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천성은 본디 선량한데, 바깥 사물을 대하고 속세의 인연에 얽히어 점검과 단속을 소홀히 하면 금세 각종 집착, 망상, 편견들이 일어나, 본성은 간 데 없이 매몰되고 마는 경우가 비일비재하오.
이러한 까닭에 옛 성현들은 각각 훌륭한 가르침의 말씀을 남겨 사람들이 그를 실행하여 애초의 천성을 회복하도록 바라왔소. 그러한 말씀과 문자는 매우 많지만, 그 행실 내용은 ‘격물치지(格物致知)하고 명덕을 밝혀(明明德) 지극한 선에 그치는(止至善)’ 것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지요.
성현의 도는 오직 정성(誠)과 광명(明)일 뿐이오. 성인과 미치광이의 구분은 한 순간 일념에 달려 있으니, 성인도 마음을 놓아 버리고 망상을 좇아가면 곧 미치광이가 되고, 미치광이도 한 순간 생각을 극복하면 성인이 되지요. 지조와 방종, 이득과 상실의 형상은 비유하자면 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배와 같아서, 앞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곧 퇴보하는 것이라오. 그러므로 힘써서 자기 마음을 꽉 붙잡아야 하지, 행여 터럭끝만큼이라도 방종하고 제멋대로 내맡겨서는 안 되오. 무릇 성(誠)이라는 한 글자는 성인과 범부가 함께 갖추고 있으며 둘로 나누어지지 않는 한결같은 진심이고, 명(明)이라는 한 글자는 보존 함양하고 분명히 성찰하는 것으로서 범부에서 성현으로 통하는 확트인 길이지요.
그런데 범부의 경지에서는 일상생활 가운데 온갖 상황(잡념망상)이 몰려 들기 때문에, 한번 조심히 살피지 않으면 도리에 어긋나는 갖가지 사사로운 감정과 생각들이 눈 깜짝할 사이에 막 생겨나오. 이러한 잡념망상이 일단 생겨나면 인간의 본래 청정한 진심이 거기에 뒤덮여 갇히게 되고, 그 상태에서 하는 것은 모두 중용(中庸)과 정도(正道)를 잃게 된다오.
그리하여 한번 뼈를 깎는 듯한 절실한 반성참회 공부로 번뇌망상을 모두 이기고 제거하며 청정하게 다 없애 버리지 않으면, 앞으로 나아갈수록 더욱 타락하여 밑바닥을 모르게 되지요. 단지 성인 마음만 갖추었을 뿐(행동으로 실천하지 않는다면) 영원히 어리석은 중생의 대열에 빠져 들고 말 것이니, 어찌 슬프지 않겠소?
그러나 성인이 되는 것은 어렵지 않으니, 스스로 그 명덕(明德)을 밝히는 데에 있소. 그 명덕을 밝히고자 한다면 모름지기 사물을 올바르게 하는 격물(格物)과 분명히 살펴 아는 치지(致知)로부터 착수해야 하오. 이른바 격물치지란 무엇인가? 격(格)은 격투(格鬪 : 몽둥이로 치고 싸우다) 나 또는 한 사람이 만 명의 적을 대항하여 싸우는 것과 같으며, 물(物)은 번뇌망상으로 흔히 말하는 인간의 욕망(人慾)을 가리키오.
번뇌망상의 욕망과 싸움에 있어서는 반드시 한바탕 강인하고 결연한 겁없는 용기와 의지를 다짐하여야 비로소 실효(實效)를 얻을 수 있소. 그렇지 못하면 마음이 바깥 사물에 따라 움직이게 될 것이니, 어떻게 사물과 격투(格物)할 수 있겠소?
치(致)란 끝까지 밀어부쳐 확충함을 일컫고, 지(知)란 우리 인간이 본래부터 타고난 바 부모를 사랑하고 윗사람을 존경하는 양지(良知 : 선량한 알음알이. 良識)로서, 교육이나 학습을 통하지 않고서 처음부터 타고난 본능이오.
