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참선(參禪)과 염불(念佛)의 관계 1

참선과 정토(염불)는 근본 이치상으로는 둘이 아니지만 구체적인 수행현실을 따지자면 하늘과 땅 차이가 난다오.

참선은 확철대오하고 완전히 증득(證得)하지 아니하면 생사 윤회를 벗어날 수 없소. 그래서 일찍이 위산(僞山) 선사도 이렇게 말씀하셨소.

“돈오(頓悟)의 올바른 인연을 만나야만 비로소 홍진을 벗어나는 점진적인 계단에 들어서며, 매 생애마다 퇴보하지 않는다면 부처의 단계도 틀림없이 기약할 수 있다.”

“처음에 마음이 인연에 따라 어느 순간 자성(自性)을 단박 깨달을 수 있지만, 시작도 없는 오랜 옛날부터 쌓여온 업습(業習)의 기운은 그렇게 단박에 모두 사라질 수 없다. 그 업습이 의식에 나타나는 것을 말끔히 제거하여야만 비로소 생사를 벗어날 수 있게 된다.”

이는 마치 사람이 밥을 먹을 때 첫 술에 배부를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오. 천하의 선지식들이 열반의 경지를 증득하지 못하는 것도 그 공덕이 성인과 가지런하지 못하기 때문이오.

그래서 오조(五祖) 계(戒) 선사는 소동파(蘇東坡)로 태어나고, 초당(草堂) 청(淸) 선사는 노공(魯公)으로 다시 출생한 거라오. 예로부터 확철대오하고서도 완전히 증득하지 못한 대종사(大宗師)들이 이처럼 수없이 많소.

이는 정말로 오직 자력(自力)에만 의지하고 부처님의 자비 가피를 구하지 않은 탓이오. 미혹이나 업장이 말끔히 제거되지 못하고 조금이라도 남아 있는 한 결코 생사윤회를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라오.

반면 정토 염불은 믿음과 발원과 수행[信願行]의 삼요소만 갖추면 업장을 짊어진 채 극락정토에 왕생할 수 있으며, 한번 왕생하면 생사윤회를 영원히 벗어나게 되오. 이미 깨달아 증득한 사람은 곧장 부처의 후보 자리[補處]에 오르게 되고, 아직 깨닫지 못한 중생이라고 할지라도 불퇴전(不退轉:阿婢跋致)의 경지를 증득하게 되오.

그래서 연화장(蓮華藏) 세계의 모든 중생들이 한결같이 극락정토에 왕생하기를 발원하며, 선종과 교종의 수많은 선지식들이 나란히 서방정토에 왕생하는 거라오. 이는 부처님의 자비가피력에 완전히 의지하여 자신의 간절한 믿음과 발원을 행하기 때문에 쌍방의 마음이 서로 교류되어 빨리 정각(正覺)을 이루는 감응이 나타나는 것이오.

지금 같은 세상에서는 참선보다는 정토 염불 수행에 전념하는 것이 마땅한 방법이오. 한 티끌도 물들지 아니한 마음 가운데서 만 가지 공덕을 두루 갖춘 위대하고 거룩한 나무아미타불의 명호(名號)를 지송(持誦)하는 것이오.

더러 소리 내어 염송하기도 하고 더러 소리 없이 조용히 암송하기도 하되, 끊어짐이나 잡념망상이 없도록 하며, 반드시 생각〔念〕이 마음에서 일어나 소리가 자기 귀로 들어가면서 한 글자 한 글자가 또렷또렷 살아있고 한 구절 한 구절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염송해야 하오.

이렇게 염불을 오래 계속하다 보면 저절로 한 덩어리가 되어 염불삼매(念佛三昧)를 몸소 증험(證驗)하고 서방정토의 풍취를 스스로 알게 될 것이오. 그래서 대세지보살이 육근(六根:눈·귀·코·혀·몸·생각)을 모두 추스려 청정한 생각을 끊임없이 이어가는 수행으로 삼매에 이르는 최상의 원통(圓通) 법문을 삼은 것이오. 정토 염불로 곧장 선정(禪定)에 드는 방편이 이보다 더 묘한 게 또 어디 있겠소?

참선 수행을 하는 사람들은 오직 자신의 힘[自力]에만 의지하고 부처님의 가피력을 구하지 않소. 그래서 공부에 힘이 붙어 진짜와 가짜가 서로 뒤섞여 공격해 올 때 여러 가지 경계(境界)가 번쩍 나타났다가 번쩍 사라지면 갈피를 잡지 못하고 흔들리기 쉽소.

그러한 경계들은 마치 잔뜩 흐리고 비오던 날씨가 장차 개이려고 할 때 두터운 구름장이 터지면서 문득 햇빛이 눈부시게 비치다가 눈 깜박할 사이 다시 어두컴컴해지기를 반복하여 도대체 날씨 변화를 예측할 수 없는 경우와 비슷하오.

이러한 상황은 진짜 도안(道眼)이 뜨인 자가 아니면 식별해낼 수가 없소. 이 때 만약 한 소식(消息) 얻은 걸로 착각하면 악마에 집착[走火入魔]하여 미쳐 날뛰게 되고 어떤 의약으로도 고칠 수 없게 되오.

염불 수행하는 사람이 진실한 믿음과 간절한 발원으로 온갖 공덕을 갖춘 위대한 명호[萬德洪名 : 南無阿彌陀佛]를 염송하는 방법은 마치 밝은 해가 중천에 걸린 대낮에 큰 길을 가는 것과 같아서, 단지 마귀나 요정, 도깨비들이 얼씬도 못하고 자취를 감출 뿐만 아니라 샛길로 빠지거나 옳고 그름을 따질 염두조차 일어날 여지가 없다오.

