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상염불(實相念佛)
실상(實相)이나, 진리(眞理)나 또는 진여(眞如)나, 여래(如來)나 또는 부처(佛)나 열반(涅槃)이나 도(道)나 실제(實際)나 보리(菩提)나 주인공(主人公)이나 하나의 물건 즉, 일물(一物)이나 본래면목(本來面目)이나 또는 제일의제(第一義諦)나 똑같은 뜻입니다.
어떤 경(經)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어떤 경에서는 저렇게 말하고 경에 따라서 차이있게 말했으나 내용은 똑같습니다.
따라서, 실상(實相)염불은 우리가 진리를 미처 모르지만, 아직 깨닫지 못했지마는 부처님께서 밝히신 대로 진리를 생각하면서 하는 염불입니다.
전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가 보는 것은 망상(妄想)인 것이고 가상(假想)인 것입니다.
우리는 바로 못 보기 때문에 우리가 보는 것은 가상이요 부처님은 실상(實相)이기 때문에 우리가 가상을 떠나 실상을 생각하면서 염불을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 중생은 실상을 아직 못 봤습니다.
실상을 못 본 중생이 어떻게 실상을 보면서 할 것인가? 이것이 또 큰 문제가 되겠습니다.
우리가 닦아서 실상을 확실히 본다 하더라도 아직은 못 봤지만, 부처님이나 도인들 말씀에 의지해서 실상은 어떻게 생겼는가 하면, 실상(實相)은 불생불멸(不生不滅)하여, 원래 낳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 즉, 원래 생(生)함도 없고 멸(滅)함도 없고, 또는 불구부정(不垢不淨)하여, 더럽지도 않고 청정하지도 않고, 영생상주(永生常住)한, 항시 죽지 않고서 머물러 있다는 말입니다.
사람이나 기타 현상계에 있는 모든 것은 항시 머물러 있지 않고 그때그때 소멸됩니다.
사람도 잠시간 머물러 있고, 우주 만유도 잠시간 머물러 있습니다.
그런데, 실상(實相)은 영생으로 항시 머물러 있습니다.
현상은 머물러 있지 않고 항시 변화해서 마지 않지만, 진리란 실상은 언제나 머물러 있습니다.
즉 말하자면 ‘실상(實相)은 낳지 않고 죽지 않고, 또는 더러운 것도 없고 청정한 것도 없고, 영생으로 항시 머물러 있는 진공묘유(眞空妙有)라, 다만 텅 비어있을 뿐만 아니라 허공 가운데 가득차 있는 묘한 그 무엇이라’ 는 말입니다.
실상(實相)은 끝도 갓도 없이 허공 가운데 가득 차 있는 그 무엇으로 구태여 이름지어 붙인다고 하면 부처요 또는 도(道)요, 보리(菩提)요, 진여(眞如)요, 여래(如來)요, 하는 것입니다.
참다운 것은 우리 중생이 볼 수 없지만, 부처님 말씀에 의지해서 우리가 겨우 헤아려 본다고 하면, 낳지 않고 죽지 않고 항시 영생으로 머물러 있는, 모든 공덕을 갖춘, 허공 가운데 가득차 있는 그 무엇이 실상입니다.
따라서, 실상염불(實相念佛)은 어렵기는 제일 어려우나 부처님의 이름에 가장 합당한 이름이고 염불입니다.
‘아미타불(阿彌陀佛)’ 하면 아미타불이란 이름과 실상(實相)과는 거의 계합(契合)하고 거의 합당합니다.
아미타불의 풀이가 무량광불(無對光佛)이요 또는, 무량수불(無量壽佛)입니다.
무량광불이란 말은 광명이 우주에 가득 차 있다는 말이고 무량수불이란 영생한다는 말입니다.
또 청정광불(淸淨光佛)이요 무대광불(無對光佛)이라, 청정하고 상대가 없다는 말입니다.
이와 같이 부처님 이름은 실상에 걸맞는 이름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실상염불을 할 때는 우리 마음을 천지우주로 해방시켜서 그 가운데 가득 차있는 그 무엇, 찬란한 그 광명, 이것을 생각하면서 하는 염불이 실상염불(實相念佛)인 것입니다.
이 염불이 실은 가장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이 실상을 생각하면서 하는 염불이라야 비로소 어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염불선(念佛禪)이 되는 것입니다.
