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담스님 법문모음

중생 목숨 살리는 어진마음 가져야
마음은 산(生) 것이요, 죽은(死)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 마음은 생명 없는 허공도 아니요, 또한 생명이 아닌 무기물질도 아닌 것이다.
물질도 허공도 아닌 이 마음은 우주의 생명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마음이라 하는 것조차 크게 그르치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마음도 마음 아닌 마음, 이것이 곧 인생 보완의 진면목입니다.
이것만이 나 자신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마음 이전엔 아무것도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 마음을 성(性)이다, 도(道)다, 이(理)다, 영(靈)이다, 신(神)이다, 생명이다, 정신이다, 반야다, 열반이다, 보살이다, 진리다, 여여(如如)다, 원각이다, 범화다, 화엄이다 등의 여러 가지 망사로 규정짓고 유물, 유신, 유심, 과학, 철학, 종교를 논하면서 인생을 현혹하고 있습니다.

이 마음은 영원불멸의 실제이며, 절대자유의 생명이며, 우주의 핵심이며 온누리의 진리이며, 천지조화의 본체이며 신의 섭리이며 문화창조의 운동력입니다. 그리고 인생도 인류문화 창조도 모두 이 마음의 환각으로 꿈 속의 꿈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 엄청난 꿈 가운데서 정말로 꿈이 아닌 것은 오직 이 마음 아닌 마음인 이 ‘나’뿐입니다.

이러한 영원불멸의 자기자신을 잃어버린 이유는 나라고 하는 이 육신이 지수화풍(地水火風), 네 가지 요소로 이루어졌다가 흩어져 없어진다는 법리를 망각하고 이 육신만이 자기 자신이라고 착각한 까닭으로 인해, 이 결과로 영겁토록 생사의 고(苦)에서 헤어날 길이 없고 인과의 사슬을 끊지 못합니다.

그러나 마음도 아닌 마음인 이 나, 허공도 물질도 아닌 이 실제의 나를 찾을 때 불안과 공포에서 헤어나는 인류 구제의 길은 있는 것입니다. 오늘 인류는 정신세계를 외면하고 물질 과학의 비약적 발전으로 인하여 극단적인 유물 사상에 현혹되어 자아상실이나 자기부재라는 불행한 현실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오계의 처음에 ‘산 목숨을 죽이지 말라’ 하셨습니다. 예전 말씀에도 ‘천의 대덕은 살리는 것(天德地之大日生)이요, 사람의 대덕은 어진 것(人類之至德日仁)’이라 하였으니, 사람으로서 어질지 않으면 사람의 가치가 없고, 사람의 가치가 없으면 삼재에 참례하지 못할 것이니, 어떻게 사람의 어진 마음을 보존하고 자라게 할 것일까요.

우리가 원하는 여러 가지, 즉 편하려거든 방생하고, 즐거우려면 방생하고, 부귀하려거든 방생하고, 무병하려거든 방생하고, 장수하려거든 방생해야 합니다. 중생의 목숨을 살리는 것이 가장 어진 마음이고, 어진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는 여러 가지 원하는 바가 자연 성취되는 법입니다.

지금 시대는 예전과 달라서 사람과 사람끼리도 서로 죽이고 죽고 하는데 동물을 사랑하고 살리려는 것은 지나칠 일이 아니냐고 하시는 분도 있습니다.
하지만 동물을 먼저 사랑하고 살리기 시작하면 자연히 어진 마음이 차츰 자라날 뿐 아니라 서로서로 권하여서 사람마다 어진 마음을 가지게 된다면 전 세계가 인간극락으로 화할 수 있습니다.
보살은 일체경계에도 걸림없어
부처님의 계행(戒行)을 하나도 깨트리지 않고 잘 지키는 도인을 ‘순행보살(順行菩薩)’이라 하고,
계행을 낱낱이 다 파계하는 그런 보살을 ‘역행보살’이라 합니다.

문수?맨幟말裏?부처님하고 비등한 등각보살(等覺菩薩)입니다.
다 같은 등각보살인데 문수보살은 ‘순행보살’이고, 보현보살은 ‘역행보살’입니다.

