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선(參禪)의 기초(基礎) IV

선(禪)의 방법(方法)

선(禪)에는 어떤 방법이 있는가?

선의 방법으로 공안선(公案禪)이라, 공안은 화두(話頭)와 똑같은 뜻입니다.

지금 우리가 드는 “무자(無字)” 화두나 “판때기 이빨에서 털 나온다(板齒生毛)”는 화두나 또는 “뜰앞의 잣나무(庭前柏樹子)” 라는 그런 화두나, 또는 “이 뭐꼬?(是甚마)” 라 하는 즉 “나한테 한 물건이 있으되 밝기는 해(日) 보다 밝고 검기는 칠보다 검고 항시 내가 움직이는 가운데 있으되 거두어 얻지 못하는 이것이 무엇인고? (有一物 明如日 黑似漆 常在動用中 動用中收不得者 是甚마)” 하는 이러한, 나의 본질을 구하는 화두, 그러한 문제를 우리가 의심하면서 닦는 선법이라는 말입니다.

이것도 역시 최고 상승선, 가장 높은 선에 속합니다.

따라서 이것도 성불에 가까운 길이지요.

그러나 이것만이 다가 아닙니다.

이것은 최고 선의 하나의 방법일 뿐입니다.

어떤 분들은, 어느 훌륭한 스님한테 자기 근기에 맞는 화두를 탄다고 합니다.

“나한테는 무슨 화두가 좋습니까” 해서 화두를 탑니다.

그런데, 화두를 주시는 분이 그 사람 근기를 잘 아시는 분 같으면 좋은데, 모르시는 분은 엉뚱한 화두를 주어 놓으면 곤란하겠지요.

부처님 법이란, 어떠한 법이나 끄트머리 궁극은 다 불법인지라, 종단(終端)에는 다 불법에 가는지라, 무슨 법이나 안 쉬고 가면 다 갈 수가 있습니다.

산(山)으로 가는 길은 많아서 동(東)으로 가나 서(西)로 가나 조금 험준한 길이 있다 하더라도 안 쉬고 가면 산 봉우리로 올라가듯이, 부처님 법은 무슨 법이나 안 쉬고 가면 다 성불되고 맙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역시 자기 근기에 안 맞으면 그때는 조금 터덕거립니다.

따라서 우리가 화두를 받을 때는 자기 근기를 알 수 있는 분한테 꼭 알맞는 법을 받아야 만이 자기 인생과 시간을 허비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공안선, 화두선에서 의심하는 것은 오직 근본문제, 우주 근원 문제, 내 본질의 문제, 내 자성의 문제를 의심하겠지만, 의심하는 것은 꽤 괴로운 것입니다.

우리 사람의 심리활동 가운데서 믿는 마음은 마음이 편하고 의심하는 마음은 굉장히 괴로운 것입니다.

그 의심도 한번 두번하고 하루 이틀 하면 모르지만, 한달 이나 몇 년 이나 한다고 하면 상당히 괴롭습니다.

특히 우리같이 출가한 사람들은 또 모르거니와 재가불자로서, 집안에 계신 분들로서 사업도 하고 또는 여러 가지 가정적인 일을 보시는 분들이 의심하는 버릇만 자꾸 붙여 놓으면 자칫하면 남도 의심하게 되는 것 입니다.

또 공부란 것은 항시 안 쉬고 해야 할 것인데 의심만 자꾸 하면 자기 사업도 하기가 곤란스럽습니다.

그런 불편스러운 점이 있습니다.

따라서, 의심하는 이것은 역시 최상승선으로 가장 좋은 선(禪)의 하나의 방법은 되겠지만, 선방에서 오로지 하시는 분들은 하기가 좋아도 일상적인 생활불교로서는 조금 불편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부처님한테 오로지 바쳐버리는 마음이 의심하는 수행법을 취하면 그때는 조금 감소가 됩니다.

따라서, 지적(知的)인 분들은 참구하는 화두가 무방하다 하더라도, 부처님한테 모두를 의지하는 오로지 신앙적인 분들은 조금 마음에 저항을 느낍니다.

즉 말하자면 우리 정서(情緖)가 만족을 느끼지 못합니다.

그 다음은 묵조선(默照禪)이라, 이것은 화두가 없이 그냥 앉아서 자기 마음을 비춰보는 것입니다.

어떤 문제도 설정하지 않습니다.

묵조선을 하는 분들은 대체로 단전주(丹田住)라, 아랫배에 힘을 두고서 공부를 합니다.

