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선(參禪)의 기초(基礎) VI

선정(禪定)의 십종공덕(十種功德)

여기에는 돌아가셔서 선을 지도할 만한 선생님도 계시는 모양이니까 선(禪)의 공덕에 대해서 대강 또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물론, 선이 자기 성취의 최상의 길입니다만 또한 구체화 시켜서 선의 공덕(功德)을 대강 알아야만 선이 좋다는 것을 더욱더 역설할 수가 있겠습니다.

선정(禪定)을 닦음으로 해서 얻어지는 공덕을 열 가지로 말한 것입니다.

선정에는 무량공덕이 있고 종당에는 다 성불이 되겠지마는, 우선 이와 같이 공덕을 나누어서 간추린 것입니다.

한 가지는 안주의식(安住儀式)이라,
이것은 무엇인고 하면 우리가 참선을 닦으면 자연적으로 우리 몸이 정화되고 마음이 안정되어서 우리 행동이 얌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아주 안온한 행동을 취한다는 말입니다.

그 다음은 행자경계(行慈境界)라,
선정을 닦으면 자비심이 많아집니다.

우리 행동이 거치르면 자비심도 나올 수가 없습니다만 선을 닦으면 우리 생리가 정화되고 마음이 정화되는 관계상 저절로 자비심이 나온다는 말입니다.

자비심을 스스로 내는 경계가 행자경계입니다.

다음은 무번뇌(無煩惱)라,
번뇌가 없다는 말입니다.

탐(貪), 진(瞋), 치(痴) 삼독심(三毒心)은 역시 우리 생리나 마음이 정화가 안되어서 발동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참선을 하면 저절로 탐심이나 진심이나 치심이 발동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번뇌입니다. 번뇌가 없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 다음은 수호제근(守護諸根)이라,
참선하면 자연적으로 우리의 6근(根)인 눈, 귀, 코, 입, 몸, 뜻을 보호해서 우리의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등 감각들을 바른 방향으로 유도한다는 말입니다.

부설(浮雪) 거사(居士) 게송(偈頌)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부설거사는 거사로서는 아주 위대한 분 아닙니까, ‘목무소견무분별(目無所見無分別)이요’ 눈으로 무엇을 보아도 분별이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 눈으로 보는 것은 소견(所見)으로 보지 않아 분별이 없고, ‘이청무성절시비(耳聽無聲切是非)라’ 우리 귀로는 소리를 듣는다 하더라도 소리에 대한 시비(是非)를 내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선(禪)을 닦으면 자연적으로 시비나 어떤 분별은 내기가 싫은 것입니다.

또 저절로 낼 수가 없게 됩니다.

차근차근 부처가 되어 가니 무슨 시비를 내겠습니까, 눈에는 보이는 소견에 따른 분별이 없고, 또 우리 귀는 무슨 소리를 듣는다 하더라도 좋다 궂다 하는 시비를 안 낸다는 말입니다.

‘분별시비도방하(分別是非都放下)하고’ 분별이나 시비를 다 놓아버리고서,
‘단간심불자귀의(但看心佛自歸依)라’ 다만 자기 부처한테 귀의할 뿐이라는 말입니다.

공부하는 분들은 이래야 합니다.

눈으로 보아도 분별을 안내고, 귀로 들어도 시비를 안 느끼고, 다 놓아버리고서 오직 부처한테만 귀의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야만 우리가 성불을 합니다.

그런 경계가 수호제근(守護諸根)입니다.

우리 6근(根)을 다 청정한 쪽으로 보호한다는 말입니다.

다음은 무식희락(無食喜樂)이라, 안 먹어도 희락을 느낀다는 말입니다.

우리 범부가 생각할 때 사람의 행복은 잘 먹고 의식(衣食)이 좋고 모두 그런 것을 행복으로 느낍니다만 실은 그런 것은 욕계 번뇌가 끼어 있을 때의 말입니다.

번뇌가 떨어 졌을 때는 음식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이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우리가 참선하면 경안(輕安)이라, 자기 몸도 가뿐하고 마음도 가볍습니다.

자기 몸과 마음에 별로 부담을 느끼지 않습니다.

이 정도가 되어야 선에서 조금 힘을 얻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득력(得力)이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어서 이런 경계가 지나가면 그때는 희락지(喜樂地)라, 기쁨을 느낀다는 말입니다.

한없는 환희심을 느낍니다.

그때는 그냥 감사해서 눈물이 주룩주룩 나올 정도로 환희심을 느낍니다.

따라서, 이런 경안을 얻어 몸도 마음도 가뿐하여 아무 부담없이 상쾌하고, 그와 동시에 희락지라, 희락을 느끼면, 그때는 음식에 대한 생각이 없습니다.

이성(異性), 음식(飮食) 또는 지위(地位)에 생각이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안 먹어도 희락을 느끼고 기쁨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 다음은 원리애욕(遠離愛慾)이라,
이성간의 사랑이나 모든 애욕(愛慾)을 다 떠나버린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조금 무미하다고 생각 할려는가 모르지마는 실은 무미하지가 않는 것입니다.

선(禪)을 닦아 얻는 행복은 어디다 비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일곱번째는 수선불공(修禪不空)이라,
비록 아공(我空), 법공(法空)을 느끼고 우리가 공을 닦는다 하더라도, 공관(空觀)을 많이 한다 하더라도, 공관에 사무치고 참선에 사무치면 다만 공에 머물지 않고서 참다운 진공묘유(眞空妙有)라, 영원적인 불성(佛性)을 우리가 본다는 말입니다.

공(空)을 말로만, 추상적으로 말할 때는 공에 치우칩니다마는 닦아서 얻은 공은 공에 안 치우칩니다.

바로 진공묘유, 불성을 얻는 것입니다.

바로 닦으면 수선불공이라, 우리가 공에 안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또 해탈마견(解脫魔견)이라,
마구니의 그물을 다 벗어버리는 것입니다.

좋다 궂다 또는 없다 있다 하는 여러가지 우리의 욕망, 이런저런 번뇌의 얽힘이 마견(魔견)인데, 그런 마견을 다 벗어버린다는 말입니다.

마구니의 걸림을 우리가 다 해탈한다는 말입니다.

그 다음은 안주불경(安住佛境)이라,
부처님의 경계에 편안히 머문다는 말입니다.

번뇌가 없거니 응당 부처님의 경계에 편안히 머물겠지요.

다음은 해탈성숙(解脫成熟)이라,
차근차근 해탈되어서 우리 마음에 있는 마지막 번뇌의 씨까지 다 뽑아버린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때는 성불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참선 공덕으로 오는 것입니다.

요새 말로 하면 우선 참선하고 있으면 우리가 혈액 순환이 좋아서 이산화탄소 같은 그런 것도 역시 차근차근 다 제거되는 것입니다.

원래 불성(佛性)이란, 무한의 힘이 있고 무한의 공덕이 있는지라, 참선 닦으면 닦을수록 자기가 모르는 영원적인 무한의 힘이 자기한테 오는 것입니다.

淸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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