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원수를 보되
부모와 같이 섬겨라.
이것은 “원각경”에 있는 말씀입니다.
중생이 성불 못하고 대도를 성취 못하는 것은 마음속에 수많은 번뇌, 팔만 사천 가지 번뇌망상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많은 번뇌 가운데서 무엇이 가장 근본이 되는 것인가? 그것은 증애심, 미워하고 좋아하는 마음이라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선가의 3조 승찬대사는 그가 지은 “신심명”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다만 증애심만 떨어지면
통연히 명백하도다.
이 증애심이 실제로 완전히 떨어지려면 대오해서 대무심경계를 성취해야 합니다. 무심삼매에 들어가기 정에는 경계에 따라서 계속 증애심이 발동하므로 이 병이 참으로 고치기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불자들은 대도를 목표로 하므로 부처님 말씀을 생활과 행동의 기준으로 삼아야 합니다. 또 한편으로 생각하면 내가 가장 미워하는 사람, 나에게 가장 큰 죄를 지은 사람을 부모와 같이 섬겨라 하는 것은 무리한 요구일 것입니다.
‘나쁜 사람을 용서하라’거나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은 또 모르지만 원수를 부모같이 섬기라 하니, 이것은 부처님께서나 하실 수 있는 말이지 다른 사람은 감히 이런 말조차 못 할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불교에서는 ‘용서’라는 말 자체가 없습니다. 용서라는 말이 없다고 잘못한 사람과 싸우라는 말은 물론 아닙니다.
상대를 용서한다는 것은 나는 잘했고 너는 잘못했다. 그러니 잘한 내가 잘못한 너를 용서한다는 이야기인데, 그것은 상대를 근본적으로 무시하고 있는 말입니다. 상대의 인격에 대란 큰 모욕입니다.
불교에서는 “일체 중생의 불성은 똑같다”고 주장합니다. 성불해서 연화대 위에 앉아 계시는 부처님이나 죄를 많이 지어 무간지옥에 있는 중생이나 자성자리, 실상은 똑같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죄를 많이 짓고 나쁜 사람이라도 겉을 보고 미워하거나 비방하거나 한층 더 나아가서 세속말의 용서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아무리 죄를 많이 지었고 나쁜 사람이라도 그 사람을 부처님 같이 존경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불교의 생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부처님을 실례로 들어도 그와 같습니다. 부처님을 평생 따라 다니며 애를 먹이고 해치려고 수단을 가리지 않던 사람이 ‘제바닷타’ 입니다.
보통 보면 제바닷타가 무간지옥에 떨어졌느니 산 채로 지옥에 떨어졌느니 하는데 그것은 모두 방편입니다. 중생을 경계하기 위한 방편입니다. 어쨌든 그러한 제바닷타가 부처님에게는 불공대천의 원수인데 부처님은 어떻게 원수를 갚았는가?
성불, 성불로써 갚았습니다.
죄와 복이 온 시방법계를
비춤을 깊이 통달했다.
착한 일 한 것이 시방세계를 비춘다고 하면 혹시 이해할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악한 짓을 한 무간지옥의 중생이 큰 광명을 놓아서 온 시방법계를 비춘다고 하면 아무도 이해하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가장 선한 것을 부처라 하고 가장 악한 것을 마귀라 하여 이 둘은 하늘과 땅 사이 입니다만, 사실 알고 보면 마귀와 부처는 몸은 하나인데 이름만 다를 뿐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죄를 많이 지었다 해도 그 사람의 자성에는 조금도 손실이 없고, 아무리 성불했다 하여도 그 사람의 자성에는 조금도 더함이 없습니다. 그래서 마귀와 부처는 한몸뚱이이면서도 이름만 다를 뿐 동체이명입니다. 비유하자면 겉에 입은 옷과 같은 것입니다.
제바닷타가 아무리 나쁘다고 하지만 그 근본 자성, 본모습은 부처님과 조금도 다름이 없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나중에 제비닷타가 성불하여 크게 불사를 하고 중생을 제도한다고 했습니다. 제비닷카가 성불한다고 “법화경”에서 수기하였습니다. 이것이 불교의 근본 정신입니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원수를 보되 부모와 같이 섬긴다”는 이것이 우리의 생활, 행동, 공부하는 근본 지침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 불교에 들어오는 첫째 지침은 “모든 중생을 부처님과 같이 공경하고 스승과 같이 섬겨라”입니다. 우리 불교를 행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착한 사람, 나쁜 사람은 물론 소나 돼지나 짐승까지도 근본 자성은 성불하신 부처님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고 부처님과 같이 존경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불교 믿는 우리는 상대방이 떨어진 옷을 입었는지 좋은 옷을 입었는지 그것은 보지 말고 ‘사람’만 보자는 말입니다.