원불교에 가서 보면, 저도 거기에서 한 철을 공부했습니다만, 아무 문제가 없이 아랫배 단전에다 힘주고서 공부를 합니다.

그러면 원래 부처인지라 결국은 부처가 될 거라고 합니다.

이것도 역시 각 도인들이 한 선법(禪法)입니다.

화두선도 위대한 도인들이 많이 나왔으나 묵조하는 선도 역시 위대한 도인들이 많이 나왔습니다.
아무튼, 안 쉬고만 하면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해 볼 때에 성불의 길이 그냥 쉽게 몰록 된다면 쉽지마는, 며칠이나 몇 달에 안되고 또 몇 년에 안되는 경우에는 싫증을 냅니다.

또 우리가 부처까지 올라가는 길은 상당히 먼 길입니다.

“파딱하면 되어 버린다, 당하(當下)에 개오(開悟)라, 말 한 마디에 그냥 다 깨달아버린다” 이런 말씀도 있습니다만, 그렇게 쉽지는 않습니다.

물론 근기가 상근기가 되는 분들은 말 한마디로 깨달을 수도 있겠습니다마는, 보통은 다 오랜 시일과 오랜 과정을 거쳐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과정에서 아무 문제가 없이 가만히 앉아서 닦는 선은 공부가 잘 안 나아가 집니다.

물론 호흡법도 하고 잘 되어 가지고서 정화되면 되겠습니다만, 묵조선(默照禪)은 어느 특수인 한테는 상당히 좋은 선법이나 일반적으로 누구나가 하기는 어렵고 싫증을 내기가 쉽다는 말입니다.
그 다음은 염불선(念佛禪)이라. 우리는 염불선과 그냥 염불과의 구분을 해야 합니다.

구분 잘못 하면 이것도 혼동되어 버립니다.

지금, 어느 큰스님들 말씀도 “염불은 그저 하근기(下根機) 중생이 한다. 염불은 근기 낮은 분이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함부로 말씀하시는 분도 있습니다.

따라서, 그런 말씀을 들은 분들은 ‘염불이 무슨 선(禪)이랴’ 이렇게 또 말씀합니다.

그런데서 그냥 일반 염불과 염불선의 한계를 잘 알아야 합니다.

그와 같이 말하는 보통 염불은 부처를 자기 밖에서 구하는 것입니다.

또 극락세계를 자기 밖에서 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 자성(自性), 자기 마음의 본질이 부처고 또는 우주가 바로 부처요. 우주가 바로 극락세계입니다.

우리 마음이 미혹(迷惑)되면 천지우주가 바로 고생이 충만한 사바세계(娑婆世界)입니다만 우리 마음 깨달으면 사바세계가 바로 극락세계입니다.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누른 안경을 쓰고 보면 다 누렇게 보이듯이 미혹된 범부중생의 눈으로 보면 사바세계요 극락을 볼 수 있는 부처의 안목으로 본다고 하면 그때는 다 극락세계로 보이는 것입니다.

우리 사람이라 하는 업장이 가린, 탐, 진, 치(貪瞋痴) 삼독심(三毒心)에 가린 안목으로 보는 것이니까 극락으로 안 보이는 것입니다.

따라서, 부처를 자기 마음 밖에서 구하고, 극락을 자기 마음 밖의 저만치 십만억 국토 밖에서 구하는 염불은 방편염불(方便念佛)입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염불은 방편염불입니다. 진실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참다운 염불이 바로 염불선(念佛禪)인데, 이것은 “자기 마음의 본바탕이, 자기 마음이 바로 부처다 또한 동시에 우주가 바로 부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는 염불이 바로 염불선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요. 참선이 무엇인가, 참선은 바로 내 부처를 구합니다.

천지우주 만유가 바로 부처인것을 우리가 느끼고 생각하면서 내가 부처가 되는 것을 선(禪)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와 같은 염불은 바로 선(禪)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방편적으로 하는 즉, 자기 마음 밖에서 부처와 극락을 구하는 식이 아니고 “내 마음이 바로 부처다. 내 마음의 본바탕이 부처다”고 확실히 느끼고서 “극락 또한 내 마음 속에 있다” 이렇게 느끼고서 하는 염불은 염불선(念佛禪)입니다.

묵조선(默照禪)은 주로 의지적(意志的)이라, 단전주할 때는 의지가 강하지 않으면 못합니다.

