은 현상적인 범부 소견에서 현실을 봅니다.
따라서 바로 볼 수가 없습니다.
산으로 비유하면, 산기슭이나 중턱에서 보니까 시야가 좁아서 다 못 봅니다.
조금 공부했다 하더라도 산에 올라가다가 중턱도 못 가서 보니까 또 역시 시야가 미처 다 안 보입니다.
도인들은 산봉우리에서 사방을 다 보는 견해입니다.
우리가 남을 미워한다고 하면 미워하는 사람, 미운 사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가 무명에 가려 잘못 보고서, 잘못 보는 그 마음으로 미워합니다.
또한 남을 지나치게 애착(愛着)하면은 애착하는 대상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보면 다 부처뿐인 것인데 바로 못 보는 그 마음 때문에, 자기 스스로가 좋아서 결국은 좋아하는 그 마음을 스스로 애착하는 것입니다.
자기 마음 때문에 자기 스스로 괴로워합니다.
제 마음 제가 보고서 말입니다.
우리가 염불하는 것은 부처가 현전(現前)에 눈에 안 보이므로, 일체만유가 부처임을 재확인하기 위해서 염불하는 것입니다.
누가 미워지면 ‘관세음보살이라’ 생각하고, 분명히 바로 보면 다 그대로 관세음 보살이니까 말입니다.
누가 너무 좋아지면 ‘이것이 역시 부처인데’ 하고 부처라 보면 누구를 특별히 좋아할 턱이 없죠.
그때는 다같이 봐야지 말입니다.
그러니 ‘관세음보살이라, 다 부처라’ 그러면 모든 애착이 거기에서 끊어진다는 말입니다.
이와 같이 순간 찰나라도 두두물물(頭頭物物)이 모두가 다 부처님을 재인식하기 위해서 우리가 염불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만이 염불선(念佛禪)이 되고 참다운 부처님 공부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참선하는 동안에 여러 가지 경계(境界)가 많이 나옵니다.
이따금 그야말로 참, 관세음보살같은 찬란스런 모양이 나오기도 하고, 더러는 관음 보살이 수없이 보이기도하고, 더러는 우주에 꽉 차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무주정상(無住定相)이라, 부처님은 하나의 모양이 아닙니다.
부처님은 상(相)이 없습니다. 부처님은 일정한 상이 아닙니다.
따라서, 우리는 무엇이 보인다 하더라도 그것에 집착하면 안됩니다.
그러나 부처님이 보이고, 무엇이 보이는 것은 마음이 그마만치 선량(善良)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좀 선량하고나, 내가 좀 공부가 되는구나!’ 이렇게 자기 스스로 흐뭇하게 느낄 망정 그것이 도(道)라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또한 어떤 것이 보인다 하더라도 근심할 필요도 없고 슬쩍 지나가면 되는 것입니다.
오직 문제는 구경지(究竟地)요, 실상묘법(實相妙法), 진공묘유(眞空妙有)자리입니다.
천지우주가 텅 빈 가운데 무량광명(無量光明)이 충만하다는 표현이나 뜻은 똑같습니다.
진공(眞空)은 끝도 갓(邊)도 없이 빈 공간이요 묘유(妙有)는 다만 비지 않고 거기에 가득 찬 무엇인가 있다는 말입니다.
빛나는 무엇 그것은 무량광명이라, 한없는 광명이라는 말로 바꾸어도 무방한 것입니다.
아무튼, 무엇이 나타나든지 간에 집착 말고서 혼연스럽게 궁극의 자리, 진공묘유 자리, 천지우주에 끝도 갓도 없이 무량한 광명이 충만한 그 자리를 보고서 공부를 하면 되는데, 또 너무 볼려고 애쓰면 그때는 상기(上氣)가 됩니다.
그런 때는 그냥 가만히 놓아버리면 됩니다.
가만히 바보같이 놓고 있다가 또 이제 끄떡끄떡 침몰하면 다시 챙겨서 볼려고 애쓰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기 스스로 원래 부처인지라 진정으로, 삿 된 지옥같은 마음 안 가지고 부처같은 마음만 가질려고 애만 쓰면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어떠한 계시(啓示)가 오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이란 것이 무한의 신통을 다 갖추고 있기 때문에 바른 사람들에겐 이상한 어떤 계시가 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이번 용맹정진 기간 동안에 기어코 높은 경계를 공부해서 결정신심(決定信心)으로 정정취(正定聚)라, 극락 세계나, 우리가 성불할 수 있는 결정코 변할 수 없는 그런 자리에 오르시길 간절히 바라마지 않습니다.
淸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