중국에서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어떤 스님이 문수보살을 친견하려고 오대산에 들어갔습니다.
오대산에 문수보살, 보현보살, 지장보살이 화현(化現)하여 계시다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이 스님은 백일기도를 목표로 백일 동안 먹을 양식을 마련해서 가는데 한 걸음 걷고 절을 하고, 또 한 걸음 걷고 절을 하는 정성으로 수천 리를 찾아갔습니다. 이 스님은 지성으로 백일기도를 했고, 문수보살 친견의 원을 세웠는데도 꿈에 현몽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이 스님은, “아마 내가 정성이 부족해서 그런가 보다.”하고 생각하여 다시 마을에 내려가서 석 달 먹을 양식을 탁발해 백일기도를 다시 올려야겠다는 결심을 했습니다. 그래서 얼마쯤 내려왔는데 어떤 영감이 밭 가는 쟁기를 큰 암소에 메워 가지고 올라오더니 스님 곁으로 와서 어디 갔다 오는지, 무슨 기도를 했는지에 대해 묻고 나서 스님에게 한 가지 부탁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영감은 스님에게 편지를 하나 주면서 어디를 지나가다가 큰 객줏집 대문 안에 돼지 우리가 있는데, 거기에 큰 암돼지가 새끼를 낳아 놓고 있을 테니, 그 돼지우리에 이 편지를 던져 주었으면 좋겠다는 부탁이었습니다.

이를 허락한 스님은 그 객줏집의 돼지우리에 찾아가 영감이 시키는 대로 편지를 우리 안에 집어 던져 넣었더니 어미 돼지가 벌떡 일어나서 그 편지를 집어 삼켜 버렸습니다. 그러자 암돼지는 그 자리에서 죽어버렸습니다.

그 광경을 함께 보고 있던 동네 사람들이 그 스님의 멱살을 잡고는 “중이 돼지고기 먹고 싶으면 좀 달라고 할 것이지 새끼까지 스물 다섯 마리 돼지를 다 죽여 놓는다”고 야단이었습니다.
객줏집 주인은 마침내 포도청에 고발을 해서 스님이 잡혀 들어가는 사태까지 벌어졌고, 이에 스님은 편지에 관한 내력을 모두 이야기했습니다. 사또는 독약이 묻었는가를 확인하기 위해서 돼지의 배를 갈라 그 편지를 읽었습니다.

편지에는 “너무 오래 축생세계에 머물러 있는 게 아닐세. 중생세계에 오래 머물고 있다가는 잘못 ‘마음자리’를 여읠까 두렵네. 문수보살로부터 보현보살에게” 라고 씌여 있었습니다.

앞에 소를 몰고 가던 영감은 문수보살이고, 암돼지는 보현보살이었습니다.
보현보살이 만행역행을 한다고 돼지가 되어서 수놈하고 성교를 하고 새끼를 배고 모성애로 젖을 먹이고 누워 있었던 것인데 보현보살은 이런 역행을 하면서 그 가운데 공부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보현보살에게 문수보살이 충고를 한 것이고, 문수보살을 친견하려고 백일기도를 한 스님에게 화현으로 보인 것이며, 후세의 공부하는 사람들을 위해 경계한 것입니다.

지계 통해 ‘마음자리’ 깨쳐야
정말 우주와 내가 둘이 아닌 이치를 깨달은 무소득(無所得)의 경지라면 불쌍한 중생을 보고 불쌍한 마음이 일어나고, ‘나’를 위해서는 할 일이 없지만 중생제도를 위해서는 할 일이 많고 잠도 자지 않는 자비심이 있게 됩니다.

오직 남을 위해 주는 ‘자비심’, 어두움이 없는 ‘밝은 지혜’, 중생들을 모두 괴로움으로부터 건져 내고야 말겠다는 ‘위대한 원력’, 이것이 ‘깨달은 이’의 마음이고, 불보살의 마음이며, 무소득의 경지입니다. 중생들의 괴로움은 모두 소득이 있기 때문에 오는 것입니다.

“지식을 얻어야겠다, 재산을 모아야겠다, 미인을 얻어야겠다, 권력을 얻어야겠다”하는 욕망이 일체고(一切苦)를 가져옵니다. 가령 세계에서 가장 좋은 보석을 한 개 선사받았다고 하면, 그날 밤부터 잠을 못 잡니다.
도둑이 언제 담을 뛰어넘어 올지 모르고, 언제 어디서 강도를 만날지, 택시를 타고 가도 안심이 안 되고 비행기를 타고 가도 안심이 안 되기 때문이죠.