이런 옛날 이야기가 있습니다.
나라에 큰 잔치가 있어서 전국에 큰스님네들을 모두 초청했습니다. 그때 어떤 스님 한 분이 검박한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그 잔치에 초청되었습니다. 본시의 생활 그대로 앍은 옷에 떨어진 신을 신고 대궐문을 지나려니 문지기가 못 들러가게 쫓아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좋은 옷을 빌려 입고 다시 갔더니 문지기가 굽신굽신하면서 얼른 윗자리로 모셨지요. 다른 스님네들은 잘 차려진 음식들을 맛있게 먹고 있는데 이 스님은 자꾸 옷에 들이붓고 있습니다.
“스님, 왜 이러시오. 왜 음식을 자꾸 옷에다 붓습니까?”
“아니야, 이것은 나에게 주는 게 아니야. 옷 보고 주는 것이지!”
그리고는 전부 옷에다 붓는 것입니다. 얼마나 좋은 비유입니까? 허름한 옷을 입고 올 때는 들어오지도 못하게 하더니 좋은 옷 입고 오니 이렇게 대접하는 것입니다. 겉만 보고 사는 사람은 다 이렇습니다.
혹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오늘 법문하시면서 큰 짐을 지워 주시네. 그건 부처님이나 하실 수 있지.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나. 말 한마디만 잘못해도 당장 주먹이 날아드는데 어쩌란 말인가” 하고 항의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지나간 실례 몇 가지 들겠습니다.
첫 번째 이야기
옛날에 현풍 곽씨 집안의 한 사람이 장가를 들었는데, 그 부인의 행실이 단정치 못했습니다. 시부모 앞에서도 함부로 행동하고, 의복도 바로 입지 않고, 언행이 전혀 공손치 않아, 타이르고 몽둥이로 때리기까지 하고 별 수단을 다 해봐도 아무 효과가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양반집에서 부인을 내쫓을 수도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그 사람이 “맹자”를 펴놓고 읽다가 이런 구절에서 머무르게 되었습니다.
사람의 본성은 본래 악한 것 없이 착하다.
악한 이고 착한 이고 간에 누구든지 그 본성은 다 착하여 모두가 요순과 똑같다.
여기에 이르러 그 사람은 다시금 깨닫고 생각했습니다.
‘본래 요순같이 어진 사람인데 내가 잘못 알았구나. 앞으로 우리 마누라를 참으로 존경하리라.’ 하고 마음 먹었습니다.
예전에 양반집에서는 아침 일찍 사당에 가서 자기 조상에게 절을 했습니다. 이 사람이 다음날 아침 도포를 입고, 갓 쓰고 사당에 가서 절을 한 후에는 제일 먼저 자기 부인에게 넙죽 절을 했습니다. 부인이 자기 남편을 보니 미친 것 같았습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자기를 보고 욕하고 때리더니 이게 웬일입니까? 정색으로 정장을 하고 절을 하니 말입니다.
“당신이 참으로 거룩합니다”하면서 남편이 또 절을 합니다.
막 쫓아내는데도 한사코 따라다니며 절을 하고는 “사람이란 본시 모두 착한 것이오. 당신도 본래 착한 사람인데 내가 잘못 보고 욕하고 때렸으니 앞으로는 당신의 착한 성품만 보고 존경하겠소”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기를 한 달 두 달이 지나다 보니 부인도 자기의 본래 성품이 돌아와서 “왜 자꾸 이러십니까?”하는 것입니다.
“당신이 요, 순임금과 똑같소. 그런 당신을 보고 내가 어찌 절을 안 할 수 있겠소?”하며 여전한 남편의 기색에 부인도 맞절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신이 나더러 요, 순이라고 하는데 진짜 요순은 바로 당신입니다.”
하면서 서로가 요, 순이라고 존경하며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앞에서 말했듯이, 부처님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고 누구든지 할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두 번째 이야기
내가 6.25사변 후 통영 안정사 토굴에서 살고 있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하루는 진주에 신도들 30여 명이 와서 이런 얘기 저런 얘기를 하던 중에 한 신도가 30년 동안 자기 영감하고 말을 안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가 누구라도 하면 많은 사람들이 금방 알 수 있는 사람이지만 이름을 들먹이지 않겠습니다. 내가 깜짝 놀라서 물었습니다.
“그게 정말입니까?”
“예, 그렇습니다.”
“불교 믿는 부처님 제자라고 하면서 딴 사람도 아니고 아들 딸 낳고 함께 사는 영감하고 30년이나 말을 안 하고 산다니 도저히 이해를 못 하겠습니다.”
그랬더니 그 이유를 말하는 것입니다.
