止動歸止하면 止更彌動하나니
움직임을 그쳐 그침에 돌아가면
그침이 다시 큰 옴직임이 되나니
“움직임을 그쳐서 그침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바로 고요함(靜)으로 돌아간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움직이는 마음을 누르고 고요한 데로 둘아가려 하면, 고요하려는 마음이 점점 더 크게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공부하는 사람은 화두를 열심히 참구하면 그만입니다.
그런데 망상이 일어 난다고 이 망상을 누르려고 하면 할수록 망상이 자꾸 일어 나는 것과도 같으니, 이는 망상에 망상을 보태는 것이 되고 맙니다. 예를 들면 참선을 하는 데 있어서 ‘화두만 참구하고 일어나는 망상을 덜려고도 하지 말고 피하려고도 하지 말며, 오직 화두만 부지런히 참구하라’고 내가 누누이 일러주었는데도, 어떤 납자는 “자꾸만 일어나는 망상을 덜려고 하는 이것이 참선 공부에서 가장 힘들다”고 더러 나에게 말합니다. 이는 망상을 덜려고 망상을 일으킨 것으로서 망상에 망상 하나를 더 보텐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망상을 덜려는 생각도 덜려는 생각도 덜지 않으려는 생각도 버리도 화두만 참구하라’고 납자들에게 더러 일러줍니다만, 그것이 쉽게 안되는 모양입니다. 이것이 그침(止), 곧 고요함을 좋아하여 움직임(動)을 버리고 고요함으로 돌아가려고 하면, 점점 더 크게 움직이게 된다는 뜻입니다.
唯滯兩邊이라 寧知一種가
오직 양변에 머물러 있거니
어찌 한 가지임을 알 건가.
“양변에 머물러 있으니, 어떻게 중도를 알겠는가”하였습니다. ‘그침(止), 곧 고요함은 버리고 움직이는(動) 대로 하면 되지 않겠느냐’하겠지만 이것도 양변이라는 것입니다.움직임도 고요함도 버리고 자성을 바로 볼 뿐, 양변에 머물러 있으면 일종(一種)인 중도의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을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양변에 머물러서는 안됩니다. 육조스님께서도 유언에서 ‘언제든지 양변을 버리고 중도에 입각해서 법을 쓰라’고 당부하셨습니다.
性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