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고난 근기가 뛰어난 자는 한 경계 한 기미에 곧장 그 조짐을 알아차리고 진리의 말을 토해내며, 평범의 소굴에서 스스로 벗어나 나고 죽음에 걸림이 없이 대자유와 대해탈을 누리게 되오.
그러나 근기가 조금만 처지는 자는 설령 확철대오할지라도 번뇌업습의 기운이 말끔히 사라질 수는 없기 때문에 여전히 생사의 바퀴를 돌면서 중음(中陰)을 거치고 태반(胎盤)을 나오면서 대부분 혼미와 후퇴를 거듭하기 마련이오. 확철대오한 사람도 그러하거늘 하물며 깨닫지도 못한 사람이야 말해 무엇하겠소? 그래서 정말로 부처님의 자비가피력을 굳게 믿고 의지하는 정토 염불 법문에 전심진력하는 것이 가장 확실하고 온당한 계책이라오.
율종(律宗)이나 교종(敎宗)·선종(禪宗)은 맨처음 교리(敎理)를 분명히 배운 뒤 그에 따라 수행하여야 하오. 수행공부가 깊어져 미혹을 끊고 진리를 증득하여야만 바야흐로 생사윤회를 벗어나게 되지요. 그런데 교리조차 잘 알지 못하면 눈 먼 소경수행[盲修轄煉]이 되어, 뭔가 조금 얻으면 다 통했다고 착각하거나 악마에 들려 미쳐 날뛰기 십상이오.
설사 교리를 분명히 알고 수행공부가 깊어졌다고 할지라도 미혹을 다 끊지 못하고 터럭끝만큼만 남겨 두면 여전히 윤회 고해를 벗어날 수 없게 되오. 미혹과 업장이 깨끗이 사라져 생사고해 벗어나기를 계속 기대하는 것은 부처님의 경지와는 너무도 멀리 동떨어져 얼마나 수많은 겁(劫)을 더 수행하여야 비로소 부처의 과보를 원만히 이룰 수 있을지 알 길이 없소.
비유하자면, 평범한 서민이 태어나면서부터 몹시 총명하고 지혜로워 책 읽고 글 공부 시작한 지 십여 년 만에 갖은 고생 끝에 어느 정도 학문이 이루어져 과거에 급제하고 벼슬길에 오르는 것과 같겠소. 그가 아주 큰 재주와 능력이 있다면 낮은 관직부터 점차 승진하여 재상까지 오를 수 있을 것이오. 재상은 더 이상 올라갈 수 없는 최고 정점의 관직으로 모든 신하 중의 으뜸 자리지요. 그러나 재상도 만약 태자에 비교한다면 귀천이 하늘과 땅처럼 현격히 차이 나오. 하물며 황제에 빗대겠소? 평생 신하로서 군주의 명령을 받들어 행하며 신명을 다 바쳐 나라 다스림을 도와야 할 운명일 따름이오.
그러나 이러한 재상 직위도 오르기가 정말 쉽지 않소. 반평생 힘과 재주를 다해 수고하면서 온몸으로 감당한 뒤 운 좋게 황제에게 인정받아야 말년에 잠시 그 자리에 오를까 말까 하는 거요. 만약 학문이나 재능이 조금이라도 모자라는 점이 있다면 그 자리에 이름조차 거론되지 못할 것은 당연하오. 그러한 자가 백천만억이나 되는데, 이는 곧 자신의 힘[自力]에만 의존하는 것이라오.
학문과 재능은 교리를 분명히 알아 그에 따라 수행함을 비유하고, 직위가 재상까지 승진하는 것은 수행공부가 깊어져 미혹을 끊고 진리를 증득함을 비유하며, 단지 신하로 일컬어질 뿐 끝내 군주가 될 수 없는 것은 비록 생사윤회를 벗어날지라도 아직 불도를 이루지는 못함을 비유하오.(신하는 결코 황제가 될 수 없소. 황실에 탁생(託生)하여 황태자로 태어나지 않는 한. 마찬가지 이치로 기타 법문을 수행하여도 부처가 될 수 있지만 다만 정토염불 법문과 서로 비교하면 너무 동떨어진 차이가 나게 되오. 독자들은 이 비유가 함축하는 뜻을 잘 음미하고 문자에 얽매이지 않기 바라오. 그런데 화엄경의 맨 끝에 보면 부처와 같은 깨달음을 얻은 보살조차 오히려 십대원왕(十大願王)으로 극락정토에 왕생하길 회향하고 있으니, 이는 바로 재상이 황실에 탁생하여 황태자로 태어나겠다는 비유와 의미가 서로 통한다고 볼 수 있소. 염불 법문이 화엄경을 얻음으로써, 마치 큰 바다가 온 강물을 집어 삼키고 너른 허공이 삼라만상을 감싸고 있는 것처럼 밝혀졌으니 정말로 위대하지 않을 수 없소.)