이와 같이 마음에 소득이 있으면 안심이 안됩니다.
무엇을 얻었든지 어떤 미인과 연애를 해도 마음이 편치 않고 미남자와 연애를 해도 마음이 편하지 않습니다.
다른 어떤 여자하고 좋아하는가, 다른 남자에게 관심이 있는가 싶어 항상 마음이 불안합니다.
이런 소득에 관심이 없으면 잠이 잘 오고, 소화도 잘 되고 항상 편안합니다.
어디를 가도 하나도 구애될 것이 없고, 참된 자유를 얻습니다.

그러니 아무 소득이 없고, 아무것도 필요 없고, 부처도 필요 없습니다.
부처가 되려고 한다는 것은 나의 생사가 두려워서 그러는 것이지 진실로 부처가 좋아서 그러는 것은 아닙니다. 생사를 초월해서 부처가 된다는 것은 결국 부처도 열반도 구하지 않는 무소득의 ‘마음자리’를 찾는다는 결론이 됩니다.

‘마음’은 본래 구애가 없습니다.
아무 데도 거리낄 것이 없는 진공과 같은 ‘마음’, 불법을 닦아야 할 필요도 없고, 망상이 없으니 망상을 떼어내 버릴 일도 없고, 아무 데도 걸릴 데가 없습니다. 지구만한 보석이 있다고 해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아무 데도 내 ‘마음’이 걸리고 거북한 데가 없습니다.

우리들의 ‘마음’을 이끌어 얽매는 것이 재물입니다.
아무리 착한 사람도 큰 돈을 벌면 ‘마음’이 흔들립니다.
그러니까 자기 ‘마음’이 이런 줄 아는 사람은 세계를 다 준다고 해도 귀를 씻게 됩니다.
세계를 다 차지해서 그 번뇌 덩어리를 맡아 잠 못자고 ‘마음’만 흔들리는 데 그런 짓을 하겠습니까.
이는 그들이 가장 듣기 싫은 소리라는 뜻입니다.
세계의 미인을 몽땅 데려다 준다 해도 그것이 다 귀찮고, 미인이면 미인이지 육체가 아닌 ‘나’에게 무슨 상관이냐는 것입니다.

공부하는 사람은 언제나 부처님께서 가르쳐 주신 대로 계행을 지키고 정진(精進)해야 합니다.
그래서 ‘반야’의 ‘마음자리’를 깨치면 하지도 않고 안하지도 않는 경지에 이르게 되고, 그러고 나면 하면서도 안하는게 되고 안하면서도 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열반은 죽음 아닌 완전한 자기해방
열반이란 말이 죽음의 대명사처럼 완전하게 쓰여진 것은 오늘날 불교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커다란 잘못인 것입니다. 열반이 죽음의 뜻으로 사용된 것은 언제부터인지 알 수 없어도, 흔히 열반이라고 하면 죽음을 연상하게 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열반, 그것이 죽음을 의미하는 것은 불교의 교리를 격하시키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열반은 죽음이란 소극적인 뜻을 표현하기에는 너무나 심오한 진리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불교를 조금이라도 깊이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쉽게 알 수 있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이 열반의 자리는 청정무구의 자리이므로 마음에 일어나는 번뇌의 알맹이로 변이된 자리이며, 몸뚱이에서 일어나는 욕정의 불길이 청정한 향기로 변화하는 과정을 열반의 과정이라 이름 짓게 되는 것입니다.

열반을 증득(證得)한다는 것은 부처가 깨달음의 자리에 올라서는 것이며, 부처의 진리?助?행업을 실천하는 의미를 표현하는 것입니다. 이 부처의 자리가 열반 구경지의 자리이므로 번뇌의 티없고 욕심의 흔적이 없는 것입니다. 오직 바른법에 귀의하여 바른 행을 닦아가는 최상승(最上乘)의 과행을 저어 가는 길이 열반의 길입니다.

