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효가 ‘같다’라고 한 것은 ‘서로 다른 것’을 가마솥에 넣어서 부글부글 끓여 똑같이 만드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드렸습니다.
한 마디로 획일화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러면 만약 서로 다른 견해로 다툼이 일어나면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요? 원효는 이 경우 상대방의 뜻에 맞춰서 예스(Yes)와 노(No)를 하는 ‘순불순설(順不順說)’을 얘기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어렵습니다. 예스와 노를 동시에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노면서 예스라는 겁니다. 또 상대방 뜻과 다르게도 말하고 다르지 않게도 말하는 ‘비동비이이설(非同非異而說)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감이 잡히지 않으시죠. 그럼 원효의 글을 통해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식기방편자(識機方便者)
경에서 말한 것과 같이, ‘순불순설 비동비이’하면서 진여에 상응하게 설하는 것이다.(如經順不順說 非同非異 相應如說故順不順說者) 만일 저 사람의 마음에 수순해서 설법하면 잘못된 고집을 움직이지 않고(若直順彼心則 不動邪執) 수순하지 않고 설하면 바른 믿음을 일으키지 않는다(設唯不順說者則 不起正信). 그가 바르게 믿는 마음을 얻고 본래의 사집(邪執)을 버리게 하기 위하여(爲欲令彼得正信心 除本邪執故) 반드시 수순해서 설하거나 혹은 수순하지 않고 설해야 하는 것이다(須或順或不順說). 또 다시 도리에만 수순하여 설하면 바른 믿음을 일으키지 못하는데(又腹直順理說 不起正信), 그의 뜻에 어긋나기 때문이다(乖彼意故). 도리에 수순하지 않고 설한다면 어찌 바른 이해를 낳게 하겠는가?(不順理說 豈生正解) 도리에 어긋나기 때문이다.(違道理故) 바른 믿음과 이해를 얻으려면 수순하거나 수순하지 않으면서 설한다.(爲得信解故 順不順說也) 만약 모든 이견으로 쟁론이 일어날 때(若諸異見諍論興時), 유견(有見)에 동조해서 말한다면 공견(空見)과 다르고(若同有見而說則異空見), 공집(空執)에 동조해서 말한다면 유집(有執)과 달라진다(若同空執而說則異有執). 같다거나 다르다고 하는 것이 점점 다툼이 성할 것이고(所同所異彌興其諍), 또 다시 저 두 견해에 동조한다면 스스로 모순되고(又復兩同彼二則自內相諍), 만약 저 둘과 다르게 하면 둘과 서로 다툴 것이다(若異彼二則與二相諍). 그러므로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게 설한다(是故非同非異而說). 같지 않다는 것은 말과 같이 취해서 모두 인정하지 않는 때문이고(非同者 如言而取 皆不許故). 다르지 않음이란 뜻을 얻어 말함에 허락하지 않음이 없기 때문이다(非異者 得意而言 無不許故). 다르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저 사람의 정에 어긋나지 않고(由非異故 不違彼情), 같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도리에 어긋나지 않아서(由非同故 不違道理), 정에도 도리에도 서로 바라보며 어긋나지 않는다(於情於理 相望不違).
여기에 따르면 원효는 때를 알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강의를 할 때도 그렇죠. 듣는 분들이 밥은 먹었는지, 휴식시간은 지났는지, 내가 무엇에 대해 어떻게 말해야 효과적인지 등등. 마찬가지로 대통령이 임기를 그만두고 하야해야하는지도 때를 잘 알아야겠죠. 사실 불교에서는 때를 굉장히 강조합니다. 반야심경의 첫 시작도 ‘관자재보살이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행할 때’로 시작됩니다. 사실 때를 안다는 것이 바로 역사의식인 것입니다.
