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쟁사상(和爭思想) Ⅳ

화쟁(和諍)에서 쟁(諍)이라는 글자를 가만히 살펴보면 말씀 언(言)변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실제로 쟁은 말로써 옳고 그름을 가립니다. ‘쟁(諍)’에서 말씀 언이 빠져 버리면 전쟁의 ‘쟁(爭)’이 돼버립니다. 부부싸움도 그렇지요. 말로 할 때까지는 그래도 괜찮은데 심해져서 베개가 날아가고 그러면 전혀 문제가 달라지지 않습니까. 말이 빠져 버리면 아주 심각해져 버립니다.

오늘날 철학에서도 언어에 대한 부분을 굉장히 중요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불교는 일찍부터 언어에 대해 깊은 성찰을 해왔습니다. 왜냐하면 언어라는 그 자체가 대단히 편하지만 이를 절대시해서 언어의 늪에 빠지면 마치 진흙에 큰 코끼리가 빠지듯이 언어의 늪에 빠져 버리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어떻게 언어의 그물에 걸리지 않으면서도 그 의사소통을 잘 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늘 고민이었습니다.

그 유명한 ‘염화시중(拈花示衆)’도 바로 그래서 나온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영혼은 없는 거야.” 그러니까 사람들이 너무 절망하고 “그래도 일생을 살아가는 가아(假我)로서의 몸은 있다.”라고 하니까 거기에 집착해 버립니다. 중생들이 언어의 늪에 자꾸 빠지니까 부처님께서 연꽃을 드셨고 이에 가섭이 빙그레 웃었다는 얘기가 나오게 된 것입니다. 잘 아시다시피 이 때문에 선종에서도 불립문자를 강조하는 것 아닙니까.

언어 문자로 표현된 교법을 진리 자체로 절대화하면 그 표현과 다른 모든 것은 옳지 않다는 독단에 빠집니다. 이 때문에 타종교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기 어려워집니다. 원효는 진실은 말을 떠나 있기도 하지만, 말할 수 없는 것도 아니라고 했습니다.

만약 바나나를 먹어보지 않은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그럼 그 사람에게 바나나 맛을 설명하기 위해 온갖 언어를 동원한다고 해도 설명이 쉽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말이 필요 없이 바나나를 직접 먹어보게 하면 단번에 그 맛을 알 수 있지요.

언어가 얼핏 보면 굉장한 것 같지만 사실 있는 그대로를 설명하기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사랑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여기저기서 ‘사랑’ 타령이고 ‘사랑’을 떠받들지만 사실 진실로 사랑해보면 ‘사랑한다’는 말로 진심을 다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이렇듯 언어가 갖는 한계가 본질적으로 분명히 있습니다. 이것을 언어도단(言語道斷)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말도 안된다는 게 아니라 언어의 길이 끊어진 절대 경지란 의상 스님이 증지소지비여경(證智所知非餘境)이라고 말씀하셨듯이 깨달아서 스스로 알 뿐 다른 경지가 아니라는 겁니다. 그것은 사과를 먹어보고 바나나를 먹어볼 수밖에 없는, 어떤 글이나 말로도 설명할 수 없는 성질의 것입니다. 그럼 거꾸로 언어 없이 전달할 수 있겠습니까? 없습니다. 그래서 원효는 진리라는 것은 말을 떠나기도 하되 말에 의지하기도 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기신론별기』의 말을 들어보지요.

이치는 말할 수 없는 것도 아니지만, 말을 여읜 것이 아닌 것도 아니다.(理非絶言 非不絶言)
이치는 역시 말을 여읜 것이지만, 또한 말을 여읜 것이 아니기도 한 것이다.(理亦絶言 亦不絶言)

언쟁에는 우선 말이 문제입니다. 말은 본래부터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일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손가락일랑은 보지 말고 달을 보면 그만입니다. 원효는 『십문화쟁론(十門和諍論)』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나는 언어에 의지하여 말을 여윈 법을 보여주고자 한다.(我寄言說 以示絶言之法)
마치 손가락에 의지해서 손가락 여윈 달을 가리키듯.(如寄手指 以示離指之月)

데이트하고 사랑하는 것도 테크닉이 필요합니다. “오늘 달이 참 밝습니다.” 그러면 다른 뜻으로 받아들여야지요. “그러내요. 그런데 달은 원래 밝잖아요.” 이렇게 대답하면 어떻겠어요? 이면에 담긴 뜻을 못보고 그저 달 자체만을 얘기하면 상대방의 뜻을 제대로 받아들인 것이 못됩니다. 한 선생님이 혀가 짧아서 ‘바담 풍’ ‘바담 풍’ 하면 학생들이 ‘우리 선생님이 혀가 짧아서 ‘바담 풍’이지 저게 바람이라는 뜻이구나.’하고 받아들이면 시비는 뚝 끊어집니다. 그런데 “선생님 그건 바담이 아니라 바람입니다.” 그러면 문제가 생기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원효는 언어의 한계를 인식하면서도 동시에 언어의 긍정적 측면을 분명히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가르침에 의하면, 상대방의 말은 새겨서 듣는 것이 좋습니다. 말꼬리를 물고 늘어지면 상대방의 어떤 견해도 허용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상대방의 말뜻을 새겨듣노라면 허용하지 못할 것도 없습니다. 원효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말과 같이 취하면 그 말하는 것이 모두 잘못이요(如言而取 所說皆非),
뜻을 얻어서 말하면 그 말하는 것이 모두가 옳다(得意而談 所說皆是)