열반을 증득하는 길은 고난의 길이며, 수행의 길입니다.
수행의 길은 영원한 진리의 세계 속에 자아를 귀의시킴입니다.
진리 속의 자아는 나 없는(無我) ‘나’입니다.
‘나’를 이름 짓지 않은 ‘나’로서 행함이 ‘참나’의 행업이므로 고난의 길입니다.
그러므로 증득하기 힘든 길입니다.
자기를 바치지 않고, 번뇌를 버리지 않고, 참회하지 않고, 계(戒)를 지키지 않고, 참다운 진리인 부처의 고향에 돌아갈 것인가?

부처님도 육신의 고난과 정신적인 고투로 이룩한 깨달음이 자기해방의 길이었습니다.
자기의 해방은 ‘참나’를 이룩하는 열반의 광명입니다.
우리들 인간이 갖고 있는 육안은 흐리고 어둡지만 열반의 눈은 광명의 눈입니다.
이것은 걸림없이 투과하는 직사의 빛입니다. 굴곡없이 반사하고, 막힘없이 관조하는 지혜의 눈이 열반의 빛입니다.

부처님은 《열반경》에서 “여래가 청정한 계율을 가지는 이는 열반을 얻으리라 하였으니, 내가 지금 깨끗한 계율을 닦는 일로 열반을 얻으리라”하였습니다. 또한 “세간의 계율은 청정하다고 이름하지 않나니, 왜냐하면 세간의 계율은 있음을 위하는 연고이며, 성품이 결정되지 못한 연고이며, 끝까지 이르지 못한 연고이며, 모든 중생을 널리 위하지 못하는 연고이니, 그러므로 깨끗하지 못하다 이름하느니라.”

이처럼 부처님이 열반에 이르는 길로 계행의 청정에 있다고 강조하셨습니다.
속제의 생활에서 지키는 계행이 아니라 진제의 생활에서 지키는 계행인 것입니다.
열반의 의미가 죽음의 의미가 아닌 것과 같이 생명을 바쳐 증득한 것이므로, 종교생활의 최후목적인 것입니다.
‘나’를 잊는 그것이 바로 불도
재물욕 식욕 명예욕과 같은 다섯 가지의 욕락(五欲樂)을 탐착하여 생사의 죄업을 범하지 아니하면 본래부터 청정한 이 마음은 밝고 밝아서 쾌활하여 안락할 것입니다. 오래 익혀 온 모든 지식과 사상과 고집들을 남김없이 모조리 버려야 한다고 했습니다.

유마거사는 “모든 소유를 다 버렸노라”하였으며, 《법화경》에서는 “과거 20년 동안의 설법은 우선 집안의 똥이나 치우게 한 것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이 마음 가운데에 지니고 있던 모든 생각과 소견이나 일체 주의?聆揚?몽땅 버리게 하신 말씀인 것입니다. 또한 유마거사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유와 무의 상대적 입장에서 본말과 시비를 가리고자 하는 의논은 말을 끝맺을 수가 없는 농담?廚極?불과한 것이다. 그것은 똥과 같은 것이니 담아다가 버리게 한 것”. 그러므로 경에 말하기를 저 모든 부처님의 세계도 그것이 또한 없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만약 누가 불도를 배우고 닦아서 얻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러한 소견머리는 불법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것입니다.

어떤 바보가 ‘내가 이러이러한 기회에 어느 선지식을 만나서 그 스님이 눈썹을 찌푸리는 것을 보고 문득 도를 알아 달마선의 이치를 증오체득(證悟體得)하였다’ 하여 풍을 치고 도인 행세를 하고 돌아다니다가 정말로 선지식을 만나서는 한 마디도 입을 벌리지 못하고 도무지 마음이 깜깜하여 칠흑같이 되고 맙니다.

그러나 어찌하다가 한 마디의 대답이 맞은 듯하면 기쁜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날뛰며, 만약에 대답을 못하고 남에게 눌리고 꺾였을 때에는 그 마음이 불안하여 어찌 할 바를 몰라서 당황하나니 그러한 덜된 정신을 가지고 달마선을 배워 알고자 한다면 그것은 아무런 경우도 닿지 아니하는 일입니다.

그것은 조금만큼의 소견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에 달마선과는 아무런 줄이 닿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달마대사께서 면벽(面壁)하신 소식은 부처님께서도 아시지 못하는 소식이거늘 하물며 그밖의 사람들이야 말해 무엇하리.