이와 함께 상대방의 근기도 잘 알아야 합니다. 여기 어떤 분들이 계신지, 연령대는 어떤지, 어떤 직업에 어떤 생각을 갖고 계신지 등등을 잘 알아서 말을 해야 효과적인 강의가 될 것입니다.
얼마 전에 있었던 일을 잠깐 말씀드리겠습니다. 요즘 불교계에도 친일파 문제가 많이 거론되는데 한 스님이 친일파의 거두였는데 현재 독립유공자로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한 분이 저를 찾아오셔서 “그 분 독립운동 했지. 참 대단한 분이야.” 저는 대답을 하지 않고 다른 일을 계속했습니다. 그 분이 독립운동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훗날 크게 변절을 했거든요. 그런데 또 말하고, 또 말하고, 그렇게 다섯 번을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나중에는 “아닙니다, 선생님. 제가 그 분에 대해 조사를 해봤는데 이러저러한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제서야 더 이상 말씀을 안 하시더군요. 그럼 만약 처음부터 내가 “선생님 그거 아닙니다”’라고 강경하게 말한다면 당연히 기분 나쁘게 생각할 것 아닙니까. 그러면 대화도 되지 않고 받아들이지도 않을 거고.
그럼 반대로 그 분 비위를 맞추려고 고개만 끄덕이며 “예, 선생님 말씀이 맞습니다.” 이렇게 하면 될까요? 물론 이것도 맞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옳지 않은 것을 옳다고 인정하는 것도 도리에 어긋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원효는 일단 상대방 기분에 맞춰 ‘예스’라고 대답하라는 거지요. 그게 바로 순설(順說)하라는 것입니다. “그래 자네 말이 맞네.” 그렇게 수긍한 뒤에 “자네 말도 일리도 있지만 이런 문제도 있지 않는가”라고 동시에 두 가지를 얘기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또 눈여겨봐야 할 게 있는데 마지막 ‘정에도 도리에도 서로 바라보며 어긋나지 않는다’는 구절입니다. 살다보면 인정과 도리의 문제로 고민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자주 합리적이라는 말로 재단하려 하지만, 인정 없는 세상은 분명 삭막합니다. 근대 이후 우리가 배워온 중요한 단어가 있다면 바로 ‘합리’입니다. 합리적으로 판단하고 합리적으로 행동하고 합리적으로 말하고 늘 합리 합리였습니다. 합리가 바로 여기에서 나오는 ‘리(理)’입니다.
그러나 합리적인 것만 강조하면 어떤 문제가 생겨나느냐하면 재미가 없고 인정이 없게 됩니다. ‘리’라는 것은 자연의 이법이거든요. 인생은 자연의 이법과는 분명 다른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인정이에요. 우리 한국사회는 학벌도 따지고 지연도 따지고 문제가 많지요. 그러나 대신 따뜻한 정이 있잖아요. 무작정 나쁘다고 할 것만은 아니라는 겁니다.
여러분 종교라는 것은 정이 굉장히 강한 것입니다. 자비이고 사랑이거든요. 고대에도 소도(蘇塗)라는 신성시되는 지역에는 범죄자가 들어와도 붙잡아가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사람들이 명동성당이나 조계사 같은데 가서 데모하잖아요. 따뜻하게 감싸주는 게 종교고 인정이거든요. 좀 극단적인 예를 들어 우리아이가 범법을 했다고 해봐요. 그러면 합리적으로 판단하면 멱살 딱 잡고 우리 아이 파출소로 데려다줘야 합니다. 잘못했으니까요. 그러면 그런 부모가 잘했다고 말해야 합니까? 부모이기 때문에 숨기고 감싸고 달래고 하면서 해결방안을 모색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게 정이라는 겁니다. 정만 있어도 문제고 정이 너무 없어도 문제입니다. 도리가 없어도 문제지만 너무 도리만 치중해도 문제라고 원효는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15년 전 쯤 원효의 이 구절을 고려대 명예교수인 김충열 선생님한테 막걸리 마시면서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그랬더니 ‘참, 재미있다. 참, 재미있다.’고 하시더군요. 그러더니 얼마 후 우리나라와 중국의 외교문제와 관련해 한 신문에 글을 썼는데 ‘우리는 합리적(合理的)으로 일을 하지 않고 합정적(合情的)으로 일했는데 참 잘했다.’고 썼던 것이 기억납니다.