이러한 염불 수행을 꾸준히 계속하여 공부가 순수해지고 힘이 지극히 붙으면 결국 “온 마음이 부처이고 온 부처가 마음이 되어, 마음과 부처가 둘이 아니고 마음과 부처가 하나가 되는[全心是佛, 全佛是心, 心佛不二, 心佛一如]” 경지에 이르는 것이오.

이러한 이치와 이러한 수행은 단지 사람들이 이를 잘 몰라서 부처님이 중생들을 두루 제도하시고자 한 원력에 부합하지 못할까 걱정될 따름이오. 그러니 어찌 은밀히 숨겨 두고 전해 주지 않거나 또는 어떤 특정인에게만 전해주는 일이 있겠소? 만약 아무도 모르게 은밀히 입과 마음으로만 전수하는 미묘한 비결이 있다면, 이는 삿된 악마나 외도(外道)일 것이며 불법은 아니라오.

법당 화상(法幢和尙)은 숙세에 영특한 근기를 타고나, 처음에는 진실한 유학자[眞儒]였다가 나중에 진실한 스님[眞僧]이 되셨으니, 글공부하고 도 닦은 게 결코 헛되지 않았다고 칭송할 만하오. 세상에 진짜 유학자가 있어야 비로소 진짜 스님이 있게 되오. 별 볼일 없이 어중이 떠중이로 노닐던 무뢰한(無賴漢)들이 출가하면 정말로 거의 모두 불법을 파괴하는 마왕(魔王)과 외도가 되기 십상이오.

법당 화상의 어록은 모두 사람들 마음의 눈을 곧장 통쾌하게 확 틔여 주는 훌륭한 법문으로, 인쇄하여 널리 유통시키고 선가(禪家)의 보배로도 삼을 만하오. 그러나 이는 오직 사람의 마음을 곧장 가리켜 본성을 보고 부처가 되게 하는[直指人心, 見性成佛] 길을 밝혀 놓았을 따름이오.

우리들은 오로지 정토염불을 수행하기만 하면 되니, 그 말씀의 구절들을 붙잡고 씨름하여 둘다 손해보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말기 바라오. 선가에서 주창하는 것은 오직 근본 요지에 국한되며, 그밖에는 일체 밝히지 않소. 원인을 닦아 과보를 얻고 미혹을 끊어 진아(眞我)를 증득하는 일은 모두 스스로 묵묵히 수행해 나가야 할 공부라오.

그런데 문외한들은 선가에서 이러한 수행과 증득의 도리를 뚜렷하게 언급하지 않는 것을 보고는 선가에서 이러한 방법을 쓰지 않는다고 말하니, 이는 곧 선가를 비방하고 부처님과 불법을 비방하는 죄악이오.

교리를 좀 아는 총명한 사람들은 으레 염불수행이 왜 굳이 서방의 극락정토에 왕생하려고 선택하는지 따져 묻지요? 마치 상대적인 분별과 취사선택을 완전히 초월한 수행만이 절대궁극인 양 여기는가 보오. 그러나 이는 취함도 없고 버림도 없는 궁극의 경지는 부처가 된 다음의 일이라는 걸 모르기 때문이오.

아직 부처가 되지 못했다면 설령 미혹을 완전히 끊고 진리를 증득하는 것조차 모두 취사선택의 편에 속하오. 미혹을 완전히 끊고 진리를 증득하는 취사선택을 인정한다면, 염불법문이 동방 대신 서방을 향하고 혼탁한 사바 고해를 떠나 극락정토에 왕생하려는 발원을 어찌 허용하지 않는다는 말이오?

참선 법문 같으면 취사선택이 모두 잘못이지만, 염불 법문에서는 취사선택이 모두 옳다오. 참선은 오로지 자기 마음[自心]만 참구하는 것이고 염불은 부처님의 힘을 함께 믿고 의지하기 때문이오.

그런데 이렇게 서로 판이한 법문의 근본원리를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망령되이 참선 법문을 가지고 염불 법문을 공격 비판하는 것은 그 의도가 몹시 잘못되었소. 참선에서 취사선택을 안 하는 것은 본디 최상의 정수이지만 염불에서도 취사선택을 없애려 한다면 곧 독약이 되고 만다오.

여름에 모시옷 입고 겨울에 털가죽옷 입으며, 목마르면 물 마시고 배고프면 밥 먹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순리 아니겠소? 서로는 비난할 수도 없거니와 또 어느 한쪽만 옳다고 고집해서도 안 되오. 오직 각자의 근기와 본성에 적합한 방편을 골라 잡는다면 폐해가 없이 유익할 것이오.

동방을 버리고 서방을 취하는 것이 생멸(生滅)이라고 비방하는 자들은 거꾸로 동방을 고집하여 서방을 버리는 것이 단멸(斷滅)임을 모르고 있소. 대저 아직 미묘한 무상정각을 증득하지 못한 중생이라면 누가 취사선택을 벗어날 수 있겠소?

3아승지겁을 수련하고 백겁 동안 원인 자리를 닦아 위로 불도를 구하고 아래로 중생을 교화하며 미혹을 끊고 진리를 증득하는 일체의 수행과정이 어느 것 하나 취사 선택의 연속이 아니겠소? 모름지기 여래께서 모든 중생들이 한시 바삐 진리의 몸[法身]과 고요한 광명[寂光]을 증득할 수 있도록 이끌기 위하여 특별히 나무아미타불 명호를 지송(持誦)하여 서방정토에 왕생하라고 간곡히 권하셨음을 잘 알고 명심해야 되오.

印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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