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법계(十法界)
진리에 어두운 무명중생(無明衆生)과 진리를 깨달은 성자(聖者)와의 차이를 어떻게 보는가?
불교에서는 성상체용(性相體用)이라,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리 인간의 안목으로 볼 수 있는 현상계는 상(相)에 해당합니다.
그리고 우리 중생이 볼 수 없는, 성자만이 볼 수 있는 본체계(本體界)는 성(性)에 해당합니다.
범부는 현상만 보고 본체인 성은 못 봅니다.
그러나 성자는 현상과 본체인 성을 한번에 다 아울러 보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것이 소위 말하는 깨달음입니다.
또는 체용(體用)이라, 체(體), 용(用)도 역시 성(性), 상(相)의 다른 말에 지나지 않습니다.
체(體)는 본성에 해당하고 용(用)은 현상적인 활동에 해당합니다.
우리가 공부하는 것은, 우리 눈에 보이는 현상계적인 미혹(迷惑)을 떠나서 참다운 본성계(本性界)를 깨닫는 데에 수행하는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비록, 그 사람이 제아무리 지위가 높고 학문이 깊다 하더라도, 현상계만 아는 것 가지고 따지면은 역시 범부의 무명을 면치 못합니다.
따라서, 그 사람은 역시 무명중생에 불과합니다.
비록 학문적으로는 그 사람이 전혀 불학무식(不學無識)해서 아무 것도 모른다 하더라도 본성계(本性界)를 깨달으면 성자인 셈입니다.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6조(六祖) 혜능(慧能) 스님은 일자무식(一字無識)이라고 합니다.
그 분이 출가 입산해서 머리도 안 깎고 5조(五祖) 홍인(弘忍 602∼675)대사 밑에서 공부를 했다 하더라도 학문적인 공부는 안하고 그냥 방아만 찧었습입니다.
몇 백명 대중이 먹는 식량의 방아를 혼자 찧으니 힘에 겨웠겠지요.
방아가 하도 무거우니까 자기 허리에 큰돌을 짊어지고 방아를 찧었습니다.
그렇게 8개월 동안이나 매일 방아만 찧었지만 마음을 닦았으니까 척 깨달아서, 5조 홍인 대사 밑에서 몇 십년 공부하던 신수(神秀 ?∼706)대사보다도 먼저 5조 홍인대사의 법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뒤에도 머리 깎고 중이 된 것이 아니라 그냥 머리가 긴 채로, 그때 나이 스물넷인데, 사냥꾼을 따라다니면서 밥도 해주고 사냥꾼들 시중을 16년간이나 들었지만 고기는 안 먹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39세 때에야 비로소 인종(印宗)법사란 분을 찾아가 계(戒)를 받고 삭발하고 승려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뒤늦게 인종법사에게 계를 받았지만 이제 혜능 스님은 도인(道人)이니까 스승이 되고 계사(戒師)는 제자가 된 것입니다.
그렇게, 6조 혜능 스님의 예를 본다고 할 때에, 진리라 하는 것은 머리가 있고 없고에 상관이 없습니다.
오직 문제는 본성(本性)을 깨닫는가 못 깨닫는가에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본성(本性)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보다 더 설명하기 위해서 부처님 법문에 십법계(十法界)라는 것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인간은 만물(萬物)의 영장(靈長)이라’고 말합니다.
허나 실은, 사람밖에 모르는 그런 인본주의적(人本主義的)인 견지에서는 만물의 영장이 될 려는가 몰라도 사람보다 더 높은 층계가 많이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그러한 섣부른 망상(妄想)을 버려야 합니다.
그것은 한 가지 아만심(我慢心)입니다.
인간이란 인간의 마음이, 의식(意識)이 발달되어 가는 어느 어정쩡한 한 과정에 불과합니다.
사람의 몸이란 잠시간 이루어졌다 꺼지는 하나의 물거품이나 구름에 불과한 것이요, 몇 십년 지나가면 그와 똑같은 모양은 어디에도 없는데, 보통은 그러한 허깨비같은 모양만 집착하고서 거기에다 충실을 기하는 것입니다.
소중한 것은 우리 마음뿐이고 의식뿐인데 마음은 소홀히 하고 모양에 다만 집착을 합니다.
모양 때문에 이루어진 문화가 소위 물질문명이 되겠지만, 우리는 그러한 것을 떠나서 참다운 주인공(主人公) 곧, 주인공은 우리 마음이고 의식이니까, 그 주인공에 대해서 얼마나 깊이가 있는가, 얼마나 신비로운가, 하는 것을 공부하는 것이 불교의 공부가 되겠습니다.
淸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