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불공하는 법

요즈음 학생들에게 불공하라고 자주 이야기하며 권하고 있습니다. 학생들은 혹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도 용돈을 타쓰고 있는데 어떻게 불공을 할 수 있는가”하고. 그것도 당연히 할 수 있는 이야기지만 그러나 불공은 꼭 돈으로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몸으로, 정신적으로, 물질적으로 남을 도와주는 것은 모두 불공입니다. 예를 들어 버스 속에서 노인이나 어린이에게 혹은 병든 사람에게 자리를 양보해 주는 것, 그것도 불공입니다. 또 정신적으로 고민을 하고 있는 사람이나 혹은 어떤 사람을 좋은 길로 인도해 주는 것, 그것도 불공입니다.

길거리에 앉아서 적선을 비는 눈먼 사람에게 10원짜리 한 닢 주는 것, 그것도 불공입니다.

이처럼 정신적으로든 육체적으로든 물질적으로든 남을 도와주는 것은 모두 불공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몸, 마음, 물질 이 세 가지로 불공을 하려고 하면 불공할 것이 꽉 찼습니다. 이 세상 모두가 불공거리, 불공 대상입니다.

단지 우리가 게을러서 게으른 병 때문에 못 할 뿐입니다. 이렇게 불공해야 결국에는 성불하게 되는 것입니다. 학생들이 수련회 때 삼천배를 한 뒤 백련암에 올라와서 화두 배워 달라고 하면 이렇게 말합니다. “자, 모두 화두 배우기 전에 불공하는 방법 배워 불공부터 시작한 후 화두 배우자.” 이렇게 말하면 처음에는 모두 눈이 둥그렇게 됩니다. 우린 돈도 없는데 부처님 앞에 돈 놓고 절하라는 이야기인가 하고. 그런데 나중에 알맹이를 듣고 보면 그것이 아니고 남 도와주는 것이 참 불공이라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끝에 가서 “모두 불공합시다” 하면 “예” 하고 대답하는데, 진정으로 그러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특별히 주의를 시킵니다. 그것은 자랑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남을 도와주는 것은 착한 일이지만 자랑하는 것을 나쁜 일입니다.

몸으로써, 마음으로써, 물질로써 좋은 불공을 해놓고 입으로 자랑하면 부수어 버리는 것입니다. 불공을 자랑하기 위해, 자기 선전하기 위해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돈푼이나 기부해 주고 신문에 크게 선전해 달라고 하며 또 그 재미로 돈 쓰는 사람도 많은가 봅니다. 그러나 그것은 불공이 아닙니다. 자기 자랑할 재료 장만하는 것이지! 아까운 돈으로 남 도와주고 몸으로 남 도와주고 마음으로 남 도와주고서, 왜 입으로 모두 부수어 버리는 것입니까? 참으로 불공이란 남을 아무리 많이 도와주었다고 해도 절대로 자랑해서는 안 됩니다. 말하지 말아야 됩니다. 그러므로 근본 생각은 ‘남모르게 도와주라’에 있는 것입니다. ‘남모르게 남을 도울 것!’ 예수님도 이런 말을 했습니다.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하라.” 기막힌 소리 아닙니까! 자기 왼손으로 남을 도우면서 오른손도 모르게 도와주라고 했는데, 하물며 다른 사람이 알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요즘 학생들에게 이 말이 좋게 들리는가 봅니다. 편지 자주 옵니다. “스님 말씀하신 남모르게 남 돕자는 그 말씀을 평생 지키고 노력하겠습니다.” 하고.

이제 예 하나만 더 들겠습니다.

미국의 보이스라는 사람이 영국의 런던에 가서 어느 집을 찾는데 안개가 심해 도저히 찾을 수가 없어서 이곳저곳을 방황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열두어 살 되는 소년이 나타나 물었습니다.

“선생님, 누굴 찾으십니까?”

“어느 집을 찾는데 못 찾고 있다.”

“저는 이 동네에 사는데 혹시 제가 아는지 주소를 보여주시겠습니까?”

신사가 주소를 보여주니 “이 집은 마침 제가 알고 있습니다. 이리로 오십시오.”하며 안내해 주었습니다.