아들 딸 몇 놓고 난 후에 남편이 작은 마누라를 얻어 나가고 자기는 거들떠보지도 않더라는 겁니다. 살림이고 뭣이고 싹 쓸어가 버리고, 남은 자식들 데리고 먹고 살며 공부시키려니 그 공생이 말로 다 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평생 고생한 것을 생각하면 분이 복받쳐서 말도 하기 싫다는 거였습니다. 다 듣고 난 다음에 내가 물었습니다.
“나에게 좋은 방법이 하나 있는데 시키는 대로 하겠습니까?”
“예, 하겠습니다.”
“그러면 법당에 올라가서 부처님께 3,000배 절을 하되 ‘스님께서 시키는 대로 꼭 하겠습니다’하는 원을 세우고 절을 하시오.”
그랬더니 밤을 새워서 3,000배 절을 하고 내려왔습니다.
“지금 당신은 당신의 남편이 작은 부인을 얻어서 나를 이렇게 만들고 괄시를 했다 하는 원한이 맺혀서 30년 동안 말도 안하고 원수같이 지냈는데, 그것은 잘못 생각한 것입니다. 영감도 본래 부처님과 조금도 다름없는 착한 사람이니까 오늘 돌아가는 길로 당신 집으로 가지 말고, 가게에 가서 술하고 좋은 안주 사가지고 작은 부인 집으로 찾아 가십시오. 부엌에 가서 손수 상을 차려서 영감님께 올리고 큰절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말하길 ‘영감님 제가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스님의 말씀이 영감님이 참으로 부처님 같다고 했는데, 내가 그것을 모르고 이제껏 말도 안 하고 지냈습니다. 그 허물이 너무나 큽니다만 아무쪼록 용서해 주십시오’라고 하면 당신이 참으로 부처님을 뵙게 될 것입니다.”
그 사람은 실제로 내가 시키는 대로 했습니다. 영감이 보니 마누라가 미쳤단 말입니다. 아무리 얘기를 하려고 해도 막무가내이던 사람이 술 받고 안주 만들어 와서 절을 하며 잘못했다고 비니 하도 이상해서 물었습니다.
“당신 도대체 어떻게 된 거요?”
“토굴에서 공부하시는 스님께 가서 영감 이야기를 하고 법문을 들었는데, 영감같이 착한 사람이 없다고 하면서 영감님이 부처님과 똑같은 어른이라고 하십디다. 그래서 제가 지금 영감을 부처님이라고 생각하면서 절을 했던 것입니다.”
그러자 가만히 듣고 있던 영감이 “아 불교가 그런 것인가.”하고는 금나 발심을 했습니다. 그후로는 철저한 불교신도가 되어서, 부인이 새벽으로 기도하러 갈 때는 꼭꼭 같이 다니고, 나중에는 진주에서 신도회 회장까지 했습니다.
그러니까 근본은 상대방을 보되, 겉모습만 보지 말고 본래 성품을 보아야 합니다.
모든 사람이 다 부처님이기 때문입니다.
‘보살계’서문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넓게 비치는 진로업혹문이 모두 보현보살의 진법계다”
진로업혹문이란 중생의 나쁜 짓을 총망라한 말인데, 아무리 중생이 나쁜 짓을 한다 할지라도 겉보기만 그럴 뿐 실제는 진부 보현보살의 진법계라는 말입니다.
아무리 나를 해롭게 하는 사람이 있다 하여도, 상대를 부모와 같이 부처님과 같이 섬겨야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 불자들은 이와 같은 사상을 잘 알아서 실천해야 하겠습니다.
예전 인도에서 조석으로 예불시간에 반드시 지송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마지르제타’라는 스님이 지은 150찬불송이 그것입니다.
의정법사의 “남해기귀전”에도 보면, 의정법사가 인도에 갔을 때 전국 각 사찰에서 150찬불송을 조석으로 외우는 것을 보았다고 합니다.
거기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베푼 은혜 천지보다 깊어
그걸 배반하고 깊은 원수 맺는다.
부처님은 그 원수를
가장 큰 은혜로 본다.
어떤 상대를 부모보다, 부처님보다 더 섬기고 받들고 하는데, 그는 나를 가장 큰 원수로 삼고 자꾸 해롭게 합니다. 이럴 때 상대가 나를 해롭게 하면 할수록 그만큼 상대를 더 섬긴다는 말입니다.
원수는 부처님을 해롭게 해도
부처님은 원수를 섬기기만 한다.
상대는 부처님 허물만 보는데
부처님은 그를 은혜로 갚는다.
존어원전친! 부처님은 원수를 섬기기만 한다! 근본은 여기에 있습니다. 나는 저 사람에게 잘해 주는데 상대방은 나에게 잘해 주는 것은 하나도 없이 다 내버리고 자꾸 나를 해롭게만 합니다. 그런데도 섬기기만 하란 말인가? 그렇습니다. 상대가 나를 해롭게 하면 할수록 더욱더 상대를 받들고 섬긴다는 말입니다.