이름만 그저 외우고, 또는 상호만 관찰하고, 부처님의 어느 몇 가지 공덕만 생각하는 이런 염불은 아직은 염불선은 못됩니다.
원래 선(禪)이라 하는 것은, 제가 이제까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마음이 실상에 안주(安住)해서, 실상인 진리에 머물러서, 진리를 한시도 안 떠나는 공부가 바로 선(禪)입니다.
이것이 참선(參禪)입니다.
따라서 염불도 역시 그와 똑같이 부처님의 이름을 외우되 우리 마음이 부처님의 진리를 안 떠나야만이 실상염불이 되는 것이고 바로 염불선이라는 것입니다.
지금 한국의 여러 종단에서 염불을 합니다만 어떤 분들은 실상염불이나 이런 염불선은 아주 어려워서 못한다고 배격합니다.
실상염불이 어려운 것은 사실이나 염불선이 되려면은 그와 같이, 자기가 부처님의 실상 곧 진리를 상상하면서 해야 염불선이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실지로 공부할 때는 항시 그러기는 어렵습니다.
따라서, 우선 관념상 ‘내 본바탕도 역시 부처고, 우주가 모두가 다 부처 뿐 이구나’ 이렇게 생각하면서 그냥 이름만 들이 불러도 그때는 실상염불이 되는 것입니다.
잘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아까 말씀마따나, 이름만 그냥 불러도 성불하는 법입니다.
그러나 기왕이면 이름과 그 실체 곧, 이름과 내용이 딱 알맞으면 더욱 성불이 쉽겠지요.
따라서 우리가 어렵게시리 철학적으로 생각할려면은 너무 어려운 것이니까, 그냥 쉽게시리 ‘내 몸의 본질도 역시 부처고, 산이나 내(川)나 천지우주가 모두가 다 부처 아님이 없다. 부처 뿐이구나’ 이렇게 생각하면서 하는 염불이면, 이것이 실상염불이 되는 것이요, 또한 동시에 염불선이 됩니다.
정토경전(淨土經典)에 보면 ‘염불행자 인중분다리화(念佛行者 人中分陀利華)라’ 사람들이 이렇게 많이 있는 가운데서 염불하는 수행자는 분다리화(分陀利華 Pundarika : 自蓮華)라 즉, 가장 향기로운 꽃이라는 말 입니다.
따라서 “관음세지 기위승우(觀音勢至 己爲勝友)”라 염불하는 분들은 그 벗(友)되는 사람들이 그냥 보통 여느 사람들이 아니라, 관음 보살이나 대세지 보살이나 그런 보살들이 좋은 벗이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부처임을 느끼고 부처 이름을 부르면 즉시에 관음 보살이나 그런 보살들이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우리의 좋은 벗이 되어서 우리 주변에 있게 된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자기는 미처 모른다 하더라도 지성스런 마음으로 염불하고 있으면, 벌써 보살들이 굽어보고서 우리의 벗이 되어서 우리 주변에 있다고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염불삼매 총섭일체불법(念佛三昧總攝一切佛法)’이라 우리불법에 수행법이 많이 있는데, 염불삼매는 일체불법을 다 거두어 있다는 말입니다.
불교는 대도무문(大道無門)인지라, 불교가 하도 넓고 넓어서 일정한 문이 있는 것이 아닌지라 어떤 행법(行法)으로나 불법(佛法)에 들어가는 문이지마는, 화두(話頭) 드는 것이나 무엇이나 다 성불하는 법이나, 그 가운데서 가장 기본이 되는 행법(行法)이 역시 염불하는 법입니다.
염불하는 법을 기본으로 해가지고 화두나 묵조나 그런 다른 행법이 있습니다.
우리는 분명히 이것을 알아두어야 합니다.
그러기에 부처님께서 염불에 대한 말씀을 가장 많이 하셨고 또 정통 도인들은 다 말씀을 많이 했습니다.
그리고 어제 말씀마따나, 우리 심리(心理)는 보통 지(知)와 정(情)과 의(意)로 구분하는 하나의 속성인데, 같은 공부도 역시 심리의 속성 따라서, 거기에 맞추어서 하면은 더 속 빠릅니다.
그래야 빨리 합치(合致)되지 않겠습니까,
염불하는 공부는 우리의 지혜, 우리의 감성, 우리 의지, 이것을 조화롭게 하는 공부입니다.
따라서 다른 것에 비해 훨씬 싫증도 덜 나기도 하고 또 빨리 성불하는 법입니다.
淸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