어린이가 인도하여 안내해 준 집에 도착하니 찾아 헤매던 바로 그 집이었습니다. 하도 고마워서 사례금을 주었더니 그 소년은 사양하고 결코 받지 않았습니다.

이름도 가르쳐 주지 않았습니다.

“제게는 선생님이 참으로 고맙습니다. 저는 소년단원 회원인데 우리 회원은 하루 한 가지씩 남을 도와주게 되어 있습니다. 저는 오늘 선생님을 도와드릴 수 있었느니, 오히려 제가 감사드리겠습니다. 참 고맙습니다.”

그리고 소년은 달아나 버렸습니다.

신사는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영국에 와 보니 어린이도 남을 돕는 정신이 가득하군. 돈도 받지 않고, 이름도 가르쳐 주지 않고 남을 도우면서 오히려 일과를 할 수 있게 되어 고맙다고 하니 이런 정신을 배워야겠다.”

그래서 미국으로 돌아와 미국에서도 소년단을 시작하였습니다. 온 미국은 물론 세계적으로 이 정신이 뻗어나가 우리나라에도 보이스카웃, 소년단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그 뒤에 이 소년을 찾으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결국 찾지 못하고, 소년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이 이름 모를 소년을 기념하기 위해 영국의 그 마을에는 큰 들소 동상을 세우고 기념비에 이렇게 새겼습니다.

-날마다 곡 착한 일을 함으로써 소년단이라는 것을 미국에 알려 준 이름 모를 소년에게 이 동상을 바치노라.-

남의 종교와 비교, 비판할 것은 아니지만, 예수교와 불교를 비교해 봅시다. 진리적으로 볼 때 예수교와 불교는 상대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일부 학자들도 그렇게 보고 있습니다. 도 개인적으로 볼 때 예수교에서 보면 불교가 아무것도 아니고, 불교 측에서 보면 예수교가 별 것 아닐 것입니다.

서양의 유명한 쇼펜하우어 같은 철학자도 “예수교와 불교가 서로 싸운다 하면 예수교가 불교를 공격하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과 마찬가지다”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이 말은 극단적으로 말한 것이 아니라 사실이 그렇습니다. 그러나 진리를 보면 그러하지만 실천면에서 보면 거꾸로 되어 있는 게 현실입니다.

예수교인들은 참으로 종교인다운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불교는 불교인은 예수교인을 못 따라갑니다.

불교의 자비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고 남에게 베푸는 것인데, 참으로 자비심으로 승려 노릇하는 사람이 얼마나 됩니까? 남 돕는 사람이 얼마나 되느냐가 문제일 것입니다.

‘자비’란, 요즘 말로 표현하자면 사회적으로 봉사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마도 승려가 봉사정신이 가장 약할 것입니다. 예수교인들은 진실로 봉사활동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한 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갈멜 수도원에 관한 기사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정원 초하룻날 모여서 무슨 제비를 뽑는다고 합니다. 그 속에는 양로원, 고아원, 교도소 등 어려움을 겪는 각계각층이 들어 있습니다. 어느 한 사람이 ‘양로원’ 제비를 뽑으면 1년 365일을 자나깨나 양로원 분들을 위해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고아원’에 해당되면 내내 고아원만을, ‘교도소’면 교도소 사람만을 위해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생활이 기도로써만 이루어지는데, 자기를 위해서는 기도 안 합니다. 조금도 안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으로 남을 위한 기도의 근본 정신인 것입니다. 이것이 종교인입니다.

그들은 양계와 과자를 만들어 내다 팔아서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한다고 합니다. 먹고 사는 것은 자기들 노력으로 처리하고, 기도는 전부 남을 위해서만 하는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어찌 하는가?

불교에서는 소승이니 대승이니 하는데, 소승은 자기만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대승은 남만 위해 사는 것입니다.

불교의 근본은 대승이지 소승이 아닙니다. 원리는 이러한데 실천은 그렇지 않습니다.