심원해자심애호! 나를 가장 해치는 이를 가장 받든다!
이것이 부처님의 근본 사상이고 불교의 근본입니다.
전에도 한 번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예수교 믿는 사람 몇이 삼천배를 하러 온 적이 있습니다.
“절을 할 때는 그냥 하는 것이 아니고, 하느님 제일 반대하고, 예수님 제일 욕하는 그 사람이 제일 먼저 천당에 가도록 기원하면서 절하시오.”
이렇게 말했더니 참 좋다고 하면서 절 삼천배를 다했습니다.
이것을 바꾸어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 부처님 제일 욕하고, 스님네 제일 공격하는 그 사람이 극락세계에서 제일 먼저 가도록 축원하고 절합시다.”
이제는 우리 불자들에게도 이런 소리 할 때가 왔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것이 ‘저 원수를 보되 부모와 같이 섬겨라’는 말인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도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원수를 부모와 같이 섬기게 되면 일체 번뇌망상과 중생의 병은 다 없어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중생의 모든 병이 다 없어지면, 그것이 부처입니다. 그렇게 해서 성불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불을 목표로 하고 사느니 만큼 부처님 말씀을 표준 삼아서 그렇게 살아가야 합니다. 그때그때 자기 감정에 치우쳐 살려고 하면 곤란합니다.
한편으로는 또 이런 의심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교에서는 치고 들어오는데 자꾸 절만 하고 있으면 불교는 어떻게 되나? 상대가 한 번 소리지르면 우리는 열 번 소리질러야 겁이 나서 도망갈 텐데, 가만히 있다가는 불교는 씨도 안 남겠다. 자! 일어나자.”
그렇게도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럴수록 자꾸 절하고 그런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고 축원하는, 그런 사상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선전하고, 그런 사상으로 일상생활을 실천해 보십시오. 불교는 바닷물 밀 듯 온 천하를 덮을 것입니다. 그것이 생활화되면 모든 사람이 감동하고 감복하여 ‘불교가 그런 것인가!’하여 불교 안 믿을래야 안 믿을 수 없게 고리 것입니다.
그렇다면 장애는 어느 곳에 있는가? 저쪽에서 소리지른다고 이쪽에서 같이 소리지르면 안 됩니다. 저쪽에서 주먹 내민다고 이쪽에서도 같이 주먹 내놓아서는 안 됩니다. 불지른다고 같이 불을 지르면 함께 타버리고 말 것입니다.
저쪽에서 아무리 큰 불을 가져오더라도 이쪽에서 자꾸 물을 들이붓는다면 어찌 그 물을 당할 수 있겠습니까? 결국 불은 물을 못 이길 것입니다. 나중의 성불은 그만두고 전술, 이기는 전술로 말하더라도 불에는 물로써 막아야지 불로 달려들어서는 안됩니다.
근본은 바로 모든 원수를 부모와 같이 섬기자! 하는 여기에 있습니다.
오늘 법문의 결론을 말하겠습니다.
실상은 때가 없어 항상 청정하니
귀천노유를 부처님으로 섬긴다.
지극한 죄인을 가장 존중하며
깊은 원한 있는 이를 깊이 애호하라.
모든 일체 만법의 참 모습은 때가 없이 항상 청정합니다. 유정, 무정 할 것 없이 전체가 본래 성불입니다. 옷은 아무리 덜어졌어도 사람은 성한 사람입니다. 그러니 귀한 이나 천한 이나, 늙은이나 어린이나 전부다 부처님같이 섬기고, 극히 중한 죄를 지은 죄인까지도 받들어 모셔야 합니다. 동시에 나를 가장 해롭게 하는 사람을 부모와 같이 섬겨야 한다는 말입니다.
‘심원해자심애호!’ 나를 가장 해치는 이를 가장 받든다.
이것이 우리 불교의 근본 자세입니다. 이것을 우리의 근본 지침으로 삼고 표준으로 삼아서 생활하고 행동해야만 부처님 제자라고 할 수 있고 법당에 들어앉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근본은 ‘원수를 부모와 같이 섬기자’는 여기에 있느니 만큼 우리 서로 노력합시다.
실상은 때가 없어 항상 청정하니
귀천노유를 부처님으로 섬긴다.
지극한 죄인을 가장 존중하며
깊은 원한 있는 이를 깊이 애호하라.
이것이 우리 불교의 근본 자세입니다. 이것을 우리의 근본 지침으로 삼고 표준으로 삼아서 생활하고 행동해야만 부처님 제자라고 할 수 있고, 법당에 들어가 앉을 자격이 있습니다. 유정, 무정 일체가 본래 부처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