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원(本願)의 정립(定立)
부처님의 계율 중에서 불성(佛性)에 알맞는 계율, 이것이 불성계(佛性戒)입니다.
보통 계율은 그냥 ‘이것은 하지 말라. 저것은 해라’ 하는 간단한 것인데, 불성계는 불성(佛性: 부처님의 성품) 따라서 그대로 지키는 계율이 라고 말입니다. 따라서 보살계는 불성계에 해당합니다.
보살계 가운데는 적극적인 계율과 소극적인 계율이 있습니다.
“무엇 무엇을 하지 말라” 는 계율은 소극적인 계율이고, “무엇을 해야 한다”는 계율은 적극적인 계율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적극적인 계율을 불교술어로 작지계(作持戒)라 하고 “무엇 무엇을 하지 말라” 하는 소극적인 계는 지지계(止持戒)라 합니다.
이러한 계율 가운데서, 작지계 중의 하나가 “법사(法師)를 만나면 반드시 법문을 청하라” 는 것입니다.
법사를 만나면 반드시 법문을 청해서 법문을 들어야 만, 계율에 해당한다는 것입니다.
만일 법사를 만나고도 법문을 청하지 않으면 계율을 파계하는 것이 됩니다.
그리고 법사한데 법문을 청할 때는 반드시 같은 자리에 앉지 말고, 이와 같이 높은 자리를 마련해 놓고서 법문을 청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법사가 소중한 것 보다도 부처님 법이 그만치 소중하고 부처님 법을 대변해서 말을 하는 사람이니까, 법을 존중하는 의미에서 반드시 높은 자리를 마련해 가지고서 법문을 청하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산승(山僧)도 무슨 법문을 잘 하는 것도 아니고, 높은 것도 아니고, 다만 부처님 법(法) 따라서, 부처님 법을 말하기 위해서 이와 같이 높은 자리에 앉아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각기 자기 소원이 있습니다.
작든 크든 소원이 있는 것인데 이러한 우리 소원 가운데서 가장 큰 소원, 모든 소원을 다 합한 소원을 “본원(本願)” 이라 합니다.
지금은 별로 없습니다만 왜정 때 보면 서울에는 본원사(本願寺)라 하는 절이 여러 군데가 있었고, 지방의 작은 도시에도 역시 본원사라는 절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절 이름은 부처님의 본원을 주로 내세운다는 뜻 입니다.
우리는 모두가 다 성불(成佛) 하고자 합니다.
그런데, 우리 원이 크지 않으면 성불의 대도(大道)까지를 잘 못 들어갑니다.
법화경(法華經)에 보면 우리 행위 가운데서 “서원안락행(誓願安樂行)” 이라 서원은 우리가 맹서하고 무엇 무엇을 하겠다하는 것이 서원 아니겠습니까, 서원을 세우면 그냥 우리 마음이나 몸이나 안락스럽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공부할 때에 조금 피로하면 “아, 이거참 내가 너무 무리했구나” 조금 고생스러우면 “고생스럽구나” 이렇게 말을 합니다.
그러나 서원이 크면 그런 고생은 안중에도 없습니다.
“기어코 내가 성불해야 하겠다” 또는 “많은 중생을 제도해야 하겠다” 이러한 큰 서원을 품으면 조그만 고생이나 그런 것이 안중에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마땅히 성불해야 하는 것 인데 또한, 기왕이면 고행을 떠나서 안락스럽게 해야 할 것인데, 어떻게 하면 안락스럽게 할 것인가 하는 법문 가운데서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이 “서원안락행” 이라는 법문입니다.
위대한 서원을 세우면 그때는 안락스럽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모든 서원 가운데서 제일 큰 서원이 아까 말씀마따나 본원(本願)입니다.
그러면 어떤 것이 본원인가?
부처님의 본원(本願) 곧, 부처님은 대체로 어떤 분이고, 부처님은 어떠한 목적 의식이 있는 것인가?
본원을 약사경(藥師經)에 보면 12대원(十二大願)이라, 열두가지 큰 원으로 본원을 풀이했습니다.
또 대무량수경(大無量壽經)에 보면 48원(四十八願)이라, 마흔여덟 가지로 본원을 대변했습니다.
또 온통 몰아서 심지관경(心地觀經)에는 사홍서원(四弘誓願)이라, 네 가지 큰 서원으로 말씀했습니다.
그러니까 가장 간추리면 사홍서원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 아는 바와 같이 중생무변서원도(衆生無邊誓願度) 라, 중생이 끝도 갓도 없으나 한사코 다 제도하고, 번뇌무진서원단(煩惱無盡誓願斷) 이라, 한도 끝도 없는 번뇌를 맹세코 다 끊고, 법문무량서원학(法門無量誓願學) 이라, 위없고 한량없는 법문을 기필코 다 배우고, 불도무상서원성(佛道無上誓願成) 이라, 더 이상 위없는 무상불도(無上佛道)를 필경에 이루리라는 것이 부처님의 가장 간추린 근본서원입니다.
이러한 본원을 우리가 확실히 믿어야만 부처님의, 우주를 섭리하는 그런, 목적의식을 알 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기독교는 하나님의 섭리를 말한다. 그러니까 불교와는 맞지 않다.” 이렇게 섣불리 말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말 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기독교 쪽은 우리 불교보다 조금 더 인격적으로 풀이 했다는 점만 차이가 있을 뿐이지, 내나야 우주의 근본서원, 우주의 근본 목적의식을 표현한 점은 거의 비슷비슷합니다.
우주는 하나의 생명체 인데, 생명체가 어떠한 목적의식이 있는가?
그러한 목적 의식은 아까 말씀 한대로 본원인데, 마흔여덟 가지 서원 또는 열두 가지 서원 또는 네 가지 큰 서원, 이런 것을 다 몰아서 한 말로 풀이하면, “무상불도를 성취하고 무량중생을 제도한다” 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주의 목적의식입니다.
우리는 지금 참선(參禪)하고자 하는 목적 의식을 가지고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참선은 이러한 무상불도를 성취하는 즉, 우주의 목적 의식이자 우리 중생의 가장 높은 서원, 제일 거룩한 원을 성취하고자 하는 가장 가까운 길이요 가장 확실한 길인 것입니다.
요즈음 신문쪽지를 보면, 참선은 비단 불교인 뿐만 아니라 천주교에서도 하나의 명상법(暝想法)이라고 해서 가르치고 있다고 합니다.
또한 우리 불교에서 참선에 유능한 분들을 초빙해서 참선법을 묻기도 한다고 합니다.
이런 정도로 인류문화의 최고봉으로, 인류의 수행방법으로는 가장 수승(殊勝)한 법으로 지금 각광(脚光)을 받고 있는 것이 참선법입니다.
淸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