저쪽 사람들은 내 밥 먹고 남만 위하는데, 우리 불교에서는 이것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거의 없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교를 본받아서가 아니라, 불교는 ‘자비’가 근본이므로 남을 돕는 것이 근본인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생활기준을 남을 돕는 데에 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대중도 다 알겠지만 승려란 부처님 법을 배워 불공 가르쳐 주는 사람이고, 절은 불공을 가르쳐 주는 곳입니다. 불공의 대상은 절 밖에 있습니다. 불공의 대상은 부처님이 아닙니다. 일체 중생이 다 불공의 대상입니다. 이것이 불공의 방향입니다.

내가 생각할 대는 절에 사는 우리 승려들이 목탁 치고 부처님 앞에서 신도들 명과 복을 빌어 주는 이것이 불공이 아닙니다. 남을 도와주는 것만이 참 불공이라는 것을 깊이 이해하고 이를 실천할 때, 그대 비로소 우리 불교에도 새싹이 돋아날 것입니다.

내가 전부터 자주 불공 이야기를 해 오지만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불공을 해야 할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오직 중생을 도와주는 이것이 참으로 불공이요, 이것을 행해야만 참으로 내 제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간디 자서전을 보면, 그는 영국에 유학 가서 예수교를 배웠는데 예수교에서는 사람 사랑하는 것을 배우고, 그후 불교에서는 진리에 눈떴는데 일체 생명을 사랑하는 것을 배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말하기를 남의 종교를 말하는 것은 안되었지만, 비유하자면 예수교가 접시물이라면 불교는 바다와 같다 하였습니다.

우리 불교에서는 사람만이 상대가 아닙니다. 일체 중생이 그 상대입니다. 불교에서는 사람만이 상대가 아닙니다. 일체 중생이 그 상대입니다. 불교에서는 사람이고 짐승이고 미물이고 할 것 없이 일체 중생이 모두 다 불공의 대상입니다.

일체 중생을 돕는 것이 불공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실천하고 또 궁행해야만 합니다.

그런데 또 문제가 있습니다.

“스님도 참 답답하시네. 내가 배가 고픈데 자꾸 남의 입에만 밥 떠넣으라니, 나는 굶으라는 말인가?”

인과법칙이란 불교뿐만이 아니라 우주의 근본원리입니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듯이 선인선과, 악인악과입니다.

선한 일을 하면 좋은 결과가 오고, 악한 일을 하면 나쁜 과보가 오는 것입니다. 병이 났다든지 생활이 가난하여 어렵다든지 하는 것이 악한 과보입니다. 그러면 무엇인가 악의 원인이 있는 것입니다. 물론 지금은 그것이 기억에는 없지만 세세생생을 내려오는 것입니다.

선인선과, 이번에는 착한 일을 자꾸 행합니다. 그러면 좋은 결과가 오는 것입니다. 남을 자꾸 돕고 남을 위해 자구 기도하면, 결국에는 그 선과가 자기에게로 모두 돌아옵니다.

그러므로 남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결국 나를 위한 기도가 되는 되며, 남을 해치면 결국 나를 해치는 일인 것입니다. 그래서 남을 도우면 아무리 안 받으려 해도 또다시 내게로 오는 것입니다.

남을 위해 기도하고 생활하면 남을 내가 도우니 그 사람이 행복하게 되고, 또 인과법칙에 의해 그 행복이 내게로 전부 다 오는 것입니다.

생물 생태학에서도 그렇다고 합니다. 조금이라도 남을 해치면 자기가 먼저 손해를 보게 되고, 농사를 짓는 이치도 그와 같다 하겠습니다. 곡식을 돌보지 않으면 자기부터 배고플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배고파 굶어 죽을까 걱정하지 말고 부처님 말씀같이 불공을 잘 하도록 애써야 할 것입니다.

한가지 비유를 말하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불공할 줄 모르고 죄를 많이 지어서 지옥에 떨어졌습니다. 지옥 문앞에 서서 보니 지옥 속에서 고 받는 중생들 모습이 하도 고통스럽게 보여서 도저히 눈을 뜨고 볼 수가 없었습니다.

대개 그 모습을 보면 ‘아이고, 무서워라. 나도 저 속에 들어가면 저렇게 될 텐데 어떻게 하면 벗어날까…’ 이런 생각이 들 텐데 이 사람은 생각이 좀 달랐습니다. ‘저렇게 고생하는 많은 사람의 고를 잠깐 동안이라도 나 혼자 대신 받고 저 사람들을 쉬게 해줄 수 없을까?, 편하게 해줄 수 없을까?’ 하는 착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생각을 하고 보니 지옥이 없어져 버렸습니다. 그 순간 천상에 와 있었습니다.

