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성과 파계의 사이

오대산 속에서 백일기도를 하고 있던 나에게 어느 날 한 장의 편지가 전달되어 왔다.

그 편지는 진주의 불교신도회에서 정혜사로 보낸 것을 정혜사에서 다시 오대산으로 부친 것이었다. 내용인즉 진주로 내려와서 훌륭한 부처님의 법을 들여달라는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할까? 하고 나는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나에게는 너무나 많은 미혹이 도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을 거느린 채로 그들에게 이야기해 주어야 할 것인가, 아니면 그것을 과감히 뿌리치고 정진을 계속해야 할 것인가.

이러한 망설임 속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다시 정혜사의 만공스님으로부터 편지가 날아왔다. 부처님의 법을 설하여 주라는 명령이었다. 할 수 없이 행장을 차리고 길을 떠났다. 불심이 대단한 진주 시민들은 (내 고장의 자랑 운운)한 벽보를 사방에 붙이고 나를 맞이해주었다.

법회가 있던 날의 연회사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소리 때문에 나의 설법이 거의 들리지 않을 지경이었다. 그런데도 그 모임은 소기의 성과를 충분히 거두었다. 왜냐하면 그 무렵의 모임이란 무엇을 듣고 깨우친다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만나 이야기하였다는 데에 뜻이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나로서 잊을 수 없는 것은 그 법회가 끝난 뒤에 나를 찾아와 내 장삼자락을 잡고 눈물을 흘리시던 어머님의 모습이었다.

그때 그분의 눈물엔 많은 감회가 어려있었을 것이다. 당신의 아들이 이 만큼 되었구나 하는 데서 오는 감격과 이미 당신의 곁을 떠난 아들을 보는 모정이 얽혀있었을 것이다. 우는 어머니를 보는 아들의 심사란 켤코 편안한 것은 아니었다. 아무리 속기를 따났다고 할지라도 내가 그의 아들임에는 분명한 사실이고, 그것을 강조하면서 어머니로서의 자기를 나타내려고 버둥거리는 모습은 애처로울 지경이었다.

그런 복잡한 심정의 움직임에는 아마도 나는 떨어져 갔었던 듯하다. 비록 인연을 끊었다고 할지라도 그 옛집에 하루쯤 쉬어가는 것이 어머님의 뒤를 따라 그 옛집을 찾아가 거기서 하룻밤을 자게 되었다. 그리고 어머님의 간곡한 부탁,(네가 중이 된 것도 좋지만 집안의 혈통만은 이어야 되지 않느냐)는 청천벽락과 같은 부탁을 받아들여야 했었다. 이혼한 뒤에도 집에 남아 어머니를 봉양하는 아내와 그들이 처하고 있는 험한 생활이 나로서는 도저히 거절할 수 없도록 강압되었던 것이다. 나는 무간지옥에 떨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그들의 요구를 거절할 수 없다는 비장한 각오를 하고 아내의 방으로 들어갔다.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아내의 방문을 열었을 때의 흙내와 땀에 절은 여인의 냄새, 그것은 유혹하는 요기스러운 것이기보다는 연민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인간의 짙은 슬픔이었다. 그리고 나는 또 기억한다. 그때 나를 바라보던 그의 죄스러운 눈. 왜 그녀가 죄스러워야 했을까? 죄스런 것은 오히려 내 편이 었을 것이고, 그녀는 당연한 한 여인으로서 나를 요구해야 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녀의 나에 대한 사랑은 나를 파계시킨다는 죄책감에 떨고 있었다. 나는 슬프게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슬프게 접하였다.

