淸潭 – 생의 외로운 오솔길

길은 사람이 존재하는한 언제나 있다. 그러므로 그 길은 영원하다.

인간의 정각 역시 마찬가지이다. 완성이란 언제나 없다. 완성은 죽음뿐이다. 그리고 그 죽음도 다만 전변에 지나지 않는다. 뜬구름과 같은 우리들의 생은 끊임없이 흘러가고 있을뿐이다. 그 길에 어느 때는 저토록 붉은 놀이 내리고 눈이 덮이고 인간의 외로운 발자취가 남겨지리라.

그길은 나에게서 젊음을 빼앗아갔다. 사랑을 빼앗아갔다. 이름과 성까지도 빼앗아 갔다. 그러나 그 길은 더 많은 것을 주었고, 그 길은 더 많은 것을 나에게 요구하고 또 주겠다고 약속하고 있다.

인간의 애착 가운데 가장 큰 것은 생에 대한 애착이다. 사람이 음식을 먹고 옷을 입는 것이 살기 위한 행동이며 또한 농사를 짓고 장사를 하며 노동을 하는 것이 모두 먹고 입기 위한 수단과 방법이다. 이와 같이 우리 인간은 부모의 몸에서 떨어져 나올 때부터 생을 영위하기에 부단히 노력하고 있다.

그리고 생에 대한 애착은 욕망과 함께 생기는 것이므로 이 왕생을 누릴 바에는 보다 잘 살고 보다 오랫동안 살기를 기도하게 된다. 남보다 잘 살려는 애착과 욕망 때문에 인간사회는 서로 반목과 질시가 따르게 되고 타락과 패륜이 계속된다.

물론 잘 살려는 욕망이 선의의 경쟁으로 나타날 때는 사회의 질서와 도덕이 확립되는 가운데 사회의 발전이 있을 것이나 오늘날의 인간사회는 그와는 반대로 남이야 어찌 되었든 자기 혼자만의 영락과 안일을 취하면 그만이라는 지극히 이기적인 사상이 횡행하고 있는 형편이다.

그러나 우리 인간의 수명은 한계가 있다. 아무리 오래살고 보다 잘 살고 싶어도 인연이 다하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루를 살았다고 하면 하루만큼 우리는 죽음에 가까워졌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인간이 도대체 어디서 왔으며 또한 어디로 돌아가는 것일까 생각하면 인간은 한조각 구름처럼 생겼다가 홀연히 없어지는 존재다. 한평생 살아봐도 누구를 위해 살았는지, 나를 위해 살았는지 남을 위해 살았는지 까닭도 모르고 한평생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니 모두 바보가 되어 한강에 가자 하면 한강으로 가고, 창경원에 가자 하면 창경원에 가고, 이리 가자 하면 이리 가고, 저리 가라 하면 저리 가고, 모두가 이런 식이다. 장사하는 사람도 다 그런식이고 정치하는 사람은 더하다.

흘러가는 물과 한가지다. 물이 흐르는 것처럼 정처없이 그저 흐르다가 바위에 부딪치면 툭치고 흙탕물이 되기도 했다가 또 거기서 뺑뺑 돌다 막 뒤집힌다. 한강물이 어떻게 흐르느냐 하면 여러 억만년 흐르긴 흘러도 어떤 모양으로 흐르는 일정한 형태가 없다. 저쪽 모래에 부딪혀 모래를 뒤집고 흐르고 그러니 한강 물이 일정한 모양이 없다. 강원도에서 서해 바다로 흘러 들어가는데 참 풍파도 많다. 강원도 오대산 산꼭대기 위로 올라갔다 아래로 내려갔다 고기가 마셔버리기도 하고 사람이 받아먹기도 하고 나무뿌리에 들어갔다 돌 뿌리에 들어갔다 또 수증기가 되어 올라가는 놈 그 신세가 어찌될지는지 모른다.

우리 인간도 한평생 사는 신세가 어찌 될는지, 오늘은 오늘 생각하고 내일은 내일 생각하고 그러니 서양철인들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이 말은 알려고 하면 머리가 아프니까 그렇게 단정해버린 말에 불과하다.

곧 나는 없다는 소리와 한가지다. 허무한 인생이 물거품 같다. 아무것도 아니다. 그래도 나는 시집을 잘 갔느니 장가를 잘 갔느니 돈이 많으니 한다.