모든 것이 일체유심조입니다. 착한 생각을 내면 자기부터 먼저 천상에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생각이 더 깊은 사람이면 남을 위해 아침으로 기도를 해야 됩니다. 어느 정도 인격이 있는 사람이면 ‘내 복만을 위해, 내 배만을 위해’ 기도는 못 할 것입니다. 그러나 남을 위해서는 얼마든지 기도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내게 항상 다니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의무적으로 절을 시킵니다. ‘108배 절을 하라고!’

참으로 남을 도울 수 있는 사람이 되려면, 그런 생활을 매일 아침마다 20분 동안 108배 기도를 해야 합니다. 남을 위해 108배 기도하는 정성이 없으면 아무리 불공한다고 해도 매일 108배 하는 사람과는 많이 다릅니다. 나도 새벽으로 꼭 108배를 합니다. 그 목적이 어디 있는가? 시작할 때 조건이 나를 위해 절하지 않습니다. ‘내가 이제 발심하여 예배하옴은 저 스스로 복 얻거나 천상에 나길 구함이 아니요, 모든 중생이 함께 무상보리 얻어지이다.’ 이제 발심하여 108배를 하는데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나를 위해 절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끝에 가서는, ‘중생들과 보리도에 회향합니다.’ 일체 중생을 위해, 남을 위해 참회하고 기도했는데 기도한 공덕이 많습니다.. 이것이 모두 일체 중생에게 가버려라 이것입니다.

그리고도 부족하여 ‘원합노니 수승하온 이 공덕으로 위없는 진법계에 희양하오며’ 예불 참회한 이 공덕이 모두 남에게로 다 가라는 말입니다. 그래도 혹 남은 것, 빠진 것이 있어서 나한테로 올까봐 온갖 것이 무상진법계로, 온 법계로 돌아가고 나한테는 하나도 오지 말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저 인도에서부터 시작해서 중국을 거쳐 신라, 고려에 전해 내려오는 것입니다. 중국도 중공적화 이전에는 총림에서만이 아니고 모든 절에서 다 ‘참회’해 온 것입니다.

일체 중생을 위해서, 일체 중생을 대신해서 모든 죄를 참회하고 일체 중생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그리고는 모두 법계에 회향하고 모두 남에게 다 가버려라 한 것입니다. 이것이 참으로 불교 믿는 사람의 근본 자세이고, 사명이며 본분이 아니겠습니까?

요즘은 사회에서도 봉사활동을 많이 하고 있는데, 우리 스님들은 산중에 살면서 이런 활동에는 많이 떨어지고 있습니다.

오직 부탁하고 싶은 것은 부처님 말씀대로 따르는 불공을 하자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조석으로 부처님께 예불하면서 곡 한가지 축원을 합니다. 그것은 간단합니다.

축원문

일체 중생이 다 행복하게 해 주십시오.
일체 중생이 다 행복하게 해 주십시오.
일체 중생이 다 행복하게 해 주십시오.

세 번 하는 것입니다. 매일 해보면, 뭐라고 말하기 어려운 좋은 것을 느끼게 됩니다.
절을 한 번 하든 두 번 하든 일체 중생을 위해 절하고, 일체 중생을 위해 기도하고, 일체 중생을 위해 돕는 사람, 일체 중생을 위해 사는 사람이 되어야만 앞머리에서 말한 부처님을 팔아서 사는 ‘도적놈’ 속에는 안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서로서로 힘써 불공을 잘 해서 도적놈 속에 안 들도록 노력합시다.

일체 중생이 다 행복하게 해 주십시오.
일체 중생이 다 행복하게 해 주십시오.
일체 중생이 다 행복하게 해 주십시오.

일체 중생을 위해 절하는 사람, 일체 중생을 위해서 사는 사람이 되어야 부처님을 팔아서 사는 ‘도적놈’에 안 들어갑니다. 우리 서로서로 힘써 남을 위한 불공을 합시다.

댓글 달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항목은 *(으)로 표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