그러나 보통사람들은 일상생활 속에서 성찰과 점검을 하지 않기 때문에, 그냥 사물에 따라 움직이고 마침내 부모 사랑이나 윗사람 존경과 같은 양지(良知)조차 상실하고 만다오. 하물며 이러한 양지를 끝까지 밀어부쳐 확충함으로써 만사에 두루 대응하고 자기 심성을 함양할 수 있겠소?
이러한 까닭에 성현은 사람들이 명덕(明德)을 밝혀 지극한 선에 머물도록 하기 위하여 맨처음 실행에 착수할 곳으로 먼저 ‘격물치지’를 거론하였으니, 그 말씀 내용과 수행은 더할 나위없이 신묘하오.
가령 사람의 욕망이라는 물건은 힘을 다해 바로잡거나 제거하지 않으면, 본래 자기 안에 갖춰져 있는 진실한 지혜도 결코 철저하게 드러나기는 어렵소. 만약 진실한 지혜(진리)를 밝게 드러내려면, 일상적인 말과 행동에 있어서 항상 깨달음과 관조(觀照)를 일으켜, 도리에 어긋나는 감정적인 생각은 잠시라도 마음에서 싹트지 않게 하고, 항상 마음이 텅 비어 환하게 밝도록 해야 하오. 마치 거울이 누대(樓臺)에 걸려 명경대(明鏡臺)가 되면 주위 경계를 있는 모습 그대로 비춰 드러내주는 것과 같소. 단지 거울 앞에 서 있는 사물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비춰줄 뿐, 그 경지에 따라서 거울이 돌진 않는 것이오. 예쁘고 미운 것은 사물로부터 말미암으니 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겠소? 앞으로 다가올 것(미래)은 미리 계산하지 않고, 떠나간 것(과거)은 연연하지 않는 게요. 만약 혹시라도 이치에 어긋나는 감정적인 욕망의 생각이 조금이라도 싹트고 움직인다면, 마땅히 즉각 엄하게 공격하고 다스려서 송두리째 도려내야 하오.
마치 적군과 대치하여 싸우매, 적이 내 영토의 경계를 침범하지 못하게 할뿐만 아니라, 나아가 적장의 목을 베고 그 깃발을 빼앗아 나머지 적장의 목을 베고 그 깃발을 빼앗아 나머지 잔당들도 섬멸해 버리는 것과 같소. 무릇 군대를 통제하는 방법은 모름지기 엄하게 스스로 다스려서, 태만하거나 소홀하지 말며, 자기를 극복하고 예법에 복귀하며[克己復禮], 공경을 다하고 정성을 보존해야 하오.
그때 사용한 군기(軍器)와 병력(방편법문)은 모름지기 안회(顔回)의 사물(四勿 : 인을 행하는 극기복례의 구체적 방법으로, 공자가 안회에게 예의가 아니면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움직이도 말라고 가르친 네가지 금지)과 증자(曾子)의 삼성(三省 : 증자가 ‘남을 위해 충실하지 않았는지, 벗과 교유함에 미덥지 않았는지, 스승께서 전수하신 것을 제대로 익히지 않았는지’ 세 가지로 매일 자신을 반성했다는 수행방법)과 거백옥( 伯玉)이 허물이 아주 적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잘못을 알아차려 회개한 방법등이 필요하고, 거기다가 전전긍긍(戰戰兢兢)하면서 깊은 연못에 임하는 듯[如臨深淵] 살얼음을 밟는 듯이[如履薄氷] 근신하는 마음을 더해야 할 게요.
도리에 어긋나는 감정적인 욕망을 이토록 삼엄하게 상대하여 군대의 위엄이 멀리 떨치면, 도적의 무리가 간담이 썰렁해져 멸종에 이르는 극한 참패를 당할까 두려워하고, 그저 따뜻이 어루만져 주는 큰 은택만 바라게 될 것이오. 그로 말미암아 이런 작당들이 서로 함께 투항하여 지극한 교화에 귀순하면, 옛날 마음을 완전히 혁파해 버리고 반성참회로 새로운 덕을 닦기 시작하겠지요.