나를 잊어버리면 곧 그것이 불도인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생각하거나 따지는 것은 마귀의 권속인 것입니다.
이 마음은 비록 그대가 깨닫지 못하고 헤매는 때라고 할지라도 변하거나 잃어버린 것도 아니며, 또한 깨달은 때라고 할지라도 마치 손에 쥔 물건을 찾는 것과 같아서 새삼스럽게 딴 곳에서 얻어온 것도 아닌 것입니다.

변할 수 없는 천진자성(天眞自性)의 이 마음은 흩어져 때가 묻거나 닦아 고쳐서 성해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내가 공연한 착각으로 보는 저 무한대의 허공계가 온통 그대로 이 마음 하나뿐인 것입니다.
마음 본연의 진면목 확실히 깨달아야
지금부터 밤낮을 가리지 말고, 오나 가나 가만히 있거나 부지런히 일을 하거나, 앉았고 누워 있는 동안이라도 다만 모든 일에 무심할 줄만 알아가면 자연히 만사에 잘못을 따지는 분별심이 없어지며, 또한 어디에 의지할 생각도 없어지며 어느 한 곳에서 늘어 붙어 살고자 하는 애착도 없으며 또한 사방으로 돌아다니고자 하는 벌떡거리는 망상도 없어질 것입니다.

먹거나 굶거나 죽거나 살거나 하는 것은 다만 인연에 맡겨 둘 뿐입니다. 그 날 그 날을 무사태평으로 뜻없는 세상을 살아가니 마치 넋을 잃은 사람과 같습니다. 온 세상에서 그 존재조차 아는 사람이 없으며, 그대들 역시 세상이 알거나 모르거나 아무런 관심이 없어서 그 마음씨가 저 만길 땅 속에 깊이 묻힌 바위와 같아서 도무지 금이 간 데가 없을 것입니다.

일체만법이 그 마음을 흔들어 볼 수가 없게 되어 구원의 옛적부터 청정하고 우뚝하며 온전한 이 마음은 이 세상만사에 뜻이 없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비로소 조금이라도 성불(成佛)할 싹이 있을 것입니다. 대중없이 흘러가는 이 세상일을 충분히 살펴서 똑바로 알아차린 뒤에 훨씬 초월자재(超越自在)하여 앞뒤에 구애된 것이 없어야 합니다.

이 마음이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아니하면 그것을 무루지(無漏智)라고 하는 것이니 인간 천상의 착한 업(業)도 짓지 않으며, 선악간에 도무지 아무 생각이 없으니 세상의 모든 인연이 닥쳐오지 아니하여 그야말로 한가하고 자유로운 인생이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한갓 무심하게만 사는 것이 아닙니다. 천당?熾좇막?자유로이 다니면서 중생을 제도하는 것입니다. 경(經)에 말하시기를 보살은 마음대로 가서 몸으로 태어난다(自意生身)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만약에 무심할 줄을 모르고 다만 형식과 규칙에만 얽매어서 수도하는 사람들은 다 마(魔)의 업을 짓는 것이며, 또한 비록 부처님 세상에 태어나고자 불사(佛事)를 닦는다 할지라도 다 그릇된 업을 짓는 일에 불과한 것이니 그것은 성불을 방해하는 것이므로 불장(佛障)이라고 합니다. 이는 우리의 이 청정한 마음자리를 어지럽혀 이 마음이 주재하는 인과법칙에 구속되게 하여 전혀 자유가 없게 됩니다.

이 마음은 본래부터 청정하고 비어있어 물건이 아니므로 말과 생각이 미치지 못하는 것이지만 부처님께서 49년이나 설법을 하신 것은 사정(邪正)을 분간하지 못하는 중생들을 교화한 것에 불과합니다.
이 세상 만사는 모든 것을 다만 그 인연에 맡겨 지내 가면서 억겁 다생으로 사생에 윤회하는 것이며, 항상 그 때 그곳에서 받아 태어난 그 몸뚱이만을 자기라고 고집하여 육신 본위의 치열한 생존경쟁에 휩쓸리고 맙니다.

불과 같이 일어나는 욕심에서 생각나는 불만과 고독에서 오는 불안과 공포와 비애(悲哀)에서 허덕이며 저지른 구원 겁의 모든 죄악의 업습(業習)을 쉬어 버리고 다시는 이 진아(眞我)의 마음을 저버리고 허망 무상한 육신만을 본위로 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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