그렇지만 그게 어째서 제 돈이냐? 돈한테 이끌리는 것이다. 돈 일원에 구속되고 저걸 누가 집어갈까 꾸어 달라면 어쩌나, 백만원 모아 놓으면 백만장 만큼 생각이 많고 백억원 모아 놓으면 백억장이 낱낱이 사람을 눌러 밤에 잠이 안오고 꿈에서까지 걱정이다. 그러니까 돈 많은 사람은 자유롭지 못하다. 원수가 많아지고 친한 친구가 다 떨어지고 돈이 많으면 많을수록 고독해진다. 권리가 높아도 높을수록 원수가 많고 고독해진다.

그러니 돈도 모을 게 못되고 권리도 높을 게 아니다. 개 돼지소리 들으면서 모았다가 나중에 죽을때는 (지금 죽을 줄 알았으면 마음이나 좋게 쓰고 죽을걸) 그렇게 후회해도 소용없다.

그러니까 일생을 산다는 것이 무엇 때문에 사는 건지 그 까닭을 모른다. 꼭 흘러가는 물처럼 아무 까닭없이 부딪고 저리 부딪치며 사는 것이 인생이 아닌가.

인간의 일평생을 백년이라 한다면 이 일평생을 흔히들 살아간다고 한다.

이 귀중한 한평생을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하고 누구를 위해서 살고 있단말인가? 우리는 흔히 이런 문제들을 전혀 생각지 못한 사이에 머리엔 흰머리카락이 얹어 있고 얼굴엔 주름살이 잡히고 있다.
만일 인간들이 이런 이유를 모르고 그저 먹고 자고 성생활만을 지탱해 나간다면 이는 저 금수들의 생활과 다른 것이 무엇인가.

사람들은 흔히 살아간다고 한다. 그러나 살아간다는 말은 아무런 내용이 없는 말이다. 가령 인간이 ○○년의 삶의 권리를 가지고 와서 하루 살았다는 말은 곧 일년을 죽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살아간다는 말은 죽어간다는 말이 옳을 것이다. 우리가 농사짓고 장사하고 정치하고 경제하고 종교를 믿는다는 것은 죽지 않으려는 것인데 그래도 죽어야만 하는 것이 우리 인생이 아닌가. 이는 참으로 비참한 사실이다. 또 권력 재력 그 무엇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일이다. 인간의 일생을 따지고 보면 죽은 이라고 하는 큰 구렁이한테 뒷다리를 물려 들어가는 개구리의 운명과 다를 것이 없다.

사람은 누구나 오래 살기를 원한다. 그러나 만일 한1천년만 살았으면 족하겠느냐고 물으면, 아니 좀더 한2천년만 살았으면, 하는 것이 인지상정이요, 만족의 한도를 모르는 인간의 욕망이다. 그러나 아무리 그 기간을 연장하여 1만년이나 만배의 기간을 살 수 있다 하여도 또 인간의 가수 상태가 아무리 장기간 가능하다 한들 유한계에서는 한도가 있게 마련이니 결국 종당에는 사멸을 모면할 도리가 없다는 것은 자명한 이치이다.

오직 육체가 나인줄 알고 물질 문명에서 참다운 자아를 찾으려 하는 것은 마치 파초의 껍질을 벗기는 것과 같아서 아무리 벗겨도 알맹이는 없고 껍데기뿐이며 그러한 인간 사회는 아무 실상이 없다. 육체를 가지고 (나)라 하는 뿌리가 박혀서 범부는 이것 때문에 고해를 헤매고 돌아다니고 있다.

개나 돼지 그게 나라고 하여 남을 다 죽인다. 육체가 나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전생명 다 죽이고라도 나는 살려고 덤비는 것이다. 육체를 나라고 생각하는 여기에서 온갖 생각을 다 내는 것이다.

왜 빈껍데기만 가지고 사느냐, 이리 끌리고 저리 끌리고 하느냐, 가령 이성끼리 상종하는 것을 보더라도 여자가 바람이 나면 오늘 저녁은 이런 남자한테 끌려 가고 내일 저녁은 저런 남자한테 끌려 가고 그런 건 미친짓이다. 그런데 그것도 자꾸하면 또 하고 싶어진다. 그러면 이 세상은 혼탁해질 수 밖에 없다. 물질 문명만이 발달되고 성을 개방해 놓으면 인생이 고독해지고 허탈해진다.

나를 아껴주는 사람도 없고 아껴줄 사람도 없는 신세가 되니 이유 없는 반항과 욕구불만이 되어 자꾸 자살하는 것이다. 결국 물질문명은 인간의 행복을 객관세계에서 얻으려고 하기 때문에 그렇게 돼버린다.