장수가 문 밖에 나가지 않고 병기(총칼)에 피를 칠하지 않으면서, 도적이나 원수를 모두 어린애처럼 감싸안아 양민으로 감화시키면, 위에서 행동으로 보인 모범을 아랫사람들이 본받고 모든 선비들이 다 청정하고 평안해져, 창칼을 움직이지 않고도 앉아서 태평세계를 이룰 수 있소.
이렇게 한다면, 격물로부터 치지에 이르고 치지로부터 명덕을 밝힐 수 있게 되며, 나아가 정성과 광명이 일치하게 되면 범부가 곧 성인이 될 것이오. 그리고 더러 타고난 근기와 재질이 낮고 모자라 이를 실행할 수 없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조열도(趙閱道)를 본받아야 할 것이오. 조열도는 낮 동안에 행한 것을 밤에 반드시 향을 사르고 하느님[上帝]께 고했는데, 하느님께 고할 수 없는 것은 감히 행하지를 않았다는 게요.
또 명(明)나라 때 원료범(袁了凡)은 어떠한 악도 짓지 않고 모든 선을 받들어 행하여(諸惡莫作, 衆善奉行), 운명을 자아로부터 세우고 복을 자기로부터 구함(命自我立, 福自我求)으로써, 조물주가 혼자 권능을 독단(전횡)하지 못하도록 했소.
원료범은 공과격(功過格)을 받아 지닌(受持) 후로는, 무릇 마음을 일으키고 생각을 움직이며 말하고 행동하는 데에 있어서 선과 악을 섬세한 것이라고 모두 다 기록함으로써, 착함이 날로 증가하고 악함이 날로 감소되길 기약하였소. 처음에는 선과 악이 서로 반반 뒤섞였으나, 오래 지속하면서 오직 선만 있고 악은 완전히 없어졌소.
복이 없는 운명도 복이 있게 전환하고, 요절할 수명도 장수하게 바꾸며, 자손이 없는 팔자도 자손이 많은 팔자로 뜯어 고칠 수 있게 되었소. 또 현생에 당장 우수한 성현의 경지에 들어가고, 그 뒤 죽어서는 높이 극락의 고향에 올라갔으며, 그 행동은 세상의 법칙이 되고 그 말은 후세의 정법이 되었소.
그 사람이 장부일진대 나도 또한 그러할지니, 어찌 스스로를 얕보고 자포자기하여 뒤로 물러날 수가 있겠소?
혹자는 이렇게 물을지 모르오.
“격물(格物)이란 천하 사물의 이치를 모두 다 궁구하고, 치지(致知)란 나의 지식을 끝까지 추론하는 것일진대, 반드시 하나 하나 밝히 알아서 완전히 통달하는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하여 사람의 욕망을 격물의 대상으로 삼고 진실한 지혜[眞知]를 치지의 대상으로 삼고, 인간의 욕망을 다스려 극복하고 진실한 지혜를 밖으로 드러나게 함으로써 격물치지(格物致知)라고 할 수 있단 말인가?”
나는 그에 대해 이렇게 답변하겠소.
“정성(誠)과 명덕(明德)은 모두 마음의 본체로부터 말하는 것이오. 이름은 비록 두 개지만 실체는 본래 하나요. 치지(致知)와 성의(誠意) 정심(正心)의 지(知), 의(意), 심(心) 이 세 가지는 마음(心)의 본체와 작용으로부터 함께 아울러서 말한 것인데, 실지로는 세 가지가 하나요. 격(물), 치(지), 성(의), 정(심), 명(덕)에서, 쳐서 다스리고(格) 이르게 하고(致) 정성스럽게 하고(誠) 바르게 하고(正) 밝게 하는(明) 다섯 가지는, 모두 사악한 것을 막아 정성을 보존하고, 망령을 되돌이켜서 진리에 되돌아 가는 것을 말하지요. 점검하고 성찰하며 전진하는 공부에 있어서는 명(덕)이 총강령이 되고, 격(물), 치(지), 성(의), 정(심)은 개별적인 세목일 따름이오. 수신(修身), 정심(正心), 성의(誠意), 치지(致知)는 모두 다 명덕을 밝히는 방편이고 까닭(所以)이오
印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