말꼬리를 잡는 태도는 옳지 않고 말이 내포한 뜻을 살려서 이해하는 자세가 바람직합니다. 어차피 말이란 의사소통을 완전히 해주는 도구는 못됩니다. 그렇다고 편리한 이 언어의 도구를 사용하지 않을 수도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원효는 『능가경』의 말처럼 어리석은 사람은 진흙 속의 코끼리처럼 말 속에 묻혀버려서는 안된다고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원효의 화쟁 방법에는 전개와 통합이 자유롭고 긍정과 부정에 구애됨이 없었습니다. 원효의 저술에는 ‘총이언지(摠而言之)’, ‘별이논지(別而論之)’ 등 용어가 자주 보입니다. 이처럼 그는 통합과 전개의 방법을 잘 구사하고 있습니다. 이를 두고 “원효의 진리 탐구 방법은 개합의 논리로서 철두철미 일관되어 있다”고 지적한 이도 있습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은 유기적으로 관련되어 있습니다. 곧 연기(緣起)입니다. 그래서 전체와 부분은 종합적인 고리를 이루면서 있습니다. 곧 화엄교학에서 말하는 총(摠)과 별(別)은 더불어 있고, 하나와 전체도 같이 있게 됩니다. 따라서 어떤 일에도 ‘산을 보지 못한 채 골짜기에서 헤매거나 나무를 버리고 숲 속으로 달려가는 격’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전개한다고 번거로워지는 것도 아니요, 합친다고 좁아지는 것도 아닙니다(開而不繁 合而不狹). 또 전개한다고 하나를 더 보태는 것도 아니고, 합친다고 해서 열을 줄이는 것이 아닙니다(開不增一 合不減十). 이것이 통합과 전개의 묘술(妙術)이라 할 수 있습니다. 통합해서 논하면 일관이요(合論一觀), 열어서 말한다면 열개의 문(開說十門)입니다. 원효는 이처럼 통합과 전개에 자유로울 수 있었습니다. 또한 수용과 비판, 즉 긍정과 부정에도 구애받지 않았습니다. “긍정과 부정에 아무 구애가 없기에(立破無碍), 긍정한다고 얻을 것이 없고 논파한다고 잃을 것도 없다.” 이 또한 원효의 가르침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이해하거나 설명하거나 주장할 때, 자신의 입장이나 위치, 방향 등에 얽매여 있기 일쑤입니다. 사람들은 모든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기 어렵습니다. 자신의 안경으로 보고, 자기가 가진 잣대로 재며, 자기중심으로 인식하려 듭니다. 이로 인해 아집과 아상과 교만이 생겨납니다. 원효는 말했습니다. “종래에 『起信論』을 해석한 이들이 많지만 진정으로 그 뜻을 밝힌 사람은 적다”고. 그는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각기 익힌 것을 지켜 문구에 구애되고 능히 마음을 비워서 뜻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不能虛懷而尋旨) 이 때문에 논주(論主)의 뜻에 가까이 하지 못한다. 혹 근원을 바라보고서도 헤매며 떠돌고(或望源而迷流), 혹은 잎을 붙잡고 줄기를 잃어버리며(或把葉而亡幹), 혹은 옷깃을 베어 소매를 깁고(或割領而補袖), 혹은 가지를 꺾어 뿌리에 댄다(或折枝帶根).

대상의 세계를 아전인수로 곡해하지 않기 위해서는 무심(無心)과 무념(無念)의 상태가 필요합니다. 곧 마음 놓는 것이고 허심탄회해지는 겁니다. 허심탄회에는 전제가 없어야 합니다. 나는 선생, 나는 나이가 많고 너는 학생이고 나이가 적고 등등. 그런데 이걸 버리는 게 그리 쉽지 않습니다. “무념을 얻으면 상대방과 더불어 평등해진다.” 이 또한 원효가 주목했던 『기신론』의 구절입니다. 잣대 밖의 더 큰 것을 재기 위해서는 고정의 잣대를 버려야 합니다.

일제시대에 한 일본인이 우리나라에 와서 등에 지는 지게를 한 200여 종 모았다고 합니다. 지게를 모아놓고 결론을 내리기를 ‘조선민족은 아마도 잣대가 없는 민족인 것 같다’고 했다고 합니다. 아무리 찾아봐도 설계도도 없고 아무리 찾아봐도 설명서도 없어요, 그런데 모든 사람이 다 만드는 겁니다. 그 때 내 스승이신 효당 스님이 원효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원효의 논리를 가지고 응용해서 말씀하시기를 ‘조선민족은 잣대가 없기 때문에 잣대 밖을 잴 수 있다’는 명언을 하셨습니다.

잣대가 없어도 문제지만 너무 잣대를 강조해도 창의성을 잃게 됩니다. 그게 원효가 갖고 있던 생각입니다. 원효는 두 극단[二邊]을 벗어나야 방외(方外)에 노닐 수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김상현/동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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