雖有才學 無戒行者 如寶所導 而不起行
雖有勤行 無智慧者 欲往東方 而向西行
비록 재능과 학문이 있다 할지라도 계행이 없는 자는 보물 있는 곳에 인도해도 일어나 가지 않음과 같으며,
비록 부지런히 행함은 있으나 지혜가 없는 사람은 동쪽으로 가려 하면서도 서쪽으로 향하여 가는 것과 같다.
이 대목은 윤리적 규범인 ‘계(戒)’의 중요성을 논하고 있다. 원효스님이 중시하는 것은 마음을 정화시키는 수행이 있어야 청정한 계행을 이룩할 수 있다고 보았다.
‘계(戒)’라고 하는 것은 양면성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먼저, ‘계’는 스스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연(緣)에 따라 생기기도 하고 없어지기도 하는데 그래서 실유(實有)가 아니 라고 하는 것은, ‘계’의 현상적측면을 부정하는 것이 된다. 또 하나는 ‘계’는 고정불변하는 영원성을 이야기하는 것인데, 이 또한 ‘계’의 여실한 본질에 위배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계’를 받을 때에 언제나 하는 말이 지범(아무것도 하지 않음에 의해 죄를 범함과 착한 일을 하지 않는, 소극적인 것으로 죄가 됨)과 개차(행위의 허가와 금지, 즉 열고 닫음)를 잘 할 줄 알아야 한다는 말은 곧 이 말을 뜻함이다. 또한, 『천수경』에도 곧잘 독송하는 내용으로, “죄무자성종심기 심약멸시죄역망 죄망심멸양구공 시즉명위진참회(죄에는 스스로의 성품이 없어 마음 따라 일어나며, 마음이 멸할 때 죄 또한 스러지네. 죄와 마음이 함께 멸할 때, 이것을 이름하여 진실된 참회라 하네)”라고 하여, 마음을 어떻게 다스려야 할까를 갈파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계율’(戒律)의 ‘계’는 주체적이며 자율적인 성격을 지녔으나, ‘율’은 타율적인 성격을 지녔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율’의 조항을 위반할 때는 벌칙이 가해지지만, ‘계’에는 그러한 벌칙이 없는 것이 원칙이다. 특히 대승 불교권에서는 ‘율’보다는 ‘계’를 중시하는 풍조가 생겨났는데, 이 점은 외형에 얽매이지 않고 본질에 들어갈 수 있는 자유분방한 자세를 북돋아 다채로운 대승불교의 사상과 실천을 전개 시켰지만, 한편 자칫 수행자로서의 자각을 잃기 쉬운 경향이 생겨 세속화되는 위험성을 내포하게 된 것도 사실이다.
원효스님이 주장한 계(戒)’는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석존이 가르친 중도(中道)에 이르는 것이며, 이러한 계(戒)가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 8정도(八正道)이다. ‘계’의 원래 의미는 ‘흐름에 따른다’는 뜻이며, 따라서 스스로가 지니고 있는 기질, 환경, 상황에 따라 각자의 확인에 의거하여 어디까지나 자기의 행위로서 선정해 나가는 행위인 것이다. 이러한 불교윤리의 기본을 현대적 언어로 말한다면 ‘상황윤리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有智人所行 蒸米作飯 無智人所行 蒸砂作飯
共知喫食 而慰飢腸 不知學法 而改痴心
지혜로운 이는 쌀로 밥을 짓는 것과 같고, 어리석은 이는 모래로 밥을 지으려 함과 같다. 사람이 밥을 먹어 주린 창자 달랠 줄은 알면서도, 불법을 배워 어리석음 고칠 줄은 모른다.
불교의 궁극적인 목표는 지혜로 볼 수 있다. 먼저 ‘계’ 와 정(定)이 오래 숙련되면, 뒤에 지혜(智慧)의 꽃이 피게 마련이다. 지혜의 공덕을 노래한 『유교경』에서는, “지혜가 있으면 탐착이 없어질 것이다. 스스로 잘 살펴 잃어버림이 없도록 하면 내 가르침 속에서 깨달음을 얻을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은 사람은 승(僧)도 아니고 속(俗)도 아니어서 무어라 이름 할 수 없다. 진실한 지혜는 노(老),병(病),사(死)의 바다를 건너게 하는 견고한 배이며, 무명의 암흑을 비추는 밝은 등불이며, 온갖 병자를 고치는 좋은 양약이며, 번뇌의 나무를 베어내는 날카로운 도끼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언제나 문(聞),사(思),수(修)로서 지혜를 계발하여 자신의 지혜를 증득 시켜야 한다.” 고 하여, 지혜의 힘이 성불의 최상의 지름길임을 설하고 있다.
또한 『법구경(法句經)』에는, “잠 안 오는 자에게는 밤이 길고, 지친 몸에는 갈 길이 멀고, 어리석은 자에게는 윤회(輪廻)가 길다.”라는 유명한 말씀이 있어서 어리석음을 경책하고 있는 것이다.
법공 스님/동국대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