그리고 날이 밝아오기 전에 집을 나와 동구길을 걸었다. 사위가 너무나 어둡기만 했다. 그런 시간에 그 회오와 슬픔으로부터 보는 자연의 흑색은 너무도 아름답고 가슴 깊이 짙은 슬픔으로 젖어 오는 것이었다. 마치 수려한 한편의 산수화가 우리들의 가슴에 끼쳐주는 감동과 같았다. 그리고 다시 1년의 세월이 흘러산 뒤에 나는 오대산 상원사에서 아내로부터 보내 온 여식을 낳았다는 편지를 받아 읽었다. 나는 그 죄업을 말없이 받아들여야 했었고, 그것을 씻기 위하여 다시 적멸보궁으로 들어가 백일참회를 했었다. 그때 태어난 그 파계의 씨는 20의 젊은 나이로 삭발을 하고 나의 길을 좇아와 수도정진한 결과, 지금은 전국 비구니 강원에서 법설을 가르치고 있는 강사가 되었다.

강원 이야기를 하다 보니 생각이난다. 죄업을 씼으려고 전국 각지를 돌아 다니면서 수행을 하다가 광능 봉선사에 들른 적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나는 퍽 오랜만에 불경 번역자로서 이름 있는 운허스님, 현역경원장을 만났었다. 그동안 쌓인 회포를 털어놓는 중에 우연히 춘원 이광수 선생의 이야기가 나왔다. 운허스님은 춘원이 바로 자기의 6촌형님이요, 장래가 유망한 청년인데 그가 지금 법화경의 번역을 서두르고 있으니 그를 설득하여 번역을 중단하게해 달라는 것이었다. 춘원이 비록 법화경을 10여년간 공부했다고 하지만 아직 불법을 옳게 해득하지 못했으니 틀림없이 오역이 생길 것이며, 일단 춘원이 번역했다 하면 다른 사람들은 그것을 명역으로 알고 그것만을 읽으려 할 것인 즉 미리 그 해독을 막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운허스님의 청을 따라 자하문 밖 소림사로 갔다. 마침 춘원은 그 절 근처에 새집을 짓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런 이들이 갖는 재기를 온몸으로 풍기고 있었다. 그는 법화경에 심취해 있는 것 같았다. 그 법화경이야말로 완벽한 종교서적이며, 그 문장의 유려함과 비유의 광대함에는 놀라지 않을 수 없다고 그는 칭찬이 대단했었다. 그러나 그때의 그의 불법의 이해력은 내가 보기엔 미미하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법화경은 가야성에서 도를 이룬 부처님의 본도를 말한 것으로서 경정 중의 경전이라 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런 법화경을 그가 다 이해했다는 것은 말도 안된다.

그러나 나는 그의 그런 허점을 찌르고 들어가기보다는 그의 기분을 거스르지 않고, 그에게 불법을 가르쳐줄 수 있는 방법을 택하기로 했다. 그것이 그와 교우를 가지는 길이었다. 그런 연후에 나는 춘원과 3일 동안 쉬지 않고 의견교환을 했다. 심지어는 밥을 먹고 변소에 갈 때도 대화를 그치지 않았다. 그렇게 진지하게 문제점에 대해서 주고받는 데에는 조금도 두 사람 사이의 의견의 거리는 좁혀지지 않았다. 드디어 나흘째가 되던 날 그의 마음에 동요가 일기 시작한 것 같았다. 그 기미를 알아챈 나는 더욱 설법에 열을 올렸다.

그때 그와 나의 애기의 내용은 너무도 오랜시간이 흘러서 지금은 기억해 낼 수 없지만 그의 재빠른 이해력에 내가 감탄했었다는 사실만은 뚜렷이 떠올릴 수 있다. 그의 넓은 이마엔 조금도 비뚤리지 않고 혼미함이 없이 사물을 정곡으로 뚫어보자는 예지가 가득 차 있었다. 어느 날 나는 그에게 불쑥 우리 민족이 독립을 할 수 있는 길이 무엇인가고 물었던 것 같다. 그 때 그는 먼저 민족의 실력을 길러야 한다고 대답했고, 다음 나에게 그 질문을 되돌려 주었다. 나는 그것을 인과의 법칙으로써 설명하였다. 우리가 피압박 민족이 된 것은 일종의 과보이다.그러니 일인만을 미워할 것이 아니라 그 원인을 뉘우치고 그것을 바로잡아야 된다고 했다.

