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성스님과 남한산성

각성스님과 남한산성 벽암각성 큰스님,

그는 조선 선조 8년(1575) 충북 보은의 김씨 가문에서 태어나 현종 1년(1660) 사신으로 일본에 가다가 중도에서 병으로 입적하기까지 86년 동안 오로지 국방의 임무와 중생 교화에 몸을 바친 장한 고승이었다.

저서로는 ‘도종결의’ 1권과 ‘가화결’ 1권, ‘선문상의초’ 1권이 있으며 제자로는 처능이 있다. 벽암은 스승인 부휴로부터 받은 호며 각성은 화산의 설묵으로부터 사미계를 받을 때 받은 법명이다.

어려서 이름은 징원이라 했다.

9세 때 어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10세에 화산의 설묵선사 밑에서 행자로 지내기 4년, 14세에 사미계를 받고 20세가 되도록 불교의 기초 학문을 연마했다.

20세가 되어 구족계를 받은 그는 부휴선사를 법사로 모시고 속리산 법주사, 금강산 유점사, 장안사, 덕유산, 가야산 해인사 등지로 다니며 경전을 공부하였다. 그는 특히 초서와 예서 등 서예에 일가를 이루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산중에서 피난을 하면서도 정세의 흐름에 민감하여 항상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임진왜란 이 발발한 이듬해 그는 스승인 부휴를 따라 전쟁터에 나가 해전을 승리로 이끌기도 했다.

그는 부휴를 20여 년 동안이나 시봉하면서 불법의 진수를 체득하였으며 무엇보다 계행이 청정하였다.

또 쌍계사, 화엄사, 송광사 등을 중건하기도 하여 가람수호에도 남다른 열정을 보였다. 스승인 부휴가 광해군(1608–1623)때 요승의 무고로 서울로 붙들려 올라가자 따라갔다가 봉은사에 머물며 그때 판선교도총섭의 직위를 받기도 했으며, 인조(1623–1619)때에 남한산성을 쌓으며 팔도 도총섭이 되어 승려들을 인솔, 성쌓는 일에 전력투구하였다.

그렇게 하여 남한산성이 완공되어 갈 무럽 병자호란이 일어났다.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파천하였고 벽암각성은 즉시 의승 천여 명으로 항마군을 조직하여 북으로 진격하였다.

한강을 건너 서울에 도착한 항마군은 이미 진지를 구축하고 있던 청군을 물리치기에 이르렀고 그 후 벽암각서은 다시 남한산성으로 돌아와 장경사를 짓고 주석하였다.

이러한 벽암각성에게 남한산성을 쌓게 되는 기막힌 일화가 있어서 소개한다. 징원은 충북 보은의 어느 이름 없는 선비 집안에서 태어나게 된다. 특별히 벼슬을 한 적이 없는 징원의 아버지는 마을사람들이 보통 김 생원이라 불렀다.

김 생원은 결혼한 지 10년이 넘었으나 아들을 얻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김 생원 부인의 꿈에 웬 스님이 나타나 거울을 선물했다. “아니, 이렇게 귀한 거울을 제게 선물로 주신다고요?” 스님이 말했다. “부인께서는 이제 옥동자를 잉태하시게 될 것입니다.

이 둥글고 맑은 거울을 징표로 드리니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아드님을 낳으시면 고이고이 잘 기르십시오. 반드시 우리 조선을 위한 큰 인물이 될 것입니다.”

말을 마치고 나가려던 스님이 되돌아서면서 뭔가 잊은 것이 있다는 듯 말했다. “아 참! 아기의 이름은 맑고도 둥근 거울을 증표로 하여 징원이라 하십시오.” 부인은 꿈 이야기를 김 생원에게 했다.

틀립없는 태몽이라며 김 생원도 좋아했다. 생원 부부는 그로부터 더욱 금슬이 좋아졌다. 부인의 이름은 알 수 없으나 박씨라고 했다. 박씨는 태교를 실행했다.