그리고 학문이나 재능이 조금이라도 모자라 재상이 되지 못하는 자가 몹시 많다는 것은 미혹을 완전히 끊지 못하여 생사고해를 벗어나지 못하는 중생이 너무도 많음을 비유하는 것이 되겠소. 그런데 염불법문은 설령 교리를 잘 모르고 미혹과 업장을 다 끊지 못했다고 할지라도, 단지 믿음과 발원으로 아미타불의 명호만 지송(持誦)하여 극락왕생을 구하면 임종 때 틀림없이 부처님께서 친히 맞이해 서방정토에 왕생하게 되오. 극락세계에 왕생하면 부처님을 뵙고 법문을 들어 무생법인(無生法忍)을 깨달은 뒤 바로 그 생애에 부처 후보의 지위에 오르지요.
이는 부처님의 힘[佛力]이자 또 자신의 힘[自力]을 겸비하는 것이오. 믿음과 발원으로 부처님 명호를 지송하는 것은 자신의 힘으로 부처님을 감동시킴이요, 48대 서원으로 극락왕생을 바라는 모든 중생을 자비로이 맞이하시는 것은 부처님의 힘이 나에게 호응[응집]하심이라오. 감동과 호응[感應]의 통로가 서로 교차하여 이와 같은 효험을 얻게 되오.
또 만약 교리를 깊이 분명하게 알고 미혹을 끊어 진리를 증득한 사람이 극락에 왕생하게 되면 그 품위(品位)가 더욱 높고 불도를 훨씬 빨리 원만하게 성취하게 되오. 그래서 문수 보살과 보현 보살을 포함한 화장(華藏) 세계의 대중이나 마명(馬鳴)과 용수(龍樹) 같은 역대 위대한 종사(宗師)와 조사(祖師)들이 한결같이 극락왕생을 발원한 것이오.
비유하자면, 황실에 태어나면 한번 어머니 뱃속에서 나오면서부터 고귀한 태자로 모든 신하를 거느리게 되는 이치와 비슷하오. 이는 바로 황제의 힘이오. 태자가 자라면서 점차 학문과 재능이 하나씩 갖추어지면 마침내 황제의 지위를 물려받아 천하를 다스리게 되고 모든 신하와 백성이 그의 말을 따르게 될 것이오. 이는 황제의 힘과 자신의 힘을 겸비한 것이겠소.
염불 법문 또한 이와 같소. 미혹과 업장을 완전히 끊지 못한 채 부처님의 자비 가피력으로 서방정토에 왕생하면서 바로 생사고해를 벗어남은 태자가 태어나면서부터 모든 신하를 압도하는 것과 비슷하고, 방생한 뒤 미혹과 업장이 저절로 끊어져 부처 후보의 지위에 오름은 태자가 자라면서 학문과 재능을 갖추어 황제 지위를 물려받음과 비슷하오. 또 이미 미혹과 업장을 끊은 이는 마명이나 용수 같은 역대 조사와 같고, 벌써 부처 후보의 지위에 오른 이는 문수 보살이나 보현 보살과 같으며, 화장 세계 대중이 모두 왕생을 발원한 것은 마치 예전에는 변방 시골에 처박혀 감히 황제 자리를 물려받을 엄두도 못내던 이들이 지금은 동궁(東宮)에 거처하면서 머지 않아 등극(登極)할 차례를 기다리는 것과 비슷하오.
우리 중생들의 심성은 부처와 똑같소. 단지 미혹되어 진리를 등짐으로써 끊임없이 윤회하고 있을 따름이오. 이를 불쌍히 여기신 여래께서 자비로이 근기에 맞춰 설법하심으로써 모든 생명에게 본래의 집에 되돌아갈 길을 열어 주셨소. 그 법문이 비록 많긴 하지만 크게 둘로 요약될 수 있소.
바로 참선과 정토염불이오. 둘 모두 해탈이 가장 쉽지만, 참선은 오직 자신의 힘만 의지하고 염불은 부처님의 힘을 겸비하기 때문에 양자를 서로 비교하면 염불 법문이 시절인연과 중생근기에 가장 잘 들어맞는 셈이오. 비유하자면, 사람이 강이나 바다를 건널 때 직접 헤엄치지 않고 배에 올라타야만 안전하고 재빨리 저쪽 언덕(彼岸)에 도달하면서 몸과 마음 모두 가뿐한 것과 같은 이치요.
말법시대의 중생들은 오직 크고 안전한 배와 같은 염불 법문에 의지해 수행할 수 있다오. 그렇지 않고 한번 근기에 어긋난 법문에 들어서 시절인연을 놓치면 애써 수고만 다할 뿐 도를 이루기 어려울 것이오.
대보리심을 발하고 진실한 믿음과 서원을 내어 평생토록 오직 나무 아미타불 명호만 굳게 지니고 염송하기 바라오. 염송이 지극해지면 모든 감정을 잊어버리고 염송 그 자체가 무념(無念)이 되어 선종과 교종의 미묘한 의리(義理)가 저절로 철저하게 나타나게 될 것이오. 그러다가 임종에 이르면 부처님과 보살님이 몸소 오시어 직접 맞이해 갈 것이니, 곧장 최상의 품위에 올라 앉아 무생법인을 증득하게 되오. 오직 한 가지 비결이 있을 따름이니 정말 간절히 일러 주겠소.
정성을 다하고 공경을 다하면, 미묘하고 또 미묘하고 미묘하리로다.(竭誠盡敬, 妙 妙 妙 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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