지금 생각하면 몹시나 관념적으로 그런 중대한 문제를 이야기했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런 관념속에서도 그는 그의 입장을 나는 나의 입장을 조심스럽게 천명했고 그런 상이한 사고방식에도 불구하고 며칠 새에 우리는 많은 것에서 의견일치를 보았다고 생각된다. 특히 어려움에 대해서는 더욱 그랬다. 내가 그에게 법화경 속에서 앞으로 자꾸 몰랐던 것들이 발견될 것이라고 했을 때 그는 조금의 불만도 없이 그 말을 받아들였다. 실제로 알면 알수록 어려운 것이 불경이고 법화경이다. 가지를 붙잡았나 하고 보면 잎사귀요, 줄기를 붙잡았나 해서 보면 가지인 것이 불법이다. 그처럼 불법의 진리에 도달하기까지에는 수십 수백의 눈에 보이지 않는 관문을 지나야 되는 것이다. 춘원은 그 한 관문을 그 때 지났다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 때 나는 춘원에게 법화경을 번역하지 말라는 말은 한 마디도 안했었다. 그러나 그는 내가 남기고 간 말의 뜻에서 그것을 알아차렸고, 그뒤로 그것에서 손을 떼었었다. 그후 그는 (꿈)이니 (이차돈의 죽음)이나 하는 작품을 내었는데 이는 모두 불교의 감화에서 우러나온 작품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언젠가 나는 육당과 춘원을 만난 자리에서 그전과는 달리 솔선하여 불교의 의식을 해설한 책자인 (불자필람)을 번역해 주기를 부탁했더니 육당은 능력이 없다고 거절하였고, 춘원은 즉석에서 쾌락하였다. 그러나 한 해 두 해 미루어 오다가 끝내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남 북이라는 불행한 사태를 만나고 말았다.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렇게 기록하다가 보니 나와 춘원과의 교우가 대단한 것같이 되었지만 그런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더 많은 대중들, 대사들과 친하였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춘원의 이야기를 길게 쓰게 된 것은 그에게서 불교의 대중문제라고 할 수 있는 불자와 불법의 관계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신도들은 불법을 승려들처럼 알 필요가 있을까, 즉 그 어려운 법화경을 신도들은 이해 할 필요가 있을까? 이론상으로는 지식으로서의 불교는 누구나 알아야 한다. 불승이란 그것을 몸으로 사는 자이고 신도란 그 지식을 믿는 자이다. 그것이 서로의 한계이다. 그런데도 나는 그 때 춘원에게 너무 바랬었고, 일반적으로 한국불교는 신도에게 그러한 바람을 너무 갖던가 전혀 갖지 않는다는 병페를 지니고 있다. 가장 바람직한 일은 언제 어디서나 평형이다. 그리고 그 평형을 얻는 길은 자제로써만이 아니고, 그것을 알 때 이루어질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도 한국불교는 학승을 앞으로 대량 배출하여 불교의 진리를 대중들에게 쉽게 설명하여 공감속에서 평형을 얻어야 할 것이다.

진리는 아우그스티누스에 의해서도 단테에 의해서도 이야기되어야 하며, 미켈란젤로에 의해서도 부각되어야 한다. 그렇게 각자가 자기의 길로서 이야기할 때 진리의 전모가 나타나는 것이다. 그런 서양의 기독교에 비하면 동양의 불교는 너무 많은 장애가 있다. 어떤 의미에서 불교의 진경은 승려들에 의해서만이 규명되고 있을 뿐, 그밖에는 무수한 오해와 이설이 범랍하고 있는 것 같다. 앞으로의 한국 불교가 해내야 할 길은 그런 오해와 이설을 불식기키고 불교의 단일화 내지는 대중화를 이루는 일일 것이다. 누차 이야기하는 바이지만 불교정화운동이란 곧 그 대중화운동의 투쟁적 어휘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淸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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