‘소학’ 명교 편을 펼쳐 놓고 읽던 그녀는 태교에 대한 방법은 알았으나, 너무나 기뻐 들뜬 마음을 추스릴 만한 마음의 가르침이 없음을 안타깝게 여겼다. 그러던 어느 날 밖에서 염불소리가 들려 나가보니 삿갓을 깊숙이 내려 쓴 스님이 탁발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스님에게 필요한 식량이며 옷가지를 시주했다.

스님은 돌아서며 말했다. “나무 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부인께서는 다른 경전을 그만두고 ‘법화경’을 열심히 읽으십시오. 태교에는 뭐니뭐니해도 ‘법화경’이 으뜸이지요.” “어떻게 제가 임신한 것을 알고 계시옵니까?” “나무 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부인의 태내에서는 징원이가 무럭무럭 자라나고 있습니다. 나무 관세음보살…” 박씨가 스님을 알아보고자 가까이 가려 했으나 탁발승은 이미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그리고 그 스님이 섰던 자리에는 ‘법화경’ 한 권이 떨어져 있었다. 박씨는 열 달 동안 지극정성으로 ‘법화경’을 읽었다. 법화경을 읽으면서 그녀의 들뜬 마음은 차분히 가라앉아 그야말로 명경지수와 같은 맑은 마음이 되었다. 마침내 아기가 태어나자 이름을 징원이라 했다.

징원은 재롱도 잘 부렸고 다섯 살이 되자 벌써 ‘천자문’을 떼었다. 여섯 살 때에는 ‘요경’과 ‘명심보감’을, 일곱 살이 되자 ‘오언당음’과 ‘칠언당음”소학’을 모두 이수하였다. 하루는 징원이 서당에서 돌아오자마자 방바닥을 딩굴며 배가 아프다고 했다.

놀란 김 생원 부부는 인근에 있는 의원은 물론 서울에까지 사람을 보내어 훌륭하다는 의원을 모셔오고 좋다는 약을 다 써 보았으나 백약이 무효였다. 징원은 더욱 더 파리해져만 갔다. 음식도 먹지 않았고 잠도 제대로 자지 않았다. 벌써 일주일을 내리 앓고 있었다. 한참 근심하고 있는데 밖에서 누가 찾았다.

“김 생원 어른 계시오?” 김 생원이 문을 덜컥 열었다. 거기에 삿갓을 쓰고 있는 스님이 한 분 있었다. 육환장을 오른 손에 쥐고 등에는 바랑을 메고 있었다. 김 생원이 말했다.

“여보, 탁발하는 스님인가 본데 시주 좀 하구려.” 박씨는 광으로 들어자 시주 쌀을 담아 가지고 나왔다. 시주하면서 스님의 얼굴을 본 그녀는 하마터면 쌀바가지를 떨어뜨릴 뻔하였다. 꿈속에서 본 바로 그 스님이었기 때문이었다. 거울을 주면서 옥동자를 잉태하리라고 하고 또 아이를 낳으면 징원이라 이름하라고 하던 그 스님이었다.

“스님께서 몇 년 전 저에게(법화경)을 주고 가신 스님이 맞습니까?” 스님은 대답 대신 왼손으로 삿갓을 쳐들며 목례를 했다.

박씨는 징원이 지금 병석에 누워 일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얘기했다.

그러자 스님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태연하게 말했다.

“별로 걱정하실 것은 없습니다. 이는 징원이가 부처님과 인연이 있어서 그러한 것이오니 절로 데리고 가면 곧 나을 것입니다.

그러니 징원에게 내가 왔다고 전하십시요.” 밖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듣던 징원은 언제 아팠느냐는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는 스님을 따라 화산으로 갔다.

그 삿갓 쓴 스님이 바로 뒷날 각성스님에게 사미계를 주고 각성이란 법명을 지어준 설묵스님이었다. 각성은 열심히 공부했다.