보십시오. 원효가 얼마나 인간적인 얘기를 하고 있습니까. 비인간적이라는 말은 도리로만 얘기를 하고 인간미를 빼버린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원효는 정에도 어긋나지 않아야 된다고 거듭 강조하고 있는 것이지요.
제가 젊었을 때 있었던 일을 잠깐 말씀드리겠습니다. 한 때 저는 학점이 짜기로 유명했습니다. 학생들이 지나갈 때 “저기 소금 지나간다”라고 했을 정도니까요. 그런데 저는 그 말을 들으면서 우쭐했어요. ‘그래 소금은 이 세상에 꼭 필요하고 썩지 않는 거야.’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웃기는 소금이죠. 그 무렵 한 학생이 저를 찾아왔어요. “선생님 제가 이번에 시험을 너무 못 쳤습니다. 그런데 점수를 잘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합리적으로 말이 안 되잖아요. 그래서 “성적을 내 마음대로 주는 게 아니야. 네가 시험 본 결과에 따라 주는 거야.” 여러분도 그 때 제가 했던 말이 맞는다고 생각하시죠. 다른 학생들과의 형평성 문제도 있는 거니까요. 그런 뒤 제가 물었죠. “그런데 왜 시험은 못 봤나?” “예, 부모님이 돌아가셔서요.” 그런데 제가 어떻게 얘기 한 줄 압니까? “부모님 돌아가신 건 돌아가신 거고 성적은 성적이잖아.” 참 지독하고 몰인정했지요. 그런데 몇 개월이 지나 그 학생이 한 잔 먹고 우리 집에 쳐들어왔는데 책상을 탁 내리치면서 “선생님 그 때 잘못하셨습니다.” 따지더군요. “그래 뭐가 잘못됐냐?” 제가 말했죠. “학점은 그렇게 짜게 줘도 되는데 그렇게 말씀하는 게 아닙니다.” 한참이 지나고 나서 그 학생의 말이 맞았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렇게 상대방의 가슴에 못 박으면서까지 소위 합리적으로 하려했다는 것이 크게 잘못됐다는 것을요. 지금 같았으면 이렇게 얘기했겠죠. “야, 너 얼마나 힘들었겠냐. 시험까지 못치고, 그래 다른 방법을 찾아보자.” 그랬으면 그 학생을 도울 수 있는 방법을 찾았을 거고, 또 설사 그 점수를 그대로 줬다 해도 그 학생이 이해했을 거예요. 저는 원효가 정에도 어긋나지 않고 도리에도 어긋나지 않는다는 이 부분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우리사회가 지나치게 불합리하다고 하는데 불합리한 것도 중요합니다. 누가 자기 자식을 끌고 파출소로 가겠습니까?
그러면 어떻게 상대방의 정에도 도리에도 어긋나지 않을 수 있을까요. 원효는 ‘도리가 없는 그것이 지극한 도리이고 그렇지 않다는 그 속에 크게 그러함이 들어있다(無理之至理 不然之大然)’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어렵지요.
원효의 사상은 어려운 부분이 분명히 있고, 또 있어야 됩니다. 원효가 굉장히 논리적이고 철학적이고 깊숙이 사유하고 있기 때문에 어려운 부분이 있습니다. 우리가 평소 거기에 대한 깊은 사유가 없었다면 어려울 수밖에 없는 겁니다. 그렇지만 어려운 부분은 어려운 채로 남겨두고 일단 넘어가도록 하지요. 이제는 조금 쉬워질 겁니다.
김상현/동국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