나한테 본래 있는 행복이 정말 행복이다. 죽을 수 없는 마음을 깨쳐 얻어야 영원한 행복이다. 불에 뛰어 들어도 안 죽고 칼로 쳐도 안 죽고 원자탄 다 퍼부어도 까딱없는 것, 그 자리에서 얻어진 것이 비로소 행복이 아니겠는가. 그렇게는 못됐다 하더라도 그런 원리를 알고 믿기라도 해야한다.
안심을 하려면 그 정도는 되어야지 그까짓 돈 천만원 얻어놓고 안심할 수야 있는가. 바람만 불어도 어느 놈이 담 안넘어오나 깜짝깜짝 놀라고, 불쌍한게 돈버는 재미이다.

그러나 마음을 깨치면 정말 돈도 필요없고 의식주도 필요없고 생사고도 아무 상관없는데 행복을 얻는다. 지구가 다 깨져도 나는 까딱 없다.

마음을 깨쳐 놓으면 지옥을 가서 가름 가마에 집어 넣어도 거기가 극락이 된다. 그 자리는 뜨겁고 찬 것도 없고 마음대로 안 돌아가는 게 없으니 이 마음 앞에 나를 어찌할 수 있는 법이란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인생은 왜 살아야 하는지 그 원인을 모르고 산다. 그것은 자아를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들이 자랑하는 5천년 인류의 문화는 인생을 불안과 공포에 몰아넣고 있다. 끝내 절망에서 헤매이게 한다. 여기에 끌려 자아는 물론이지만 삶의 의의조차 모르고 살아오고 있다. 왜냐하면 길을 바로 들지 못하고 엇들었기 때문이다. 인생이 인생을 자기에게 찾으려 하지 않고 넓은 우주에서 막연히 헤매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영원히 헤매일 것이다.

이것은 마치 공상주의자가 인간을 옭매 놓고 밀봉교육을 시키는 것과 같이 여러 가지 사상과 학문들이 다 자기주의를 고집하고 있다. 과학 철학 종교, 정치 경제 문화 예술들이다 그러하다.

그러나 싯달다는 이 모든 것을 떠나서 인생을 자기 자아에서 찾으려고 했다. 자아에서 석가모니는 발견했다. 그러므로 인생을 억울한 미결수 즉 신원미상의 존재에 끌려 헤매이고 있는 미결수에서 완전히 무죄수로 석방한 일이다.

우리들에게서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이냐고 할 때, 그것은 곧 목숨이라고 들한다. 그것은 모든 생물이 살아가는 원동력임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런데, 흔히 세상에서는 자기 목숨은 소중히 여기면서도, 남의 목숨은 무시해버리거나 혹은 무자비하게 죽이는 수가 일쑤다. 그러면서도 그것을 당연한 일처럼 여기고 있는 슬픈 현실이다.

나를 살찌게 하기 위해서 남의 소중한 목숨을 앗아야하다니-힘센 놈이 약한 위를 짓밟고도 버젓 할 수 있는 잘못된, 너무나 잘못된 이 풍습!

우리 육체의 힘도 실제로 알고보면 참는데서 나온다. 금생에 많이 참으면 내생에는 아주 장사가 된다. 평생 감기 한번 안 걸리고 건강하게 있다가 죽을 시간이 되면 앓이도 않고 돌아 앉아 죽는다.

저 아무 것도 아닌 무정 허공이 어찌하여 제 스스로가 변화하여 현상을 할 수 있을 것이가?

공즉시색도 또한 그리하여 진공적인 환영상의 무정 현상계가 어찌하여 그 스스로가 진공으로 변하여 돌아갈 수 있을 것인가? 여기에는 필연코 커다란 숨은 그 무엇인가가 있어서 저 무한대의 진공포장에다가 색즉공 공즉색이 불가사의하고 신비스런 영화를 상영하고 있다.

그렇다면 저 진공과 물질은 다만 자유도 없는 죽음의 무정 환상이다. 그와 반대로 불가사의하고 신비스런 영화는 반드시 절대 자유한이 삶의 무한 생명으로서 조화의 무한 동력이다.

그러면 저 현상계가 창조되기 전의 그 무엇인가로서 이 삶의 무한 동력이란 무엇일까?

그것이 곧 우리들의 이 마음이다. 이 세계에는 성 주 괴 공 의 무상이 있고, 이 사람의 몸뚱이에는 생 로 병 사 가 있고, 마음에는 생 주 이 멸 이 있다.

그 사람 잘생겼다고 좋다고 엎어질 듯 야단이더니 나중에는 슬그머니 권태증이 나 가지고 보기 싫어진다. 날마다 한 시간도 안 빠지고 가더니 이제 이틀에 한번씩 가기 시작하고 차차 차차 나중에는 찾아와도 보기 싫을 지경으로 된다.