‘초발심자경문’을 비롯하여 ‘치문’을 읽었고 마침내는 ‘화엄경”법화경’에 이르기까지 누구 못지 않게 열심히 공부했다.

원체 머리가 명석한데다가 대단한 노력파여서 남들이 열흘 걸려 공부할 것을 사흘이면 너끈히 해내곤 했다. 또한 그는 학문을 연마하는 틈틈이 무예도 익혀 몸을 단련했다.

그러던 중 그의 부친인 김 생원이 세상을 떠나자 새로운 의문부호가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사람은 죽으면 어디로 가는 것입니까?” 각성은 설묵스님께 여쭈었지만 설묵스님은 대답을 회피하곤 했다. 그는 혼자서 많은 생각을 했다. 열네 살 되던 해 설묵스님은 각성을 불러놓고 말했다. “나는 너의 스승감이 못 된다. 너는 더 큰 스승을 찾아 떠나 가거라.”

“어디로 누구를 찾아 가란 말씀이십니까?” “속리산 법주사에 부휴선사란 고승이 있느니라. 그분은 너의 스승이 될 자격을 갖추었느니라. 속히 떠나거라.” “너무 빠르지 않습니까.

지금은 밤이니 날이라고 새거든 떠나겠습니다.” 설묵스님은 각성에게 준엄하게 일렀다. “듣거라, 각성아!” “네, 스님.” “세월은 사람을 기다려 주지 않느니라. 나고 죽음의 문제 또한 멈추지 않고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는 줄 모르느냐. 지금이 바로 떠날 때다.

어서 떠나거라. 어서!” 각성은 그 길로 밤을 도와 법주사를 향해 떠났다. 법주사에 도착란 것은 이틀 지난 뒤였다. 부휴스님을 찾으니 선사가 물었다. “어떻게 왔느냐?” 각성이 몇 걸음 걸으며 말했다. “이렇게 이렇게 왔습니다.”

“무슨 물건인가?” “이름도 꼴도 없는데 물건이라니 가당치도 않습니다.” “이름은 그렇다 치고 네 성이 무엇인고?” “네, 김가라고 하옵니다.” “그럼 자네의 부친은 어떤 성을 쓰고 계시는가?” “?” 부휴선사가 문득 주장자를 들어 각성을 쳤다. 순간 각성은 퍼뜩 스치는 한 생각이 있었다. 각성이 말했다.

“불성을 쓰고 있습니다.” “억!” 벽력같은 할이 각성의 고막을 때렸다. 각성은 넙죽 엎드려 삼배를 드렸다. “거두어 주옵소서. 큰스님의 가르침을 받겠나이다.” 부휴선사는 각성의 입실을 허락했다.

그리고 호를 벽암이라 붙여 주었다. 그는 10년 동안 부휴스님을 시봉하면서 지도를 받았다. 광해군 때 조정에서는 무과시험을 치르는 공고가 나붙었다. 각성스님도 무과에 응시했다.

각성스님의 상대가 된 사람은 키가 일곱 자는 되었고 왕방울 눈을 갖고 있었으며 흰수건으로 머리를 질끈 동여매고 있었다. 두 사람은 열심히 싸웠으나 승부가 나지 않았다.

제한된 시간이 거의 끝나갈 무렵 각성스님의 기합소리와 동시에 사나이가 들고 있던 목검이 부러지고 말았다. 각성스님은 공격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으나 상대가 다시 새 목검을 들 때까지 기다렸다.

그러자 상대는 목검이 아닌 진짜 칼을 집어들었다.

그것은 규정상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시험관이 그를 제지했으나 벌써 칼날은 그의 손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

광해군도 볼거리가 생겼다는 듯 시험관을 불러 제지하지 말라고 했다. 각성스님은 호흡을 가다듬었다.

자신은 목검이었고 상대는 진짜 칼이었다. 아차하는 순간에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절대절명의 순간이었다. 사나이도 호습을 가다듬었다. 이젠 서로가 서로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에 함부로 대할 수가 없었다. 사나이의 기합 소리가 장내에 울러퍼졌다.