따라서 의지가 강한 쪽으로 수승한 선이고, 화두선(話頭禪)은 지적(知的)으로 참구하기 좋아하는 분들에게 적합한 지적으로 수승한 선인 것입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하나의 원리나 이치가 아니가 생명이기 때문에, 일체 공덕을 다 갖춘 생명이기 때문에, 다시 말하면 인격이기 때문에, 부처님을 하나의 생명으로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기의 영원적인 님도 구하고 또는 사랑도 구하고 하듯이 말입니다.

부처님은 사랑가운데 사랑이요, 님 가운데 님입니다.

일체만유의 님이요, 평생 우리가 닦다가 종국에는 돌아가야 할 필경의 의지처, 이것이 부처입니다.

따라서 그러한 부처님을 참다운 님의 님으로 한다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만 지적(知的)이나 의적(意的)에 그치지 않고 우리 인간 심리의 모두인 지(知)와 정(情)과 의(意)를 모두 조화적(調和的)으로 구하는 선법이 염불선입니다.

우리 마음으로 만족을 못 취하고 우리 마음이 안심이 못되면 공부를 오래 못합니다.

싫증나서 말입니다.

그러나, 부처님을 자기 님의 님으로 구하는 선법, 이것은 벌써 우리 감성이 만족한지라 구하면 구할수록 더 그립단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 사부대중께서 하는 이런 선법 저런 선법 다 좋습니다.

또 해보면 다 그만치 거기에 따른 재미가 있습니다.

도인들이 제시한 법이니까 말입니다.

그러나 현대와 같이 이렇게 불안스러운 때, 가정생활로 해서 여러 가지 액난이 많은 때, 또는 항시 어느 때나 누구나가 할 수 있는 방법으로서 염불선(念佛禪)은 좋습니다.

천지우주가 바로 부처인지라 사람을 봐도 부처요 개를 봐도 부처입니다.

어떤 때나 부처로 생각해도 손해가 없습니다.

가장 좋은 생각, 가장 좋은 행동, 가장 좋은 말이 부처입니다.

장사하는 사람이 자기 집에 들어오는 손님한테 대해서 부처라고 생각해 보십시요.

인상이 좋아져서 그냥 장사가 흥왕합니다.

부처라고 생각하는 그 생각이 가장 옳은 생각이므로 옳은 생각을 하고 있으면 장사나 무엇이나 어떤 분야나 다 우리가 성공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염불선(念佛禪)은 어떤 때나 할 수가 있고 누구나 하기 쉽고 제일 좋은 방법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가장 말씀을 많이 하셨습니다.

부처님 경전 가운데 200부 이상에서 염불을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제가 앞서 말씀한 바와 같이 어느 선법(禪法)으로 하더라도, 이미 힘을 얻은 분들은 좋지요.

그러나 아직 그런 선으로 해서 힘을 얻지 못한 분들은 이런 것을 느껴서 염불선을 하시는 것이 가장 합당합니다.

또 어떤 염불을 할 것인가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러나 내 자성(自性)인 동시에 우주의 본체인 부처님의 대명사가 바로 아미타불입니다.

아미타불에 귀의한다고 할 때에는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입니다.

아미타불이 우리 중생을 구제하는 면에서는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입니다.

다 똑같습니다.

나무아미타불, 문수 보살(文殊菩薩), 보현 보살(菩賢菩薩)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부처님 인데 다만, 중생을 교화하는 공덕(功德) 면에서 이름만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중생을 교화하는 면에서 중생을 자비로 제도하는 면에서 관세음보살이고, 또 지혜로운 면에서 문수 보살, 대세지 보살입니다.

우리 영혼을 천도하는 면에서는 지장 보살(地藏菩薩)이고 말입니다.

하지만 모두 다 하나의 부처님입니다.

공부하는 분들은 주문을 외우나 화두를 하나 나름대로 공부가 되면 재미를 느낍니다.

따라서 자기가 하는 공부법 만이 제일 좋다고 합니다.

재미를 봤으니까 말입니다.

그러기에 고집을 부립니다.

그 공부에 대해서 어느 정도 득력(得力)을 좀 해놔서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이 제일인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벌써 한 고비를 넘어버리면 하나인지라 상관이 없지만 고비를 넘도록 까지는 어렵습니다.

다시 말하면 희락(喜樂)이라, 희락은 기쁨을 맛보는 것이지요, 우리 중생의 삿된 그러한 고통을 떠나서 영생에서 오는 희락을 맛본 뒤에는 하나가 되어 버립니다.

그러나 미처 거기까지 이를 때가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 가지 행법 가운데 희락(喜樂)에 이르기까지 하기 쉬운 것이 곧, 염불선입니다.

淸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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