그렇게 그 사람 좋아하던 마음이 딱 없어지고 그래 가지고 나중에는 미운 생각이 앞서 있게 된다. 그러다가 미운 생각이 차차 차차 없어져가지고 또 좋아하는 생각이 난다. (아이고 불쌍해라 너무했다) 이렇게 변한다.

그러니 마음에 한 생각이 생겨 가지고 무엇이든지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벼락같이 꼭 그대로 내가 죽어도 해야지 하고 글씨를 배운다, 문장을 배운다, 소설가가 된다하고 죽어도 한다고 이렇게 서둘다가도 슬그머니 하기 싫어지는 때가 온다. 남녀간에 연애하는 경우에도 이렇게 처음에는 서로 좋아하는 생각이 일어나는 것을 생이라고 하고, 그 좋아하는 마음이 계속해서 남아 있는 동안을 주라 하고, 좋아하는 도수가 자꾸 식어지고 마음이 달라지는 때를 이라 하고, 차차 서로 지조가 없어져 쳐다봐도 인사도 제대로 안하고 좋다는 마음이 하나도 없어진 때를 멸이라고 한다.

중생의 마음에 생주이멸, 이것이 있기 때문에 몸에 생로병사의 그림자가 나타나고 이 지구와 세계에 성주괴공의 모양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다 순전히 마음에 원인이 있는 것이다.

아! 인생이여 똑바로 생각하자.

이 똑바른 길도 바르게 가며 이 똑바른 길도 각각 자기에 있는 것이다. 나는 나다. 나는 오직 나로서만 나다. 나 이외는 아무 것도 아니다. 나는 또 하너만이 아닌 내가 아니라 저 모든 것들이다. 나는 아니다. 하늘도 땅도 부처님도 하느님도 진리도 다 내가 아니다.

그 너머에서 발견된 이 나는 곧 진리며 조물주며 우주의 본체로서 영원한 자유의 생명이다.

아! 다행한 일이다. 행복한 일이다. 춤추고 노래 부르며 경축하자, 등불을 밝히고 행진을 하자.

석가세존이 49년간 설법한 것이 바로 이 말이외다. 석족께서는 신원미상의 조물주와 인간의 육신이 마지막 길인 줄만 알고 절망과 무명에 헤메이고 있는 인생을 우주의 주인공으로 영원불멸의 자아인 마음의 진여를 밝히고, 둘째로 영겁으로 생사윤회하는 고를 깨우쳐 그 해탈의 길을 밝혀주고, 셋째로 인생의 빈부귀천과 선악과 지혜와 어리석음이 다 전생의 인과응보임을 밝히고 다 나 자신이 스스로 어두운 길을 헤매일 뿐이고 다른 힘의 지배로 되는 것이 아니고 오직 인생으로 하여금 인생 스스로가 우주의 주인공이고 조물주임을 깨달아 자기를 알게 하고 인간 스스로가 영원의 행복을 개척하도록 했다.

우리들이 갇혀 있다가 혹은 죽음의 절망에서 풀려났을 때의 그 홀가분한 자유러움, 그것은 환희다. 그것은 푸른 하늘이다. 이 환희와 푸른 하늘을 우리와 모양을 달리한 생물에게 베푸는 일을 불교에서는 방생이라고 한다.

산 목숨을 죽이지 않을 뿐더러 한걸음 나아가 그것을 살리는 자비!

짐승이나 물고기들이 비록 겉모양은 우리와 다르더라도, 그 목숨에 있 어서는 주금도 다를 수가 없다. 모성애의 숭고함이 우리 인간사회의 전유물만은 아니다. 동물들의 모성애를 보고 눈시울을 뜨겁게 한 일을 우리는 가끔 경험하고 있으므로-자비가 메말라가는 이 살벌한 오늘의 현실에 이 나직한 목소리들이, 우리들 이웃에 두루 번지어 메마른 가슴을 울려줄 때, 우리들의 눈매는 살기 대신 따뜻한 사랑으로 빛날 것이며 가슴마다 이웃에 대한 포근한 자비로 철철 넘칠 것이다.

해가 기울어도 문단속할 수고조차 없어질 것이며, 담장 위에는 철조망이나 유리병의 시퍼런 서술 대신에 부드럽고 환한 꽃을 올려놓게 될 것이다. 날던 새들도 우리 팔에 내려와 마음놓고 쉬어갈 것이고, 물론 살아있는 생명의 푸른 나뭇가지에서처럼-그날 우리는 슬기로운 식물성 왕국의 푸른 깃발을 하늘 높이 올리면서 환희를 합창해도 좋을 것이다. 그때 우리는 비로소 인간일 수 있다. 의젓한 인간 일 수 있다.

淸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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