“얍!” 사나이의 칼이 각성스님을 향해 정면으로 날아들었다. 순간적이었다. 각성스님은 옆으로 슬쩍 피하면서 사나이의 손목을 쳐올렸다. “야압!” “쨍그렁.” 사나이는 칼을 떨어뜨리고는 손목을 잡고 땅바닥에 뒹굴었다. 광해군이 처음부터 모든 동작 하나하나를 지켜보다 소리를 질렀다. “오! 과연 놀라운 솜씨로다.

짐이 지금까지 많은 무술을 보아왔지만 오늘처럼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경기는 처음이었도다. 장하고 장한 일이로다.” 그리하여 각성스님은 판선교도총섭이 되었다. 각성스님은 그 후 여러 차례 남한산성을 구축하여 후일을 대비해야 한다고 간하였지만 광해군은 끝내 각성스님의 말을 일축하고 말았다.

그는 자신의 간언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벼슬을 내던지고 산으로 돌아갔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삼매에 들어 있던 각성스님은 분연히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것은 남한산성을 쌓기 위함이었다. 광해군이 물러나고 인조가 등극을 하고 있는 시기였다.

각성스님은 상소를 올렸다. “도성을 지키는 것은 신하 되는 자의 의무이고 이를 위해서는 후일을 미리 대비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 생각하나이다. 소신은 그 하나로 남한산성을 구축할 것을 강력히 건의하오니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그리고 부처님으로부터 남한산성을 쌓으라는 계시를 받았음도 상세하게 적어 올렸다. 인조는 쾌히 승낙했고 각성스님의 관직도 복직시켜 주었다.

그는 많은 스님들을 인솔하여 성을 쌓는 일에 전념하였다.

성을 쌓는 데는 3년이란 긴 세월이 걸렸다.

그러나 남한산성이 다 이루어지기도 전에 청나라가 쳐들어오자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파천했다. 인조는 각성스님을 보자 그의 선견지명에 깊은 감명을 받았노라고 했다. “대사에게 그와 같은 선견지명이 없었던들 짐이 어찌 살아있을 수 있었겠는가. 경은 내게 있어서는 생명의 은인이며 국가에 있어서는 일등공신이오.” 각성스님은 성곽의 수호를 관군들에게 맡기고 의승 천여 명을 모아 항마군을 조직하여 북으로 진격하였다. 한강을 건너고 마침내 서울에 도착한 항마군은 진지를 구축하고 있는 청나라 진지를 바라보았다.

숫적으로 보나 기세로 보나 항마군의 적수가 아니었다. 그러나 각성스님은 적의 진지 앞에 나아가 큰소리로 외쳤다. “나는 팔도도총섭 김각성이다. 대장은 속히 나와서 나와 한 번 겨루자.” 그때 적진에서 나오던 대장이 각성스님을 보더니 말에서 뛰어내리며 말했다.

“아니, 이거 각성스님이 아니십니까” “그렇소이다. 하지만 지금은 승려의 신분이기 이전에 조선의 장수일 따름이외다. 어서 덤비시오.” 그러나 적장은 싸울 생각이 없었다. 각성스님이 다시 소리쳤다.

“장수가 전쟁터에 나왔으면 마땅히 싸워야 할 터인데 그대는 어찌하여 사사로운 정을 일으켜 싸우기를 미루시오?” 적장이 말했다. “스님은 나를 자세히 보십시오. 지난날 과거장에서 목검을 떨어뜨리고 나중에 진짜 칼을 잡고 싸웠으나 역시 패하고 만 사람이 바로 다른 사람이 아닌 나올시다. 나는 사실 무과를 보고자 왔던 사람이 아니오. 조선의 정세를 염탐하러 왔던 첩자의 신분이었소. 그때 스님의 자비가 아니었더라면 나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것이오. 나는 은혜를 저버리는 사람은 아니오. 그러니 오늘 밤 한 잔 하면서 지난날의 정회를 풀어보심이 어떠하오?” “술을 마시고 정회를 푸는 것은 사사로운 일이지 공적인 임무를 띠고 있는 장수가 할 일이 아니오. 그러니 어서 칼을 뽑으시오.” “좋습니다. 그럼 우리 내일 겨루기로 합시다.”

각성스님도 그 말에는 구태여 반대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또 항마군 승병들도 먼 거리를 달려왔기 때문에 지쳐있기도 했다. 다음날 아침이 되자 항마군은 적진을 향해 공격을 개시했다.

그러나 적진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혹시 함정이 아닐까 생각한 각성스님은 사람을 보내어 살펴보게 하였다. 잠시 후 돌아온 승병이 각성스님에게 편지 한 장을 전했다. “그것이 무슨 편지냐?” “네, 적장이 창끝에 이 편지를 꿰어 놓고 자취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각성스님은 편지를 뜯었다. 거기에는 아주 짤막한 글이 적혀 있었다. “각성스님, 아니 김각성 장군, 지난날의 은혜를 갚기 위해 나는 그냥 돌아가겠소. 나 개인적으로는 항복이라도 좋소이다. 아무튼 스님과의 대결은 원하지 않소. 그리고 내 생전에는 다시 이땅에 창칼을 들고 오지는 않을 것이오.” 편지를 읽은 스님은 항마군을 이끌고 남한산성으로 돌아와 장경사를 건립하고 남은 여생을 후학들 지도와 중생 교화에 바쳤다. 훗날 조선의 조정에서는 남한산성 내에 ‘청계당’이라는 사당을 짓고 스님의 공적을 기리며 해마다 추모제를 올리곤 하였다.

이처럼 남한산성은 각성스님과 수많은 승려들이 배불숭유의 서러운 정책하에서도 오로지 구국일념의 충정으로 쌓은 것이었다. <동봉스님이 풀어쓴 불교설화 中에서> 동봉스님 1953년 강원도 횡성군 갑천면 하대리에서 출생하여, 75년 강원도 치악산 구룡사에 입산하고 그 해 합천 해인사에서 윤고암 대종사를 은사로 축발수계하였다.

76년 유석암 대화상에게 구족계를 받고 김일타 대율사에게 보살계를 받았다. 79년 3월에 윤고암 대종사로부터 대덕 법계를 품수받고, 해인승가대학을 졸업했으며, 불교통신교육원 전 과정을 이수하였다.

80년 중앙승가대학에서 수학하고, 91년부터 동국대 불교대학원에서 관리자 과정을 이수중이다.

해인사도서관장, 승려사우회 회원, 한불련 중앙지도법사, 대각사 상임 포교사, 대각사 교무, <선우도량> 편집위원, <선원> 편집위원, 부산 안양사 주지를 거쳐 현재 원각사 주지이며 천일기도 정진중이다.

83년 문화 교류차 동남아를 순방하고, 86년에는 학술회의 참석차 자유중국을 방문했다. 저서 및 역서로는 <대각사상과 전개>, <사바세계로 온 부처님의 편지>, <관음경 강화>, <우리말 관음경>, <현우경(비유의 바다)>, <불교의 우주관>, <생활불교요전>, <불교우화백유경>, <원시불교>, <밀린다 팡하>, <용수의 대승사상>, <선의 진수>, <코스모스와 만다라>, <나룻배와 행인>, <평상심이 도라 이르지 말라>, <마음을 비우고 차나 한잔 들게나>, <동봉스님이 엮은 오디오 반야심경> 등 다수가 있고, 공저로는 <불교상식백과>, <경전의 세계>, <선사신론>, <감론법문>, <진리의 수레바퀴> 등이 있다. 이밖에 주식회사 성음에서 독송집 카세트 1, 2와 오아시스 레코드에서 염불독송 카세트 1, 2를 취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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